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마당] 타력의 바람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작가 이츠키 히로유키(93)는 그의 출세작 『청춘의 문』 이후 발표한 『타력(他力)』에서, “나 이외의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력(自力)’의 신화를 조용히 부정했다. 그에게 타력이란 종교적 개념을 넘어, 인생의 불확실함 속에서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온기의 이름이었다. 그것이 신이든, 우주든, 혹은 타인의 따뜻한 마음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삶은 결국 ‘나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이츠키는 이렇게 말한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만 반복될 때는 체념하라.” 그의 체념은 포기가 아니라, 받아들임에 가깝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세상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맡길 때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의미다. 그는 또 “힘들 때는 격려보다 위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위로는 ‘더 잘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럼에도 괜찮다’는 수용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가 있다. 정치인이자 작가로, 대중 강연가로 활동하는 유시민은 한 강연에서 인생의 태도를 세 단어로 정리했다.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 Amor Fati(운명을 사랑하라),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그중에서도 마음에 남은 말은 ‘Amor Fati’였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바꾸기보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라는 뜻이다. 이 또한 결국 이츠키 히로유키가 말한 타력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언제나 완전한 주체로 살 수 없고, 때로는 삶의 흐름을 인정해야 한다. 억지로 상황을 통제하려 할수록 더 큰 절망이 찾아오지만, 그 흐름을 받아들일 때 삶은 오히려 자연스러워진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엔 자력(自力)의 한계를 느낀다. 아무리 애써도 벽이 무너질 기미가 없을 때, 우리는 체념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하지만 체념은 패배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다른 힘의 순서를 기다리겠다”는 성숙한 선언이다. 기도나 명상, 예불이나 고요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타력의 바람을 기다린다. 그것은 단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겸허한 자세이기도 하다. 김영훈·LA독자독자 마당 대중 강연가 memento mori 종교적 개념
2025.11.02.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