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초 우리 부부는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이 살았다. 하루는 남편이 밖에 버려진 조그마한 흑백 TV를 주워 왔다. 신이 났다. 웬걸, 화면은 나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심할 때마다 화면만 들여다보며 소리는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느 날, 운 좋게도 거의 비슷한 크기의 텔레비전을 또 주워 왔다. 화면에서 비가 쏟아졌지만, 소리는 나왔다. 두 대를 나란히 놓고 비 쏟아지는 화면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봤다. 예기치 않은 돈이 조금 생겼다. 작은 소니 텔레비전을 장만하고 고장 난 것을 버렸다. 새것을 즐기던 중, 채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도둑이 가져갔다. TV를 사서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던 길 건너 남자가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훔쳐갔다고 이웃이 말해줬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해코지를 당할까 봐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마약 중독자로 약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살 돈도 없지만, 다시 산다 해도 또 도둑이 가져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우리는 버린 그 고장난 소리만 나오고, 화면만 나오는 TV를 아쉬워했다. 아이들이 태어났다. 애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TV 없이 살았다. 매년 LA 사시는 시아버지가 보내오는 비행기 티켓으로 연말에는 시집에 갔다. 시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TV에 눈을 박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시아버지가 혀를 차시며 “텔레비전 없이 사는 것이 아이들 교육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도 제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봐야 하지 않겠니. 내가 사주겠다.” “돈으로 주시면 저희가 뉴욕에 돌아가서 살게요.” “아니다. 돈으로 주면 사지 않을 것이 뻔하다. 내가 여기서 사 줄 테니 가져가거라.” 시아버님은 커다란 산요 TV를 사서 비행기에 실어주셨다. LA에서 집에 돌아오니 문은 열려있고 집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도둑이 하도 집안에 훔쳐 갈 것이 없으니까,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마시고 화가 났는지 몇 개 없는 가구를 다 내동댕이쳐 놨다. 새로 장만한 TV를 도둑맞을까 봐 우리 식구 넷은 지키는 데 고군분투했다. 1980년대 범죄율이 치솟던 시절의 동네가 점점 변하면서 도둑님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개를 끌고 나갈 때마다 ‘뭐 쓸만한 물건이 없나?’ 두리번거리는 작은아들의 심리를 잘 아는 강아지가 ‘너 이거 가져갈래?’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멈췄더니 ‘가져가라는’ 메모가 붙은 몸통이 가늘고 스크린이 커다란 TV가 있어서 주워 왔단다. “꽤 괜찮은데. 새것이나 다름없네.” 우리 식구들은 집안에 새로운 물건이 생기면 ‘샀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주웠냐?’고 물어본다. 집 주변에 멀쩡하게 버려진 이케아 가구들을 주워 살기 때문이다. 이수임 화가·맨해튼글마당 텔레비전 이야기 텔레비전 이야기 소니 텔레비전 우리 식구들
2024.05.17. 21:53
우크라이나 그리고 가자(Gaza)지역 멀리서 날아오는 미사일 꽝꽝 터지는 소리 건물이 무너진다 전쟁이기에 군인들이 죽어야 하는데 억울하다 민간인들이 사망한다 다친 자들의 신음소리 시신(屍身)을 보고 살아남은 자들의 오열(嗚咽)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는다 2) 여기 뉴욕 겨울인데도 거실(居室)은 따뜻하다 우크라이나 그리고 가자 사람들은 전기도 없고 물도 없고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데 부엌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면서 나는 저녁을 먹는다 中道 시인·의사글마당 텔레비전 전쟁 소리 건물
2024.03.15. 21:39
장애인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특정한 종류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이 기이한 가정의 뿌리는 장애에 관한 우리의 의식 구조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뉴스 미디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는 ‘장애의 극복’ ‘용감한’ ‘고통을 이겨낸’ ‘역경에 도전하는’ ‘휠체어 신세를 지는’, 혹은 개인적으로 내가 선호하는 용어인 ‘감화적’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장애인에 관해 쓰거나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케이티 엘리스 『장애와 텔레비전 문화』 ‘우영우 신드롬’으로 장애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는 때 맞춤한 책이다. 인용문은 책에서 재인용한, 호주의 장애인 코미디언·칼럼니스트 스텔라 영의 글이다. 세계적 화제를 낳은 TEDx의 명강연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전 당신의 영감거리가 아닙니다’로 알려진 영은 장애가 비장애인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며, 미디어가 장애를 다루는 전형적 방식을 ‘감화 포르노(inspiration porn)’라고 불렀다. 호주 커틴대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장애인이 미디어에 어떻게 그려지는지 ‘재현’의 문제와 장애인의 미디어 ‘접근’ 문제를 두루 짚는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넷플릭스의 화면 해설 서비스는, 2015년 시각장애인 수퍼히어로가 나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데어데블’ 때 시작됐다. 당시 장애인 수퍼히어로를 장애인 관객도 보고 싶다는 온라인 요청이 거셌다. 지금은 비장애인들도 유용하게 쓰는 유튜브의 자동자막 기능은 2006년 농인인 유튜브의 엔지니어에 의해 도입됐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텔레비전 장애 텔레비전 문화 장애인 코미디언 장애인 관객
2022.07.28. 1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