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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동료 배심원의 삭발

배심원 의무 수행 통지를 받았다. 은퇴 전에는 환자 핑계를 대고, 여러 번 면제를 받았던 일이다. 민사 소송 때, 증인으로 한번 불려 가서 의무 수행을 했던 적이 있을 뿐이다. 70세 이상의 시민들은 질환이 있으면 의사 소견서를 받아서 제출하면 면제될 수 있다. 이번에는 생의 마지막 임무 수행이라 여기고, 기쁘게 참여할 결심을 했다.     배심원 의무는 미국 시민으로서 납세, 국방, 법률 준수 등과 함께 지켜야 하는 의무 중의 하나이다. 국방의 의무는 18~26세 청년들이 지켜야 하는데, 1973년부터 모병제로 변했다. 그러나, 만약 미국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이 모병제는 징병제로 즉시 바뀐다.     납세, 국방, 법률 준수 의무는 영주권자도 지켜야 하는 사항이다. 그러나 배심원 의무는 시민권자에게만 주어진다. 배심원이 되는 것은, 의무이자 권리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출정하라는 날 며칠 전에, 원래 출두하라고 했던 법정이 아닌 곳으로 오라는 통지가 전자우편 문자로 왔다. 당일 출정해서 가서 보니까 법원에 가보니 근방 세 지역의 배심원 후보자들을 한군데로 모아서 큰 인력을 동원하여야 할 만큼 중대한 ‘국민(people) vs OOO’라는 중범 형사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사재판이므로 원고는 국민이고, 검사가 국민을 대표하는 경우이었다. 범죄 내용은 배심원끼리 토론하거나 친구나 친지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재판 내용을 이 글에 쓰지 않는다.   여러 과정을 거쳐서 여섯 명 ‘대체 배심원(alternate juror)’ 중 하나로 뽑혔다. 대체 배심원들은 정규 배심원 12명과 함께, 모든 과정에 참여해야 했다. 왜냐하면, 정규 배심원이 응급상황으로 배심원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대체 배심원’들도 재판의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함께 준비해야 한다.     배심원 선출 과정은 생각보다 무척 세심하고 까다로웠다. 배심원은 거짓 없이 본인과 이세, 삼세 가족 구성원의 개인 정보를 제출해야 한다. 개인 정보 유출을 경계하면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좀 의외의 요구 상황이었다. 양쪽 측 대변인들의 공적인 질문에 배심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답했다. 이 과정 중에, 편견을 가졌는지를 요리조리 돌려가면서 질문하여서 찾아내고, 편견의 성향이 있다고 판단되면 제명하는 과정이다.     뽑힌 배심원들은 여러 연령대이었고, 아시아계로는 1세인 나와, 타이완 계통 2세 청년이 있었다. 이 재판은 두 달이 넘게 진행되고 시간을 끌어서, 배심원들은 서로 대화하며 친해졌다. 재판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로 서로 나누어서는 안 되어서 재판 내용만 빼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은 셈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에 인기 좋은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 음식에 대한 경험, 여행 등 다양했다.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공개석상에서 알린 바 있어서, 한국과 관련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쉬는 시간에 가까이 접근해 왔다. 그리고 암 전문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족, 친척들의 암 치료에 대한 의견도 물어왔다.     이러한 두 가지 질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흔히 받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내가 정해 놓은 프로토콜대로 대답해 주었다.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비 혈통 사람들과 나눌 때는 내가 한국말을 하고, 한글을 쓰지만, 모국을 떠났을 때와 지금의 한국은 문화적으로 다른 나라라는 것을 인지시켜 준다.   내가 최근 방문했던 모국을 홍보하는 좋을 기회이고, 또 한국어 진흥에도 한몫할 수 있었다. 한글이나 외국 언어를 성장기에 배우면 두뇌 성장에 유익하다는 의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을 덧붙여 알려주기도 하였다.   의학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늘 조심한다. 왜냐하면 환자를 진찰하지 않고 의견을 내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주치의가 아닌 의사들은 ‘건강보험 이전과 책임에 관한 법(HIPAA)’을 지켜야 한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아픈 친척이 직접 주치의의 견해를 묻도록 격려해 주라고 말해 주었다. 시원한 답변을 듣지 못하면 의사를 바꾸거나, 다른 의사의 이차적 소견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어느 날, 배심원 남성이 머리를 빡빡 깎고 법원에 왔다. 나에게 암에 관해서 물었던 중년 남성이었다. 나는 농조로 무슨 ‘보속(補贖)’이라도 해야 할 일이 생기었냐고 물었다. 보속이란 가톨릭교회나 동방 교회에서 고백성사 후, 지은 죄에 대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속죄 행위이다.     그 남성은 동생이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기 때문에, 함께하는 마음에서 자신도 삭발했다고 말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 너의 정성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위로하고 응원해 주었다.   요즘은 치료 방식의 발달로, 표적 치료 방법을 활용하기 때문에 탈모 부작용이 심하지 않다. 탈모 예방은 과거에 시도 한 적이 있었지만, 효과가 없다. 행여 암세포가 두피에 정착하는 것을 방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 잘 쓰지 않는다. 탈모는 대부분 일시적인 부작용이다.     나는 환자 가족이나 친구들이 자진해서 삭발하는 것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바로, 함께한다는 깊은 마음을 표시하는 용감한 행동이다. 이렇게 함께하는 친구나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나도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또 나를 위해 삭발할 친구가 있을까도 생각해 보고 있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오픈 업 배심원 삭발 배심원 의무 정규 배심원 배심원 후보자들

2025.07.2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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