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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하늘은 두 번 무너졌다. 맨해튼을 가르던 초고층 쌍둥이 빌딩이 연기에 휩싸여 내려앉던 그날의 충격은 24년이 지난 지금도 한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사람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맨해튼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하던 박홍규 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출근길에 올랐다. 잠시 후, 생전 처음 들어보는 폭음이 귀를 찔렀다. 그는 곧장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한 뒤, 교회 교인 몇 명을 차에 태우고 조지워싱턴브리지를 넘어 급히 뉴저지로 향했다.   박 씨는 “39스트리트에 위치한 공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거리 전체가 매캐한 냄새로 가득했다. 사람 타는 냄새를 비롯해 별의별 냄새가 진동했다”고 회상했다.     9·11 타격에 문 닫는 가게들도     그날의 테러는 한인들의 삶과 생업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박 씨는 “테러 이후 뉴욕 봉제공장과 거래하던 회사들이 대부분 중국 공장으로 옮겨갔고, 공장 운영자들은 직격탄을 맞았다”며 “100명에 달하던 직원도 절반 이상 줄여야 했고, 1년 동안은 렌트를 사비로 메꿨다. 너무 힘든 시기였다”고 말했다.   업종의 변화도 생겼다. 그는 “이때 봉제공장을 접고 세탁소로 업종을 바꾸는 한인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맨해튼 코리아타운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최 씨도 “테러 직후 교통은 마비됐고 관광객은 급감해 매출이 급격히 줄었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뉴욕에서 여성 의류사업을 해온 박윤용 한인권익신장위원회장은 “당시 차이나타운에서 장사하던 한인들 역시 로어맨해튼 진입이 막히면서 상당수가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고 전했다.   맨해튼에서 뉴저지까지, 장장 8시간의 여정   당시 33세였던 장영 씨는 아내와 태어난 지 세 달 된 아이를 데리고 맨해튼 오피스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페리 선착장도, 전철역도, 링컨터널도 모두 폭발물 위협으로 봉쇄돼 길이 막혀 있었다.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배가 고파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안고, 젖이 불어 너무 아프다는 아내를 부축하며 무작정 조지워싱턴브리지 방향으로 걸었다. 맨해튼 쪽으로 진입하는 차선은 막혔지만 다행히 뉴저지 방면은 일부 열려 있었다. 그렇게 8시간에 걸친 고된 여정을 끝내고서야 장 씨 가족은 겨우 집에 닿을 수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25세였던 장 씨의 남동생은 첫 번째 테러 당시 뉴욕대(NYU) 기숙사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월드트레이드센터로부터 고작 4km 떨어진 위치였다. 샤워 중 이상한 진동을 느끼고 거실로 나오자 뉴스 속보가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 대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온 순간 무서운 굉음과 함께 온 세상이 새하얀 재로 뒤덮였다. 두 번째 테러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장 씨는 소리치는 군중 속에 휩쓸려 3시간 만에야 12스트리트에 사는 친구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영구적인 평화 모색했으면   그리고 여기, 그날의 아픔을 평생 지울 수 없는 이가 있다. 김평겸 씨는 9·11 테러로 월드트레이트센터 북쪽 타워에서 일하던 아들 ‘앤드류 김(한국이름 김재훈)’을 잃었다. 스물여섯, 너무도 짧았던 젊은 생이었다.     테러 이후 그는 아들을 기리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 ‘앤드류 김 메모리얼 파운데이션’을 설립했다. 김 씨는 “20년 넘는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단순히 슬퍼하기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테러 후 많은 유족들이 트라우마로 인해 뉴욕을 떠났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다시 모여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영구적인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윤지혜 기자 [email protected]냄새 진동 맨해튼 코리아타운 맨해튼 오피스 박윤용 한인권익신장위원회장

2025.09.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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