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빅토리아, 희망과 추모가 만나는 도시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주도 빅토리아는 밴쿠버에서 페리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항해하면 닿는 섬 도시다. 남한 면적의 3분의 1 크기를 가진 밴쿠버 섬에 자리한 이곳은 행정 중심지를 넘어 캐나다 서부의 정신적 뿌리를 보여주는 곳이다. 본토가 아닌 섬에 자리 잡은 항구 도시는 고풍스러운 주 의사당과 유럽풍 건물, 그리고 작은 항구에 정박한 수백 척의 요트로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곳은 화려한 건축물이나 정원이 아니다. 바로 캐나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시작점, ‘마일(Mile) 0’ 기념비다. 트랜스-캐나다 하이웨이(Trans-Canada Highway)는 빅토리아에서 출발해 대서양 연안 뉴펀들랜드 세인트존스까지 이어진다. 총 길이는 약 4860마일에 이르며 캐나다 10개 주를 가로지른다. 밴쿠버 섬과 뉴펀들랜드 구간은 페리를 통해 본토와 연결된다. Mile 0에는 단순한 도로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옆에는 의족을 단 채 달리는 청년의 동상이 서 있다. 캐나다 국민의 영원한 영웅, 테리 폭스다. 테리 폭스는 18세였던 1977년 오른쪽 무릎에 뼈암(골육종) 진단을 받았다. 의사의 권고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지만 그는 절망 대신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의족을 착용한 그는 육상과 농구, 수영을 포기하지 않았고 병원에서 다른 어린 암 환자들의 고통을 보며 달리기를 통해 암 연구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희망의 마라톤’이다. 1980년 그는 캐나다 동부 끝 뉴펀들랜드에서 출발해 매일 26마일을 달리며 대륙을 횡단했다. 그의 불굴의 도전은 전국민의 마음에 불씨를 지폈다. 그러나 병마는 가차 없었다. 3300마일을 달린 끝에 암이 폐까지 번지며 여정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 불과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생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렬하게 살아났다. 테리 폭스의 이름은 지금도 전 세계 암 환자와 가족들에게 희망의 불꽃이 되고 있으며, 매년 열리는 ‘테리 폭스 런’은 수많은 발걸음을 모아 암 연구를 후원한다. 빅토리아의 ‘Mile 0’ 동상 앞에 서면 누구든 그의 불굴의 의지가 여전히 이 땅을 달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단순한 도로의 출발점이 아니라 희망의 출발점이다. 기념비 옆에는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푸른 바다 너머로 미국 워싱턴주의 해안선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타코마 지역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두 나라의 풍경은 바다가 단절이 아니라 연결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이 길목에서 또 하나의 기념비를 만난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청사 앞에 세워진 전쟁 전사자 위령비다. 세계 평화를 위해 젊음을 바친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비석에는 ‘1950-1953 KOREA’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는 그 문구 앞에 서면 테리 폭스의 동상과 나란히 놓인 듯한 울림이 다가온다. 누군가는 조국을 위해, 누군가는 병마에 맞서며, 또 누군가는 타국의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 위령비와 동상은 서로 다른 길을 걸은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듯하다. 고개를 돌리면 다시 빅토리아 항구의 고요한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하얀 요트들이 잔잔한 파도 위에 떠 있고, 저녁 햇살에 물든 바다는 금빛 물결을 일렁인다. 이곳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희망과 추모, 그리고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 함께 숨 쉬는 장소임을 깨닫게 한다. 밤이 되면 빅토리아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즈음 주청사 건물 외벽에 3000여 개 전구가 일제히 불을 밝힌다. 고풍스러운 건물을 감싼 은은한 불빛은 어둠 속에서도 세상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항구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다 위에 정박한 수백 척의 요트가 밤의 무대를 장식한다. 거리에는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등장해 음악과 춤, 환호가 뒤섞인 또 다른 무대를 연출한다. 낮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생동감이 항구를 가득 메운다. 영국풍 건축물과 정원, 항구의 물결, 그리고 반짝이는 불빛이 어우러진 빅토리아의 밤은 감각적인 경험의 장이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도시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열정이 전해진다. 이곳의 밤은 여행자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여운으로 자리한다. 내일이면 다시 수퍼 페리를 타고 밴쿠버로 돌아가 육로로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빅토리아에서의 하루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희망과 추모가 만나는 자리에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시간으로 남는다. 그것이 빅토리아가 여행자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정호영 삼호관광 가이드캐나다 빅토리아 주도 빅토리아 캐나다 대륙 캐나다 하이웨이
2025.09.11.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