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꺾이지 않는 풀
눈이 많이 내린 뒤, 흰 눈으로 덮인 풀밭에는 누렇게 숨을 죽인 풀잎들이 겨울의 거친 호흡을 견디고 있다. 풀은 차가운 얼음 밑에서, 다시 따스하게 피어날 봄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김수영 시인은 노래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시 ‘풀’ 부분,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먼저 몸을 낮추고, 다시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 그 연약함 속에 깃든 생명력은 어떤 폭풍도 꺾지 못한다. 풀은 쓰러지는 듯 보이지만, 절대 꺾이지 않고 반드시 다시 푸르게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숨죽이며 견뎌온 한 해가 저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마땅하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만큼 고통의 순간들이 많았다. 지난여름, 아이티 북부를 돌아 수도 포토프린스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했다. 아이티를 자주 찾지 못하는 우리는 마음만 어려웠지만, 고아들이 살아내야 했던 하루하루는 눈물겹도록 가혹했다. 밤낮없이 들려오는 총성은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는 공포로 흔들어 놓았다. 이유도 모른 채 목숨을 잃고,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이들의 소식이 매일 같이 들려왔다. 어느 날은 학교에 친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아이들은 갱단에 끌려가고, 여자아이들은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 사이, 두려움은 무관심 속에서 하늘만큼 커졌다. 오래도록 기댈 수 있을 것 같던 나라는 등을 돌렸고, 국제사회는 이미 넘쳐나는 위기들로 지쳐 있었다. 세계 곳곳의 전쟁에 모든 나라의 시선이 쏠리는 동안, 전쟁터 같은 갱의 폭력 속에 놓인 아이티는 조용히, 그리고 철저히 외면당했다. 선교센터에서 고아원으로 식량을 운반하려면 통행세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을 갈취당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달렸다. 숨을 몰아쉬며 고아원에 돌아와 잠시 안도하면, 곧 허기가 몰려왔다.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하루 한 끼의 쌀밥과 또 한 끼의 스파게티나 옥수수죽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밤새 배고픔에 잠을 설칠까 봐 맹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약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콜레라로 아이 둘이 세상을 떠났고, 열병 앓던 세 살배기 아이도 끝내 하늘나라로 갔다. 그래도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아이들을 먹이고 학교에 보냈다. 배워야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의 학비와 교통비, 식비를 지원했고, 생전 처음 만져보는 노트북도 보냈다. 함께 꿈을 꾸자고, 함께 세상을 이겨내 보자고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그들 중에서 의사도, 간호사도, 언젠가는 세상을 바르게 이끌 지도자도 나오리라 믿는다. 바람 앞에 먼저 눕지만, 절대 꺾이지 않고 일어나는 풀처럼, 아이들도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여기까지 온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서 살아 있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풀은 꺾이지 않기 위해 눕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다. 2025년 아이티는 몹시 힘겨웠다. 그러나 얼어붙은 땅에서도 풀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다음 봄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듯 아이티 고아들도 곧 다시 소망 가운데 일어나리라 믿는다. 조 헨리 / 선교사·더 코너 인터내셔널 대표삶과 믿음 아이티 고아들 아이티 북부 풀이 하나님
2025.12.25. 1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