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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비울 줄 아는 지혜, 동의보감의 ‘갱허갱실’ (更虛更實)

동의보감에는 “시도때도 없이 먹지 말라”는 경계의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를 대표하는 개념이 바로 갱허갱실(更虛更實)이다. 비울 때는 비우고, 채울 때는 채우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한 식사 예절이 아니라, 인체를 바라보는 동양의학의 핵심적인 생리관을 담고 있다.   동의보감 내경편에서는 음식이 위에 들어오면 위는 실해지고 장은 허해지며, 배출이 이루어지면 위는 다시 비고 장은 차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비워졌다가 채워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기(氣)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오르내리고, 그 순환이 원활할 때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보았다. 즉, 건강이란 ‘항상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잘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리듬’에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소설과 드라마로 유명한 허준의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한다. 허준은 구안와사(입과 눈이 한쪽으로 비뚤어지는 증상)를 앓고 있는 후궁 공빈의 남동생을 사흘 안에 고치라는 어명을 받았다. 그러나 환자를 살펴본 허준의 눈에는 안면마비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위장의 중병, 즉 반위(反胃)로 보였다. 뿌리는 위에 있다는 판단이었다.   약속된 사흘이 지나도록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허준은 작두 앞에 서게 된다. 그 위기 속에서 허준은 스승 유의태의 몸을 해부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위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한다. 위는 꼬불꼬불한 관처럼 생겼지만 펼치면 길이가 상당하고, 물과 곡식을 저장했다가 다시 배출하는 기관이라는 점, 그리고 하루 동안 쌓였다가 쏟아지는 양까지 언급하며 위가 ‘항상 차 있어야 할 곳’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 장면은 극적인 허구를 포함하고 있지만, 위를 통과 장기로 이해한 당시 의학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동의보감에서는 장부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단면이 꽉 차 있어야 하는 장부로, 간이나 심장처럼 정(精)과 혈이 충실해야 하는 장기다. 다른 하나는 단면이 파이프처럼 비어 있어야 하는 장부로, 위와 장처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통과 장기가 늘 가득 차 있으면 기의 흐름이 막히고, 그 자리에서 병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먹는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입이 심심해서, 혹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동의보감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위를 쉬지 못하게 만드는 습관이다. 위는 채워질 때 일하고, 비워질 때 회복한다. 비움 없는 채움은 결국 기능 저하라는 병으로 이어진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이 ‘무엇을 더 할까’ 고민하지만, 동의보감은 오히려 ‘무엇을 덜 할까’를 묻는다. 덜 먹고, 덜 채우고, 비워질 시간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 갱허갱실의 핵심이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건강의 원칙이다.     동의보감에서 말한 ‘위장의 갱허갱실 리듬’을 직접 조절하는 혈자리로 중완혈(中脘穴)이 있다. 배꼽과 명치의 중앙, 전정중선 상에 위치한 혈로 위장의 기능을 조절하고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중심혈이다. 과식으로 위장이 과도하게 찼을 때는 기를 아래로 내려 소화와 배출을 돕고, 위장이 비어 기가 약할 때는 위를 튼튼하게 받쳐준다. 이는 단순한 침혈을 넘어, 현대적으로는 소화 기능 조절과 장·뇌 신호, 기혈 순환의 균형과도 연결해 볼 수 있다. 여기에 양손과 양발의 합곡(合谷)과 태충(太衝), 즉 사관혈(四關穴)을 함께 쓰면 위장의 갱허갱실 리듬을 전신 차원에서 조절할 수 있다.   「胃者水穀之海虛實更替則氣行而無病」 위는 물과 곡식이 모이는 바다이니, 비어짐과 채워짐이 교대하면 기가 순행하여 병이 없다는 말이다.   한의학의 핵심 사상은 미병치료(未病治療)에 있다. 병이 생긴 뒤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병으로 진행되기 전에 바로잡는 것이다. 갱허갱실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속을 비울 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치료이자 최고의 예방이다.   건강의 기본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마음도 비우고, 속도 비울 때, 비로소 순환이 시작된다. 강병선 / 한의학 박사·강병선 침뜸병원 원장혈자리로 보는 세상만사 동의보감 지혜 지혜 동의보감 소화 기능 통과 장기

2026.02.1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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