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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신의 선물

지난 1월 말 뉴욕을 비롯한 미 동부 지역에 12~18인치 이상의 폭설이 내렸다. 나중에 알게 된 뉴스지만 러시아 캄차카반도에는 60년 만에 2.5미터 이상의 폭설이 건물 3~4층까지 덮어 지하 얼음 동굴 같은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나와 같은 필수 인력(essential worker)는 그 어떤 천재지변, 코로나19와 같은 이변에도 현장에 나가야만 한다. 폭설 일주일 전부터 하늘은 준비 작업에 들어간 듯 싸하고 을씨년스러운 잿빛을 날마다 흩뿌리고 있었다. TV만 틀면 공포를 조성하는 불안한 긴장감이 부풀어갔다.     올겨울 나는 유난히도 운이 없는지 꼭 내가 근무하는 날마다 눈보라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 이 눈사태로 잔뜩 긴장하고 조심조심 준비하던 중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병원에서 하룻밤을 자겠냐고 그렇지 않으면 일요일 밤 퇴근에 월요일 새벽 출근을 해야 했으므로 나는 Yes! 하고 외쳤다. 난 로또에 당첨된 듯 행복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일요일 새벽에 집을 나섰으나 세상은 벌써 하얗게 덮였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눈은 아직 얼어붙지 않아 시속 20마일로 병원에 무사히 또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고 중환자실 병동에 입성하자 밤 근무 동료들이 일제히 박수로 환영한다. 이 의식은 우리 동료들 사이에 무언의 전통이 되어있다. 극악한 상황에서 그들을 구제해 줄 교대팀의 출현이 눈물겹게 고마운 것이다. 일단 인계를 받고 나의 하룻밤을 지낼 곳을 알아본 결과 나는 다시 한번 기쁨에 깡총했다. 거의 2년 전에 새로 지어 이사 온 현재의 중환자실은 5성급 호텔이다. 에어 매트리스, 대형 텔레비전, 컴퓨터, 아이패드, 현대식 화장실, 한 면으로 다 뚫린 대형 창문을 통해 밤새 아름다운 설경을 즐길 셈이다.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일을 마치고 열 걸음 만에 환상의 내 방으로 퇴근했다. 그날 밤 퇴근길과 다음 날 아침 출근길의 전쟁터에서 갑자기 내려온 신의 선물로 나는 눈물겨웠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인가! 먼저 향기로운 얼그레이 차를 들고 나의 황홀한 밤을 위해 창가에 기댔다. 특유의 아로마가 코를 유혹하고 입안에 들어온 첫 모금은 안개처럼 퍼져 나의 눈을 사르르 감게 한다. 목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운 감촉은 가볍게 나를 안아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 준다. 어렸을 적 그리고 아직 운전하기 전까지 눈은 신비 그 자체였고 가슴을 뛰게 했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요술 방망이였다. 눈으로 덮인 하얀 어둠 속에는 고요와 나만이 존재하는 참혹하게 아름다운 빛나는 세상이었다. 하얀 숨이 입에서 새어 나가자마자 하얗게 부풀다가 사라지곤 했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좋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환상의 세계에서 태어난 고요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열린다. 눈송이 하나하나에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팝콘처럼 터진다. 예쁜 이야기들을 토해낸다. 하얀 숨 덩어리와 하얀 눈 덩어리가 한데 어울려 큰 그림을 그린다. 창밖도 아름답고 내 마음도 아름답다.     미국에 오고 나서 바로 운전을 시작한 나는 눈과 설경이 선물하는 아름다운 감성 대신 전쟁터로 향하는 전투사로 변신해 있었다. 오늘 밤 운전에서 해방된 안도감이 나에게 설원의 나라를 마음껏 날게 해 주었다. 온 세상이 걱정과 염려 속에 불안하게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나만의 찬란한 세계를 유영하고 있었다. “Things happen for the better”라는 속담이 딱 맞았다.     1월이 2월 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겨울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기회라 생각한다. 난 이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뉴욕이 좋다. 한 계절이 지루해질 때면 다음 계절이 어느새 발아래 당도해 있는 뉴욕을 정말 사랑한다. 아직도 2월 한 달은 충직한 겨울이고 3월은 겨울과 봄의 힘겨루기가 시작될 것이다. 겨울이 남긴 잔설에서 움이 트는 계절도 저 먼발치에서 아른거릴 날도 머지않았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선물 일요일 새벽 이번 겨울 중환자실 병동

2026.02.0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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