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초기, 아이들 학교에서 학부모로 처음 만나 이웃으로 지내며 자녀들을 함께 키우고 수많은 경험을 공유한 친구가 있다. 그녀는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수학 교사였다. 많은 교육적인 충고를 해주고 내가 털어놓는 인생의 고충도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짚어주는 언니 같은 존재였다. 아이들에게 바이올린, 발레, 스케이트를 시킨 것도 그 친구 덕분이었다. 그녀는 공으로 하는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뛰어났다. 탁구대 위의 날카로운 스매시, 골프장의 부드러운 스윙, 운동에 소질 없는 나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은 내게 건강과 활력의 상징이었다. 생활 속 작은 습관부터 병을 예방하는 법까지 건강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10여 년 전 머리숱을 많게 해준다는 말에 동충하초를 오래 복용하다가 간 수치가 올랐다고 언뜻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기에 이번 병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우리는 종종 바닷가 모래밭을 맨발로 걸었다. 맨발 걷기의 효능을 설명하며 아침잠 많은 나를 깨워 데리고 다닌 것도 그녀였다. 간경화로 복수가 찼을 때도 보험을 바꾸며 좋은 간 전문의를 찾았다고 함께 기뻐했기에 나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발병 소식을 듣기 전, 남편과 함께 그녀의 사무실에 들러 먹고 싶다던 추어탕을 함께 먹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그 순간은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의 장면이 되었다. 2주간의 여행에서 돌아와 몇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아 의아해 하던 중, 벨이 울리며 친구의 번호가 떴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의 막내딸이었고, 엄마가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르고, 바다에 뿌렸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들었다.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그녀는 이미 먼 바다로 떠난 뒤였다. 어젯밤, 꿈속에서 그녀를 보았다. 마치 ‘괜찮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친구의 재가 뿌려진 태평양 바다를 바라본다.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 속에 그녀의 숨결이 머물다 사라지는 것 같다. 병마를 이겨내려는 그녀의 마음가짐에 도리어 내가 위로를 받기도 했는데.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내게 삶의 유한함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당신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 이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삶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죽은 사람은 누군가의 마음에 기억되는 한 결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길 바란다. 부디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기를. 최숙희 / 수필가이 아침에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태평양 바다 발병 소식
2025.08.19. 17:28
“로렌 엄마가 돌아가셨대.” 딸아이는 가장 친한 친구 엄마의 죽음을 허망한 목소리로 알려왔다. 이웃에 살던 로렌과 딸은 같은 중학교에 다니면서 친해졌다. 아침에는 우리 집에서 두 아이를 학교까지 태워줬고, 집에 올 때는 로렌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로렌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멀리 이사 갔다. 로렌의 부모가 일하는 마켓이 토팽가이기에 진작에 이사를 하였어야 했는데, 로렌이 대학 갈 때까지 기다렸단다. 대신에 그동안 로렌 부모는 토런스에서 토팽가까지 매일 그 먼 거리를 출퇴근해야 했다. 샌타모니카를 지나 말리부로 이어지는 태평양 연안 도로에서 우들랜드힐스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동네가 토팽가다. 로렌의 부모도 여느 한인 이민자들처럼 토팽가에 있는 마켓에서 성실히 일했다. 그 가게는 일 년 열두 달 문 닫는 날이 없었다. 추수감사절에도, 성탄절에도, 새해 첫날에도 그 마켓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바깥출입을 삼갈 때도 그 가게에만 가면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일한 덕에 집도 장만했고, 로렌도 대학생이 되어 조금 삶의 여유를 누릴 만 하게 되었는데 암이 발견됐다. 수술을 받기에 너무 늦었다고 했다. 병원에 몇 번 들락거리는 사이에 손쓸 틈도 없이 로렌 엄마는 남편과 두 아이를 두고 황망하게 하늘나라로 떠났다. 장례 예배의 집례를 맡았다. 가족들은 장례식장에 그리 많은 사람이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장례를 조촐히 치르길 원했다. 그러면서 혹시 토팽가에서 가게 손님들 몇 명이 올 것 같은데,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장례 예배가 시작되자 예배당은 토팽가에서 온 가게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장례 예배 중간에 혹시 고인과의 기억을 나눌 분이 있으면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사람이 나와 고인과의 추억을 나누었다. 그들은 대부분 로렌 엄마가 일하던 마켓의 손님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로렌 엄마의 미소를 잊을 수 없다고 했고, 자신들을 손님이 아니라 가족으로 대해주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들이 고마웠다. 토팽가에서 장례 예배가 드려지는 로즈힐까지 한 시간 넘게 달려와서 평생 열심히 일만 하다 떠난 한 이민자의 삶을 기억해 주는 그들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들에게 가족을 대신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당신들 때문에 그녀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알게 되어 감사하다고 했다. 로렌 엄마가 일하던 토팽가는 태평양 연안에 살던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의 언어로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토팽가가 샌타모니카 산맥 중간에서 태평양 바다를 마주 보고 있기에 그런 멋진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마흔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로렌 엄마에게 토팽가는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곳은 아니었을까? 아니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자리가 삶과 죽음이 만나는 경계일지도 모른다. 삶은 영원하지 않고, 언제든 죽음으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 경계를 지나는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야 마땅하다. 인생의 가장 큰 신비인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걷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삶과 죽음의 경계인 인생길을 잘 걸어야겠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이 아침에 바다 로렌 엄마 태평양 바다 대부분 로렌
2024.01.31.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