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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할 50년:타운 인프라 해법] 타운 행복 ‘교통·녹지·치안’ 삼박자에 달렸다

LA한인타운은 동쪽 다운타운, 서쪽 웨스트LA, 남쪽 사우스LA, 북쪽 할리우드 중앙에 위치해 도심 내 지리적 장점 면에서 최고로 꼽히고 있다. 2028년 LA올림픽을 앞두고 한인타운 재건축 및 재개발도 한창이다. 반면 LA한인타운은 지리적 장점과 동시에 인구 과밀에 시달리고 있다. 한인타운의 성공적인 미래 모습은 ‘교통·녹지·치안’ 등 주거환경 개선 여부에 달렸다. LA시정부가 밝힌 청사진, 각계각층이 짚은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알아봤다.   대중교통 요충지로 부상   2020 연방센서스국 통계에 따르면 한인타운은 LA에서 인구밀집도가 가장 높다. 동서 후버스트리트/웨스턴 애비뉴와 남북 피코 불러바드/베벌리 불러바드 2.9스퀘어마일에 11만4047명이 살고 있다. 1스퀘어마일당 인구는 3만9632명으로 LA시에서 1스퀘어마일당 4만 명에 근접한 지역은 한인타운이 유일하다. 한인타운의 인구밀집도는 LA다운타운, 센트럴시티&보일하이츠, 미드윌셔의 두 배 이상이다.   반면 한인타운 중위소득은 가구당(4인 기준) 4만6000달러로 LA카운티 가구당 8만2516달러(캘리포니아 가구당 9만1551달러) 대비 절반 수준이다. 저소득층 비율이 높아 한인타운 주민을 위한 도보·자전거·대중교통 등 친환경 시설 확충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LA시를 관할하는 10지구(시의원 헤더 허트)와 시장실(시장 캐런 배스)은 한인타운 특성을 고려해 대중교통 및 편의시설 개선 계획을 밝혔다. 저소득층이 밀집한 한인타운 주민을 위한 맞춤형 개발안인 셈이다. 시정부는 한인타운 아파트 재건축 등으로 인구는 더 밀집할 것으로 예상, 친환경 거리 및 대중교통 시스템 구축에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LA시에 따르면 한인타운 대중교통 개선 프로젝트는 ▶지하철 D레인(구 퍼플레인) 3단계 공사 2027년까지 마무리 ▶버스전용차로 확대 ▶자전거 전용도로 확대 ▶버스정류장 그늘막 확대 등이다.   지하철 D레인의 경우 현재 종점인 LA한인타운 윌셔/웨스턴역부터 웨스트우드/UCLA 구간까지 약 10마일 확장공사가 2019년부터 시작됐다. LA카운티 메트로폴리탄교통국에 따르면 1단계 확장공사인 윌셔/라시에네가역까지 3.92마일(3개 역 추가) 구간은 2025년 개통 예정이다. 2단계 라시에네가-베벌리힐스-센추리시티 2.59마일 구간(2개 역 추가)은 2026년 개통, 3단계 센추리시티-웨스트우드/UCLA 2.56마일 구간(2개 역 추가)은 2027년 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버스 이용자를 위한 대중교통 시설에도 예산이 투입된다. LA한인타운을 포함해 향후 10년 동안 버스정류장(bus shelters) 3000개와 그늘막 시설(shade structures) 450개를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LA시장실은 한인타운 마스터 플랜 문의에 대해 “스트리트LA 부서는 보도 및 대중교통 편의시설 프로그램(STAP)을 통해 버스정류장 확대를 시작했다”며 “LA한인타운은 ‘버스 이용객 수, 더위 노출빈도, 대중교통 의존도, 주요 시설 접근성, 버스 대기 시간’ 등 우선순위 평가에서 상위권에 속한다. 한인타운에 새로운 버스정류장을 계속 확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인타운을 관할하는 10지구 사무실도 몇 달 안에 버스정류장 추가설치에 나선다고 밝혔다. 또한 올림픽 불러바드에 이어 한인타운 버스전용차로 확대 사실도 알렸다.     10지구 사무실 측은 “한인타운은 남북으로 관통하는 버몬트 애비뉴에 버스전용차로 설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한인타운을 대중교통 요충지로 만들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밖에 LA교통국(DOT)은메트로 D레인 및 도심 접근성 확대를 위해 ▶7가 사우스 킹슬리 드라이브부터 웨스턴 애비뉴 구간▶1가와 옥스포드 애비뉴 ▶로버트 F 케네디 앞 7가 ▶할리우드 불러바드 진입 등 자전거 전용도로를 확대하고 있다.     교통국은 현재까지 자전거 전용도로 33마일 이상을 구축했다며, 특히 인구 밀도가 높은 한인타운의 자전거 이용 편의 및 대중교통 활성화를 주요 프로젝트로 꼽았다.   녹지공간 확보·주차난 해결   한인타운은 LA카운티 최고 인구밀집지로 주택난, 각종 사건·사고, 녹지 부족, 만성 주차난 등으로 악명 높다. 지난 10년 동안 타운 곳곳에 늘어난 홈리스 문제는 또 다른 골칫거리다. 나무심기 등 주거환경 개선에 앞장서는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 등 한인단체는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한인타운 미래모습을 위해서는 녹지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우선 LA 10지구 시의원실과 시장실은 인구 최대 밀집지 대비 공원이 턱없이 부족한 한인타운 현실 개선 필요성을 인정했다. 동시에 녹지조성에 필요한 예산 확보 및 집행도 약속했다.     시장실 측은 “배스 시장도 한인타운 내 공원이 부족한 사실에 동의하고, 녹지조성이야말로 한인타운 활성화와 주민 삶의 질 향상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최근 착공한 피오피코 도서관 포켓 공원 외에도 다양한 보조금 마련과 자금지원 기회를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실에 따르면 시는 한인타운 내 활용도가 낮은 토지를 커뮤니티 가든형 녹지공간으로 활용하는 사업을 계속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커뮤니티 스쿨 파크 프로그램을 한인타운에 우선 적용해 공립학교 운동장을 방과 후 주민들이 이용하도록 할 예정이다.   10지구 시의원실 측은 한인타운에서 100년 만에 처음 조성되는 녹지공간인 피오피코 도서관 포켓공원(예산 2700만 달러) 외에도 샤토 레크레이션센터 개선 작업 기금 300만 달러도 확보했다고 밝혔다.     시의원실 측은 “한인타운 녹지공간 조성에 힘쓰는 동시에 주차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방안도 찾고 있다”고 전했다.   비영리단체는 녹지공간 등 주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용부지 확보와 질적 향상을 주문했다. 친환경 대중교통 시설을 확충해 주차장 부지를 녹지공간으로 전환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KYCC 커뮤니티 계획&개발 담당 션 국 디렉터는 “한인타운 청소년들이 집밖에서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원 등 녹지공간 확보가 돼야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며 “1992년부터 KYCC는 한인타운 중심으로 나무 1000그루 이상을 심었지만, 2016년 LA카운티 보고서에 따르면 주민 1000명당 녹지공간은 한인타운이 최악으로 나타났다. 한인타운 상권 판매세 등으로 조성된 지역 재개발 기금을 집행하는 시스템이 작동해야 제대로 된 환경개선이 보장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치안 강화해야 ‘핫스팟’   한인타운이 LA시를 대표하는 주거 및 상업 지역이 되기 위해서는 ‘치안강화’가 최우선이라는 공통된 목소리가 나왔다. LA한인회·한인상공회의소 등은 “지역사회 공공안전이 담보돼야 장밋빛 청사진 실현이 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제임스 안 LA한인회장은 “친환경 대중교통과 녹지공간이 확보돼도 공공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LA한인타운을 찾지 않게 된다”면서 “현재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 주변에서 약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홈리스 문제 역시 공공안전 및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회장은 이어 “주민들이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을 때 한인타운에서 외곽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시정부가 현재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정책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펼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건축디자인시공회사 URD의 김태식 프로젝트 수석매니저는 “주민은 집 밖을 걸을 때 ‘보호받는다’는 안전을 확보해야 한인타운이 살고 싶은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며 “시정부가 대중교통과 주택가 강·절도 범죄 예방 및 대처에 적극 나서서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봉현 전 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은 “한인타운 주민과 비즈니스 업주가 체감하는 공공안전은 웨스트LA나 다운타운과 비교해 훨씬 안 좋아졌다”며 “경찰 등 치안기관이 제 역할을 못 하는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한인사회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 한인타운을 시의원 선거 단일 지역구로 조성하는 장기목표도 실천할 때”라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창간특집 한인타운 주거환경 반면 la한인타운 한인타운 재건축 반면 한인타운

2024.09.2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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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체조협회 CLO 데비 손 변호사, 정치·법률·스포츠·엔터분야서 맹활약

수십년간 정치, 법률, 스포츠 및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데비 손 변호사는 국제 비즈니스 우먼으로서 지성과 경험을 갖춘 리더이자 수퍼 우먼으로 한인사회보다는 주류 커뮤니티에서 더 잘 알려진 유명 인사다.   지난 2021년 4월 최고법률책임자(CLO)로 미국체조협회 리더십 팀에 합류한 손 변호사는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다.   여성 최초로 미국프로농구(NBA) 등록 에이전트인 손 변호사는 최근까지 퀸 에마누엘어쿼트 앤 설리번 로펌의 파트너이자 국제 무역 소송 및 공공 정책 그룹 의장을 역임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엔 미국무역대표부 차관보로 활약했으며 포천지 선정 200대 종합 철강회사인 유나이티드 스틸에서 국제 무역법 및 글로벌 공공 정책 담당 부사장으로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최고 경영진에 올랐다. 또한 티켓 마스터 차이나의 CEO 겸 최고법률책임자, USC 법률센터의 국제 무역정책 겸임 강사로도 활동했다.   USC와 조지타운대 로스쿨 출신인 손 변호사는 의회 흑인 코커스 입법 의장 및 전국 교육 로비스트로도 활동했으며 스미스소니언 국립 자문위원으로 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칸 센터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이 밖에도 아스펜 인스티튜트와 미국 변호사 재단의 펠로, 전미 아태계 미국인 변호사협회(NAPABA), USC, 조지타운 여성평화안보연구소, 미국국제법학회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손 변호사는 한인 여성으로는 첫 선출직 교육자로 활약했던 고 메리 손 여사의 장녀이자 다이빙 플랫폼 부문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고 새미 리 박사의 조카이기도 하다. 남가주 출신인 손 변호사의 가족은 1904년 하와이에서 가주로 이주했다. 특별한 이유는 모르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는 손 변호사는 어릴 적부터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 롤링스톤스 등 음악과 영화에 미쳤었다고 회고했다.     인생 멘토에 대해 손 변호사는 USC에서 복수 전공을 하고 남편과 일찍 사별했음에도 네명의 자녀와 조부모를 돌본 지혜와 힘을 보여준 어머니 메리 손 여사라고 밝혔다.     손 변호사는 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허용하면서 기회를 마련해 준 어머니 덕분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망이 생겼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재판 변호사가 됐다고 전했다.       한때 직접 선출직인 하원의원에 도전하려고 시도했었던 손 변호사는 현재는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할 사람들을 선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가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관심이 많다는 손 변호사는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대표성을 높여야 한다며 구글의 CEO가 남아시아계인 것처럼 이미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며 지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여러 방면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손 변호사는 전국아태변호사협회(NAPABA)가 여성 문제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개인에게 수여하는 ‘여성 리더십 어워드’를 지난 2019년 수상했다. 또한 같은 해 정치 및 사회, 법률 분야에서 탁월한 공로를 이룬 개인에게 수여되는 다니엘 이노우에 트레일블레이저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한인 커뮤니티를 알리고자 LA한인타운에서 스미스소니언 아시안퍼시픽 센터 갈라를 진행했는데 한인 힙합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제이 박을 초청해 K팝을 소개하기도 했다.   주류 법조계에 아시안 법조인들이 여전히 극소수라고 지적한 손 변호사는 한인 사회를 포함해 아시안 커뮤니티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성장을 이루는데 참여하고 싶다면서 어머니, 삼촌처럼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손 변호사는 한인사회를 이끌어갈 한인 3세들에게도 커뮤니티 차원의 관심과 성원을 당부했다. 박낙희 기자미국 엔터분야 국제 무역정책 데비 손 변호사 새미 리 메리 손 미국체조협회 창간특집

2023.09.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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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미 정 류 LA카운티 법원 판사, 가주 첫 한인 여성 판사…"2·3세 법조인 기대"

태미 정 류 판사는 ‘가주 첫 한인 여성 판사’로서 한인 여성 법조인 리더 중 한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류 판사는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회장(1994년), LA아태계미국인변호사협회 창립 멤버, 한인가정상담소, 한미연합회, 한인민주당협회 등의 단체와 연계하여 LA지역 한인 커뮤니티에 봉사해 왔다.   1999년부터 가주 검찰청 최초의 한인 커뮤니티 연락관으로 활동하던 류 판사는 2002년 LA카운티 수피리어 법원 판사로 임명되며 가주 첫 한인 여성 판사이자 4번째 한인 판사가 됐다. 현재 LA카운티 캄튼 수피리어 법원서 근무하고 있다.   류 판사는 한국 서울서 태어나 10세때인 1970년 현대건설 괌 지사를 맡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이주하면서 타국 생활을 시작했다. 보다 나은 교육 기회를 찾아주려는 부모님 덕분에 5년 후 북가주 베이지역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가고 싶었던 유일한 학교인 UC버클리만 지원했다는 류 판사는 입학 후 의사나 바바라 월터스와 같은 언론인이 되는 것이 어떻냐는 아버지의 권유에 과학과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주저했다고 한다.   류 판사는 대학시절 지역 비영리단체의 아시안 변호사들이 가르치는 ‘아시아계 미국인과 법’이란 수업을 듣게 되면서 법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수업을 통해 아시안 등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불공평한 처사 등에 대해 알게 된 류 판사는 이후 아시안법률코커스(ALC)에서 인턴을 하며 법조계에 입문하기로 결정했다.   류 판사는 ALC의 변호사들이 진행한 2차 세계대전 중 억류된 일본계 미국인들을 위한 배상금 확보 소송을 도우면서 "변호사가 실질적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류 판사는 “정부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도록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법률이 마련돼 있고 법원이 정부로부터 독립됐기 때문이라 생각해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수업을 가르치던 변호사의 격려로 로스쿨에 지원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1984년 8월 UCLA 로스쿨 진학 후 LA서 활동을 시작한 류 판사는 한미연합회(KAC) 등 단체에 가입하고 한인변호사협회 법대생 회원으로 참가하는 등 사회적으로 더 많은 일에 관여하게 됐다.   1987년 졸업 후 이듬해 가주검찰청에 들어가 검사 생활을 시작한 류 판사는 2000년 보건, 교육, 복지 부서를 감독하는 차장검사로 승진 후 2002년 LA카운티 수피리어 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류 판사는 1999년 가주 등 36개 주가 필립모리스 등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2080억 달러의 배상금 지급 소송에서 가주 대표 검사로 나서 승소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다.     류 판사는 1992년 LA폭동을 계기로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력 신장에 대한 관심과 공공서비스에 참여하는 판사를 목표로 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류 판사는 “LA폭동으로 무력감을 느낀 한인들은 유권자로서의 영향력을 가져야 하는 상황을 깨닫게 됐고 이후로 한인 커뮤니티가 크게 활성화됐다고 생각한다. 판사직에 지원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커뮤니티에 일할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류 판사는 지난해 LA총영사관이 주최한 차세대 리더십 세미나에 패널로 참가하는 등 차세대 육성에도 관심이 많다.   류 판사는 “제가 여성이고 소수계라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민자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다. 소수계가 진출하기 쉽지 않지만, 법조계에 더 많은 2세, 3세 변호사가 배출되기를 바란다”며 기대감을 피력했다. 박낙희 기자판사 la카운티 한인 판사 법원 판사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회장 태미 정 류 태미 류 여성 판사 여성 검사 법조인 창간특집

2023.09.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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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위해 이민 온 여성들 교육계 리더로 우뚝

  한인 여성 이민자들의 진출이 가장 활발하고 성공적인 직업군은 교육 분야다.     초기에 이중언어 교사에서 출발한 이들은 수년 뒤 교감과 교장으로 승진해 학교를 리드하고 있으며, 일부는 지역 교육구의 교육감과 교육위원으로 진출해 로컬 교육 정책을 주도한다.   한인 여성 교육자들이 대거 배출되기 시작한 건 70년대 초반이다. 당시 공립학교에 이중언어 교육을 의무적으로 도입하게 한 역사적인 판결이 내려진 직후다. 바로 유명한 라우 대 니콜스(Lau vs. Nichols) 케이스로, 시작은 샌프란시스코였다.     1974년 중국계 학부모 라우 부부는 중국어를 하는 자녀가 영어로만 교육을 받도록 강요받아 동등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샌프란시스코 교육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간 끝에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한 언어로 가르치는 것은 적절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학교는 언어 장벽을 없애기 위해 이중언어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판결을 끌어냈다. 이후 연방 법무부와 교육부는 공립학교에 이중언어 수업을 운영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전 3가 초등학교 교장이자 현재 교육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는 수지 오 박사는 "1974년 판결이 내려진 후 학교마다 한국 문화와 언어를 고려해 가르칠 수 있는 한인 이중언어 교사를 대거 채용했다"며 "초등학교에는 이중언어 교사로, 중고등학교에는 주로 수학교사로 뽑혔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인 교사들은 수전 민, 빌 천 주니어, 엘리자베스 권, 엘리자베스 백, 수지 오 박사가 꼽힌다.     수잔 민씨는 고 민병수 변호사의 여동생으로 몬테벨로 교육구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다 은퇴했다. 고 민 변호사 역시 70년대 웨스트코비나에 있는 샌호세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가르친 바 있다.   엘리자베스 권씨는 LA한인타운에 있는 베렌도 중학교에서 이민자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ESL 교사로 근무했으며, 엘리자베스 백씨는 데이턴 하이츠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오 박사는 1975년 올림픽과 림파우에 있는 LA고등학교에서 ESL 교사로 채용됐으나 이후 호바트와 윌튼플레이스 초교로 옮겼다가 1993년 3가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빌 천 주니어씨의 경우 한국계 미국인 3세로, 1979년에 패서디나 통합교육구 최초로 한국계 교장으로 임명돼 근무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오 박사는 "한인 교육자들의 파이오니아로 꼽히는 메리 손 여사와 1976년 한인교육자연맹(Korean American Educators Alliance)를 설립했다"며 "당시 목표는 한인 교사들의 친목 도모도 있지만, 교육계 진출을 돕고 행정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에 90년대부터는 LA한인타운과 인근의 초등학교에 한인 교장들이 조금씩 배출됐다. 3가 초교의 오 박사 외에 코먼웰스 초교에 박영애 교장, 윌턴플레이스 초교에 김정혜 교장이 부임했다. LA통합교육구(LauSD)의 대표적인 매그닛 스쿨 LACES를 맡은 마가렛 김 교장의 경우 다른 학교로 자리를 옮겼을 때 학부모들이 아쉬워하기도 했다. 가디나 교육구에도 에스더 김 교장이 자리를 잡았다.   2000년대부터는 1.5세~2세 교육자들이 본격적으로 행정직으로 진출했다.   무엇보다 이들 모두 영어와 한국어 구사를 할 수 있는 1.5세와 2세인 데다 실력과 경험을 갖춰 한인 학부모들뿐만 아니라 타인종들에게도 인정받았다.     한인타운을 벗어난 다른 교육구에서도 한인 교장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대표적인 교장으로 하시엔다 교육구 산하 웨지워스 초등학교의 엘렌 박 교장, 하시엔다-라푸엔테 교육구의 글렌 윌슨 고교의 엘레나 폴 교장, LA한인타운토팽가 초등학교의 변지애 교장이다.     변 교장의 경우 2006년과 2013년 LA한인타운에 신설된 초등학교에 한인 독립운동가인 '찰스 H 김'과 한인 2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박사'의 이름을 명명할 수 있도록 뒤에서 활약했다. 또 2020년 한인타운을 관할하는 LAUSD 코리아타운/미드시티 지역 교육구 책임자로 부임해 타운 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한인 교장과 교감을 대거 발탁했다.   당시 임명된 한인 교장과 교감들은 호바트초등학교 캐시 윤(한국명 강옥) 교장, 앰배서더글로벌초등학교(ASGE) 카탈리나 황(한국명 윤정) 교장, 베렌도 중학교 앤소니 염(한국명 승환) 교장이다. 또 LA초등학교, 찰스김초등학교, 코헹가초등학교, 앰배서더오브글로벌에듀케이션초등학교(K~5학년), UCLA 커뮤니티스쿨(K-12학년), LA하이스쿨오브더아츠 고등학교(9~12학년) 등에 한인 교감을 배치해 학생들의 실력을 끌어올렸다.   미국에서 교육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밀켄(Milken) 교육자상'도 한인 교육자들이 다수 수상했다. 밀켄 교육자상은 비영리재단인 '밀켄 패밀리 재단'이 1985년부터 매년 미 전역의 학교와 교육구가 추천한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엄격한 심사를 진행, 교사 100여명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상금도 2만5000달러에 달하는데다 수상 당일까지 비밀을 지켜 수상자를 놀라게 하는 전통으로도 유명하다.     2002년에 처음으로 우들랜드힐스 인근에 있는 웰비웨이 초등학교의 한인 2세 교사였던 제니퍼 유씨가 받았다. 유씨는 이후 재직하던 웰비웨이 초등학교 교장으로 승진했으며, 현재는 LAUSD의 지역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2019년에는 오렌지카운티 미션비에호에 있는 캐피스트라노 밸리 고등학교 수학 교사인 한인 2세 주미경(미국명 캔디스 해링턴)씨가 받았으며, 올해 2월에는 하와이 다니엘K. 이노우에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에스더 권 교감이 수상했다.   2023년 3월 현재 LA한인타운과 남가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인 교장만 30여명, 교감까지 포함하면 50명이 넘는다. 교사와 코디네이터까지 합치면 150여명에 달한다. 이밖에 교육구 본부에서 장학관이나 행정관으로 근무하는 한인들도 10여명에 달하는 등 한인 교육자들의 네트워크는 계속 뻗어나가고 있다.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창간특집 교육자 초등학교 교장 샌프란시스코 교육구 이중언어 교육

2023.09.21.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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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9주년] 이민 120주년 한인 여성 리더들-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 한인 여성 이민

  이민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찾고자 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한 부분에는 '여성 이민자'가 있다.    사진 속 여성들은 신랑의 얼굴이 담긴 한장의 사진만 들고 낯선 미국 땅을 밟은 '사진 신부', 한인 여성 이민자들이다. 이들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미래를 향해 단단한 발걸음을 내디뎠을 것이다.   이들의 용기와 도전은 1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갖춘 2~3세 한인 여성들을 배출하는 발판이 됐다.   중앙일보는 창간 49주년을 맞아 그동안 미주 한인 이민역사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초창기 한인 여성 이민자들의 이야기와 활동을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제작했다.   우리 어머니이자 할머니였던 한인 여성 이민자의 이야기는 차세대 한인 여성 리더들에게 다문화 사회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며 함께 사는 방법과 새로운 도전을 향한 가르침을 전해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   목 차   2면    정치 I 한인 첫 여성 정치인 미셸 박 스틸 연방하원의원 3면    정치 II 보좌관에서 워싱턴DC에 진출한 영 김 연방하원의원 4면    이철수 구명운동 앞장선 커뮤니티 리더 그레이스 김         KYCC 전신 KYC 공동 설립자 제인 김 6면   한인 커뮤니티 초석 세운 소니아 석        남가주 한국학교 설립 주역 백인명    8면   한인 최초의 미국 공립학교 교육자 메리 손        LA한인회 첫 여성 이사장 이화목 12면  한인 은행가 주역 여성 행장들 15면  교육계 리더 한인 교장, 교감들 17면  독립운동에 앞장선 한인 여성들 I 19면  독립운동에 앞장선 한인 여성들 II 20면  가주 첫 여성 판사 태미정 류 22면  할리우드의 한인 여성 파워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창간특집 전문 한인 여성 한인 커뮤니티 아시안 여성

2023.09.2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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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첫 업소록, 50년전 우리를 만나다

여기 오래된 책 한 권이 있다. UC리버사이드 도서관에서 입수한 ‘한인록’이다. 반세기 전인 1972년 발간됐다. 최초의 한인 업소록(옐로 페이지)으로 인명별 전화번호부(화이트 페이지)까지 합본 인쇄됐다. 출간사에 따르면 ‘나성지역 교민 수가 4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난해 센서스 통계에서 LA와 OC의 한인 인구가 혼혈을 포함해 34만명을 넘고 가주 전체는 55만명, 전국적으로는 196만명에 이르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현재 업소록의 시조 격인 당시 한인록에는 이민 선배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투명 돼 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업소록은 발전을 거듭해 본지가 펴낸 2022년 ‘중앙일보 업소록’에 오른 한인 업소는 2만4500개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역사서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한인록에서 출발한 업소록은 매년 전수조사를 통해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한인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중앙일보는 1974년 오늘(9월 22일) 창간한 뒤 한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한인 여론을 선도했고, 한인들에게 양질의 광고 기회를 제공하며 동반 성장했다. 특히 업소록은 한인 비즈니스와 한인 고객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어느 곳을 가든지 항상 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한인들의 손길을 기다리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본분을 다해왔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삶의 터전을 지키고 결실을 이뤄낸 한 사람 한 사람 한인들의 뚝심이 이런 든든한 파트너십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미주 한인사회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중앙일보는 자만하지 않고 항상 독자들의 직언·직설을 새겨들으며 한인들이 원하는 뉴스를, 한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빠르게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는 가운데 업소록도 2010년 첫 모바일 앱을 선보인 후 누적 기준 20만 다운로드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며 전국적으로 6만2000개 이상의 업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한인 언론사 중 유일하게 토요일도 종이 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며 웹사이트(koreadaily.com), 모바일 앱과 유튜브 채널(미주중앙일보)을 운영한다. 특히 MZ세대 문화소통 채널로서 유튜브·인스타그램·틱톡(@katchup_official)을 통해 차세대까지 품겠다는 비전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창간 48주년을 맞은 중앙일보는 한인들과 긴 세월 함께 해온 업소록을 통해 한인사회의 발전상을 재조명한다. 1972년 한인록을 시작으로 25년 후인 1997년의 중앙일보 업소록과 다시 25년을 건너뛴 올해 업소록까지 한인들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있는 소중한 자료와 업주들의 이야기, 독자들이 느낀 감회까지를 다채롭게 담았다. 관련기사 315페이지에 담은 50년 전 한인 역사 LA한인회 역사…반세기 세월 넘어 한인사회 대표 단체로 한인 업종 변화…식당 다양해지고 전문직은 더욱 세분화 독자 인터뷰…"읽을거리 없다는 말 듣지 않게 해달라" “업소 장수 비결은 고객서비스와 신용” “중앙일보 광고와 25년 영업 함께 했죠” “가족은 나의 힘…전국 최고 딜러로 우뚝 서겠다” “3대째 가업 잇는 자부심으로 진료합니다” 타운 경제의 산 역사, 디지털로 거듭난다 류정일 기자창간특집

2022.09.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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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한인회 역사…반세기 세월 넘어 한인사회 대표 단체로

LA한인회는 누가 뭐래도 한인사회 대표기관이다.   1대 회장단부터 현 35대 회장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한인 인사가 몸담고 일하며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한인사회에서 가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단체로도 알려졌다. 이는 그만큼 한인회가 한인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중요하고 크기 때문이다. 한인회 공식 홈페이지(kafla.org)에 따르면 한인회는 주류사회와 한인사회 연결, 한인 권리와 공익 보호, 이민자 지원서비스, 분쟁 해결 및 중재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에 나선다. 이 밖에 소비자 관련 문제 상담, 통역 및 서류작성 지원,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 정보제공 및 확인, 고용추천, 법률 및 사회복지 제도 상담, 세미나 및 워크샵, 사회복지 신청 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느새 한인회는 60주년을 맞이했다. 한인회의 역사를 돌아본다.     1960년대: 유학생 중심으로 태동해 한인센터와 통합   1970년대: 건물 구입하고 주류사회와 본격 교류 시작 1980년대: 회장선거 문제 등으로 내분 겪으며 갈등 심화 1990년대: 한인사회와 협력해 동포 특례법 제정에 앞장 2000년대: 한때 협회 갈리고 29~35대 회장 무투표 당선 2010년~: 진정한 봉사기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총력     ▶1965년 태동 한인회는 원래 유학생 출신이 주축이었다. 1965년 5월 1일 결성한 ‘남가주 한인회’로 출범했다. 당시 LA 한인 인구는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남가주 한인회 창립멤버는 한국에서 유학 와 1960년대 초반 UCLA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조용삼씨, 육사 교관 생활을 접고 1956년 텍사스 주립대로 유학 왔던 이경동씨, 역시 유학생 출신의 김하태 목사, 애국부인회 회장을 지낸 이화목씨, 한인타운에서 주유소를 운영했던 송영창씨, 송씨 처남으로 의사였던 김창하씨, 그로서리 가게를 운영했던 유재신씨 등이 있었다.   남가주 한인회 설립 목적은 이보다 3년 먼저 창립한 ‘남가주 한인센터’(이사장 김호·회장 송철, 1962년 6월 비영리법인 등록) 지원 성격이 강했다. 한인센터는 1963년 2525 버논 애비뉴에 7만 달러를 주고 매입한 자체 건물이 있었으나 재정난으로 융자금 상환이 어려워 1967년 6월에 매각했다. 여기서 남은 4만 달러는 ‘건물 매입 때에만 사용한다’는 조건 속에 센터기금 관리위원회로 넘겨진 뒤 나중 현재의 한인회관 매입 때 종잣돈이 됐다. 회관 매각은 한인센터와 한인회 통합 계기가 됐다. 1968년 1월 남가주 한인회와 한인센터는 ‘재미한인거류민회’로 통합했다. 재미한인거류민회는 1972년 남가주한인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1982년부터 LA한인회가 공식명칭이 됐다.     ▶1970년대 초반 정착기 1960년대 후반 한인사회에는 가발 업이 붐이었다. 또 국적 항공사의 LA 취항과 함께 본격적인 한인 이민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971년 4대 회장 선거에서 소니아 석 여사가 박준환 후보를 누르고 선출돼 최초의 여성 한인회장이 됐다. ‘여장부’로 알려진 석 회장은 부동산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이사진과의 불협화음으로 임기 3개월을 앞두고 자진해서 사퇴해 5인 대책위가 잔여 임기를 채웠다. 1972년 5대 회장 조지 최씨는 한인 부동산 업계 대부였다. 훗날 한인회관 건물 매입에도 깊이 관여했다. 최씨의 뒤를 이은 6대 회장 김종식씨는 한국화약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회장직을 마친 뒤 귀국해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한인회장 출신 정치인 1호다.   ▶1970년대 중반 도약기 1974년 11월 16일과 17일 양일간에 걸쳐 실시된 7대 한인회장 선거에 양회직씨가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양 회장은 취임 직후 한인회관 매입에 박차를 가해 1975년 10월 8일 30만 달러 매입 절차를 마무리했다. 11월 22일에 역사적인 개관식을 가졌다. 현 한인회관 건물 구매를 둘러싼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1년 4대 회장 소니아 석 여사가 1975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각하, 한인회관 마련을 위한 돈 좀 주세요”라고 요청해 지원을 받아냈다. 석 여사 배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15만 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이후 석 여사를 위원장으로 한인회관건립위원회가 구성돼 건물 물색에 나섰다. 당시 위원회 구성원 중 조지 최 전 회장은 웨스턴가의 현재 건물을, 석 여사는 윌셔가 건물, 상공회의소 측은 7가와 알바라도 길 건물을 원하는 등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양회직 회장은 당시 LA총영사였던 박영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박 총영사는 석 여사 등을 설득해 웨스턴가 건물 매입을 결정했다. 이후 30만 달러에 매입이 완료됐다.   ▶주류사회와 교류   1975년은 LA한인회가 최초로 LA 시장실과 공식 채널을 만든 해다. 주류사회와 첫 교류였다. 당시 양회직 회장은 LA 최초 흑인 시장 톰 브래들리와 만난 자리에서 LA에 한인이 약 8만명 거주한다며 시 차원의 관심을 촉구했다.   ▶1980~90년대 격동기 1980년대는 한국 민주화 운동 열기와 맞물려 한인회도 변화와 갈등의 시기를 겪었다. 12대 이민휘 회장은 친 박정희파로 분류돼 야당 지지자들과 대립했다. 또 12~15대 한인회는 잦은 내부 갈등과 부정선거 여파로 사실상 업무중단 사태에 빠졌다. 1984년 LA올림픽 때 한인사회가 한국 대표선수단을 지원하며 한인회도 힘을 보태 정상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1987년 18대 회장 선거 당시 투표소에 경찰이 출동하는 등 갈등은 점차 심화했다.   이때부터 ‘LA한인회는 논란단체’라는 딱지가 붙었다. 툭하면 권력싸움을 하는 분열단체 이미지가 부각됐다. 한인사회 대표 단체장이 되기 위한 경쟁이 극에 달하면서 선거철마다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1992년 폭동 당시에는 특별히 한 게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20대 이종원 회장과 21대 김영태 회장은 21대 회장직을 놓고 소송전을 벌였다.   21대 김영태와 22대 장성길 회장은 퇴임 후 한국 국회의원 도전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1998년 24대 서영석 회장은 한인사회와 합심해 한국 국회에서 ‘재외동포 특례법’이 제정되도록 앞장섰다.   ▶21세기 한인회 2000년대 한인회는 회장 선출을 둘러싼 분쟁의 연속이었다. 2002년 26대 회장 선거는 출마 후보 간 자격 논쟁이 있었다. 28대 회장 선거 이후 한인회선거관리위원회는 매번 공정성 시비에 휘말렸다.   2010년 30대 회장 선거 때는 결과에 불복한 박요한씨가 다른 한인회를 출범하는 유례없는 해프닝을 벌였다. 결국 법원 판결에 따라 스칼렛 엄 회장이 이끌던 한인회가 계속 인정됐다. 29~35대 한인회장은 모두 무투표 당선돼 논란이 됐다.   ▶한인회의 미래 제임스 안 35대 회장은 최초의 풀타임 한인회장 기록을 세웠다. 봉사직이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한인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봉사개념을 넘어 책임감을 갖고 SBA, EDD 등 전문적인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기 위해 이사회에서 급여 개념 회장(CEO) 시스템을 정착했다.  안 회장은 “영어가 불편한 한인 분들은 무조건 한인회에서 도움받아야 한다. 언어 문제로 정부 재정 지원을 놓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팬데믹 기간에도 한인회를 통해 재정 지원을 받은 분이 무수히 많았다. 한인회는 앞으로도 계속 주류사회는 물론 다른 소수계 커뮤니티와도 연대를 강화해 중요한 정보를 상호교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관련기사 315페이지에 담은 50년 전 한인 역사 LA한인회 역사…반세기 세월 넘어 한인사회 대표 단체로 한인 업종 변화…식당 다양해지고 전문직은 더욱 세분화 독자 인터뷰…"읽을거리 없다는 말 듣지 않게 해달라" “업소 장수 비결은 고객서비스와 신용” “중앙일보 광고와 25년 영업 함께 했죠” “가족은 나의 힘…전국 최고 딜러로 우뚝 서겠다” “3대째 가업 잇는 자부심으로 진료합니다” 타운 경제의 산 역사, 디지털로 거듭난다 1972년 첫 업소록, 50년전 우리를 만나다 원용석 기자창간특집 한인회 한인회관 매입 약속 la한인회 한인회 역사

2022.09.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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