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타운 맛따라기] 'LA식 냉면'에 도전한 평양냉면
바야흐로 냉면의 계절, LA한인타운에 ‘평양냉면 대전’이 펼쳐지고 있다. 8가 옛 마포갈매기 자리에 문을 연 ‘서관면옥’과 웨스턴길 옛 옴부그릴 터에 자리 잡은 ‘가빈’. 이 두 신흥 강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통 평양냉면을 전면에 내세우며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 미식가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이들 냉면의 특징은 한마디로 ‘슴슴함’이다. 맑은 고기 육수에 으레 섞던 시원한 동치미 국물의 맛보다, 순도 높은 메밀국수를 삶아낸 면수(麵水)의 구수함이 지배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뽀얀 사골 국물의 설렁탕을 기존 LA 냉면의 표준이라 할 때, 이들 평양냉면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맑은 고기 육수 베이스의 곰탕 국물에 가깝다. 익숙한 새콤달콤함 대신, 육향과 메밀향의 미묘한 조화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사실 LA에 평양냉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역사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가 현 육대장 자리에 있었던 ‘강서면옥’은 전설로 회자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찾아 청와대에 육수를 납품했을 정도라는 서울 본가의 명성과 비법을 그대로 옮겨왔다. 당시 서울 본가의 ‘어머니’는 유학생 아들에게만 육수 비법을 전수했고, 그 탓에 며느리의 친정이 운영하던 올림픽가의 ‘세종회관’조차 감히 평양냉면 메뉴를 내지 못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아들이 한국으로 역이민을 떠나며 식당은 팔렸으되 조리법은 전수되지 않았고, LA 한인들은 그 깊은 맛을 추억 속에 묻어야 했다. 이렇듯 명맥이 끊겼던 정통 평양냉면의 귀환은 기존 LA 냉면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고구마 전분을 섞어 가늘고 질긴 함흥냉면과 달리, 순메밀을 고집하는 평양냉면은 면발이 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끊어져 가위질이 필요 없다. 이북 실향민 출신인 아버지를 따라 첫 번째 먹어봤던 냉면은 함흥냉면이었던듯 하다. “아무리 질겨도 면은 잘라먹는 게 아니다”고 하셔서 먹다 숨이 막힐 뻔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자존심을 버리고 아주 많이 잘라 달라고 한다. 지난 40년간 LA의 냉면 시장은 사실상 ‘LA식 냉면’이라 부를 만한 독자적인 형태로 진화해왔다. 1980년대, 8가 버드나무 식당 자리에 자체 사옥과 넓은 주차장까지 갖췄던 ‘함흥면옥’의 위용이나, 웨스턴 길에서 갈비와 함께 평양식 냉면을 선보이며 LA 한식의 대명사로 군림했던 ‘우래옥’이 그 서막을 열었다. 우래옥의 전통은 ‘조선갈비’로 이어졌고, 수원갈비, 박대감, 강남회관 등 수많은 갈빗집들이 저마다의 스타일로 냉면을 내놓으며 ‘고기 후 냉면’이라는 공식을 완성했다. 이들의 냉면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 새콤달콤한 육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며 ‘LA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그 사이에도 개성 강한 도전자들은 명멸했다. 90년대 초 3가에 문을 열어 하루 800그릇을 팔았다는 전설의 함흥냉면 전문점 ‘원산면옥’, 탈북 가수 김용 씨가 윌셔길에 창업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평양냉면 전문점 ‘모란각’이 대표적이다. 특히 모란각은 오렌지카운티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정통 평양냉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부에나파크 ‘아리수’와 더불어 물냉면을 시키면 비빔냉면을, 비빔냉면을 시키면 물냉면을 맛보기로 내어주는 ‘짬짜면’식 서비스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 외에도 냉동면을 독특하게 풀어내 24시간 분식 냉면 시대를 열었던 ‘코끼리분식’, 수십 년째 여름이면 주차 대란을 일으키는 칡냉면의 강자 ‘유천냉면’까지, LA의 냉면 지형도는 실로 다채롭다. 여기에 부산 피난민들이 메밀 대신 밀가루로 만들어 먹던 ‘부산밀면(항아리칼국수)’과 깨와 김가루를 듬뿍 얹은 ‘춘천막국수(춘천닭갈비)’까지 가세하니, 가히 ‘면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하다. 이러한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서관면옥’과 ‘가빈’이 들고나온 ‘슴슴한’ 평양냉면은 단순한 신메뉴가 아니다. 이는 40년간 굳어진 ‘LA식 냉면’의 관성과 미각에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과연 원조의 맛은 어떠했는가, 우리의 입맛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음식의 맛은 시대와 함께 변한다. 하지만 때로는 이렇듯 원형에 가까운 맛의 등장이 우리의 미각을 단련시키고 외식 문화의 지평을 넓힌다. 평양냉면의 귀환이 불러온 이 신선한 경쟁이 LA 한식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평양냉면 냉면 정통 평양냉면 평양냉면 메뉴 평양냉면 대전
2025.07.06.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