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연휴를 맞아 계획했던 산악회 캠핑이 산불로 인해 갑작스레 취소되었다. 애초에 캠프장에서 하기로 했던 써니 언니의 칠순 생일파티가 '스위처 폴스(Switzer Falls)' 토요 산행 후로 변경되었다. 산행 후 생일파티라기에 산악회 가입이 얼마 안 된 나는 당연히 근처 식당에서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단체 카톡방에 공지가 뜨자마자 분위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누구는 떡을 맞춰온다고 하고, 열무 물김치며 각종 나물류, 과일과 음료수, 즉석 부침개까지 준비하겠다는 댓글이 우수수 달렸다. 유튜브를 보고 직접 만들었다는 한 남성회원의 돼지갈비찜과 백김치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평소 조용하던 분이 손수 만든 음식이라는 점에서 감동이 더 컸다. 주인공이 마련한 LA갈비와 정성 어린 음식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산행 후의 조촐할 줄 알았던 생일 잔치는 어느 뷔페식당 부럽지 않은 '산상 연회'로 바뀌었다. 한국인의 정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특별했던 건 생일 떡이었다. 산행 중 주운 도토리를 일일이 까서 곱게 빻아 쌀가루와 섞어 만든 건강 떡이다. 당뇨가 있는 친구를 위해 준비한 맞춤형 선물이었기에 감동이 더했다. 떡 위에 일곱 개의 촛불이 켜지고,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축하금과 손 글씨 카드가 전해지자, 주인공의 눈가가 붉어졌다. '열심히 산행해서 80세 생일에도 고기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라는 농담 섞인 말에 모두가 웃음과 박수로 화답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 명절이나 기념일은 더 쓸쓸하게 다가온다. 가족도 오랜 친구도 가까이 없기에 특별한 날일수록 마음 한 켠이 허전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공통의 취미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 걷고,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는 순간들 덕분에 외로움은 한층 가벼워진다. 그날 산속에서 열린 특별한 생일 잔치는 단지 한 사람의 칠순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함께 걷고, 땀을 흘리고, 음식을 나누며 쌓아가는 연대감이 외로운 이민자의 삶을 어떻게 지탱해 주는 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단순한 취미생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삶의 활력소 역할을 하며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날의 생일파티는 장소도 형식도 메뉴도 모두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따뜻하고 더욱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진짜 잔치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곁에서 함께 걷고, 웃고, 나누는 삶. 나 또한 언젠가 칠순을 맞는 날, 오늘처럼 따뜻하고 의미 있는 이런 생일 잔치를 하고 싶다.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산속 칠순 칠순 잔치 칠순 생일파티 생일 잔치
2025.09.23. 18:17
동갑내기 아저씨의 칠순 잔치에 다녀왔다. 칠순 나이를 어떻게 계산하는가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는데, 환갑은 만 나이 60세에 하는 것이고, 칠순이나 팔순은 한국식 나이 70과 80이라고 한다.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되며 칠순을 만 나이로 따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내가 기억하는 큰 잔치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환갑잔치다. 외할아버지 때는 이틀 전부터 전을 부치고 음식을 장만해 크게 상을 차려 잔을 올렸다. 자식들이 잔을 올릴 때 중년의 여인이 곁에서 소리를 했고, 하루 종일 손님들이 오갔다. 어머니의 환갑잔치는 타운의 중식당에서 했는데, 꽤 많은 손님이 왔었다. 그때도 상을 차려 잔을 올렸는데, 할아버지 때와는 달리 상에 오른 한과가 장식용이었다. 나와 형제들이 어머님 은혜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드렸고, 노래방 기계를 틀어 몇몇 하객이 노래를 불렀다. 아저씨는 칠순 잔치를 하겠다고 진작부터 공언했었다. 칠십 평생 살아오며 자신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과 함께 45년 이민의 삶을 돌아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잔치다. 파티 장소에 가니 곱게 차려입은 아저씨와 숙모, 아들과 딸 가족이 우리를 반긴다. 친인척, 동창, 교우, 자녀의 친구 등 100여 명의 하객이 모였는데, 멀리 버지니아와 한국에서 온 손님들도 있었다. 아저씨는 45년 전 미국에 와, 불법체류자로 힘든 시절을 보내며 자수성가한 아메리칸드림의 산 증인이다.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6촌 동생, 내게는 7촌 당숙이다. 하지만 친척이 귀한 실향민들이라 우리에게는 가까운 친척이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내게는 형과 같은 존재다. 아저씨의 등에 업혀 난생처음 동대문 야구장에 가서 고교야구를 보았다. 낙산 해수욕장에 가서 바다를 본 것도 그의 덕이다. 그의 등에 업혀 바다에 들어갔고, 모래사장에 앉아 별을 보며 그가 치는 기타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2년 전에 칠순이 지났다는 선배들이 나와 오중창을 부르고, 손자 손녀들이 준비한 영상인사가 돌아가고, 한국에서 온 손님의 노래와 클라리넷 연주, 그리고 이어진 노래방으로 분위기는 고조됐다. 참석한 하객들이 잘 먹고 즐겁게 놀아주기를 바라던 아저씨의 배려 덕에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돈과 명예는 살기 위한 수단일 뿐, 삶이란 결국 사람들과의 인연,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엮이며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한평생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여 지나온 삶을 추억하고 감사를 나누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티의 즐거운 여흥보다 더 좋았던 것은 오랜만에 만난 친인척들, 서로를 잘 모르던 2, 3세대들이 서로 친해지는 모습이었다. 잔치를 준비한 아저씨가 바란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후손들이 서로를 알고 친하게 지내는 모습…. 그동안 칠순이나 팔순 잔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세월 지나 먹은 나이 뭐 대단하다고 잔치까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잔치를 보며 다소 생각이 바뀌었다. 심적, 재정적으로 여유가 된다면, 이런 잔치도 할만하다. 아저씨, 멋진 잔치였습니다. 10년 후 팔순 잔치가 기대됩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식구들이 모이겠지요?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이 아침에 아저씨 칠순 칠순 잔치 칠순 나이 동갑내기 아저씨
2025.01.13. 18:49
육 학년 칠 반에 입학했다. 가슴에 손수건을 단 아이처럼 설레며 컴퓨터를 열었다. 이국땅에서 50여 년이 지나서야 단발머리 문학소녀의 꿈을 찾았다. 뒤늦게 시작한 탓에 은퇴 후 늦깎이 학생이 되었다.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에 대한 초석을 닦았다. 문학사와 시, 수필, 아동문학, 소설, 희곡, 논술과 독서지도까지 섭렵하며 새벽잠을 깨웠다. 많은 책을 읽고 감상 리포트를 쓰며 몰두할 수 있어 좋았다. 내가 쓴 시, 동화, 소설을 학과 게시판에 올리면 학우들이 읽고 자신의 소견이나 평을 써 올렸다. 그 후 실시간 줌으로 교수님과 함께 합평 시간을 가졌다. 합평을 들은 후 교정하고 퇴고한 글을 다시 제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을는지. 교양과목을 수강하며 지식의 깊이를 더했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묵은 뇌를 새롭게 하여(renew) 한결 젊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태평양을 건너 온라인 수업을 통해 한국어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장소와 시차를 극복하며 공부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졸업이란 학생이 학교 규정에 따른 소정의 교과 과정을 마친다는 의미다. 나 또한 졸업이라는 과정을 통과했다.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서울 중학교로 진학한다는 기대로 부풀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쏟아지는 함박눈이 내 앞길을 축복해주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선 대학의 좁은 문을 통과해 넓은 학문의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열망으로 차 있었다. 교육대학 문을 나설 땐 긴장했다. 교육 현장에 나가서 아이들을 지도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으리라.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먼저 유아교육(Early Child Development) 과정을 공부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커뮤니티 2세 교육의 뜻을 펼치고자 어린이학교를 설립해 30년간 운영했다. 해마다 졸업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그들의 성장과 활동을 담은 앨범을 제작하고 트로피를 수여하며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축하객 없는 졸업식을 해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어 식장을 정성껏 마련했다. 졸업생 한 사람씩 순서를 진행하며 학교 문을 내보내야 했다. 마스크 속에서 안아줄 수도 없는 서운함을 남긴 채. 그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평생 해오던 일을 내려놓으며 은퇴했다. 내 나이 칠십이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학점을 이수함으로 졸업이라는 문에 이르렀다. 돋보기 속 아픈 눈을 비비며 책장을 넘겼다. 새벽 3시에 열리는 실시간 합평 세미나를 위해 밤잠을 설치는 어려움을 겪었다. 형설의 공을 쌓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겠지. ‘해냈구나! 잘했다!’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길 원했다. 졸업장에 금테를 두르는 걸로 대신할까?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나를 위한 졸업 축하 카드를 만들어 보았다. 졸업을 한 단계에서 할 몫을 다 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남기고 싶다. 남은 내 인생에 또 다른 출발로 다가온다. 이제 배운 이론과 실기를 좋은 글쓰기에 적용할 터.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내가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이희숙 / 수필가이 아침에 졸업장 칠순 고등학교 졸업식 중학교 졸업식 서울 중학교로
2024.02.22. 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