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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부서 대형 산불, 2800에이커 전소…'프랭클린 파이어' 강풍 확산

말리부 지역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소방 당국은 즉각 주민 대피령을 내리고 진화에 나섰지만 샌타애나 강풍 등의 영향으로 불길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현재까지(10일 오후 5시 기준) 산림 2800에이커가 불에 탔고 주택 1채가 전소됐다.   가주소방국에 따르면 산불은 지난 9일 오후 10시 45분쯤 말리부 캐년 산간 지역에서 발생했다. 국립기상청(NWS)은 즉각 적색경보(red flag warning)를 발령했고, 소방 당국은 소방관 700명 이상과 소방 항공기 및 헬기를 투입해 진화에 나섰다. 소방 당국은 이번 산불을 ‘프랭클린 파이어(Franklin Fire)’로 명명했다.   특히 이번 산불은 말리부 캐년 로드와 팜 캐년 북쪽 지역에서 발화한 뒤 말리부 시청과 페퍼다인 대학교 등 인구 밀집 지역까지 위협하고 있다. 가주소방국 등은 주민 대피령을 발령하고 산불 진화에 나섰지만 최대 풍속 21~40마일 강풍이 불면서 진화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LA카운티 셰리프국은 현재 주민 1만 8000명(주택 등 건물 8100채)이 산불 영향권에 거주한다고 밝혔다. 소방 당국은 말리부 시청을 중심으로 반경 약 3~5마일 지역 주민에게 대피령(건물 2043채)과 대피 경보(건물 6046채)를 내렸다. 페퍼다인 대학교 등 인근 주택 전력 공급도 공공안전을 위한 계획적 단전(PSPS)으로 차단됐다.   소방 당국은 산불 발생 지역이 인구 밀집지와 가까워 확산 방지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있다.     한편 10일 LA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회는 프랭클린 파이어와 관련,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남가주대기정화국(AQMD)은 11일 오후 5시까지 LA 도심 등에 외출 자제 등 산불로 인한 대기주의보를 내렸다.  개빈 뉴섬 가주 지사는 연방재난관리청(FEMA) 지원을 받아 프랭클린 파이어 진화 작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뉴섬 지사는 “소방 기관은 주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를 위해 프랭클린 파이어 진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주민들은 대피령 등을 잘 따라달라”고 강조했다. 김형재 기자프랭클린 말리부 프랭클린 파이어 말리부 지역 산불 진화

2024.12.1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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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무덤

워싱턴 DC 부근에 가면 마운트버넌이라는 곳이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저택과 농장이 보존되어 있다. 미국인은 물론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관광지의 하나이다. 농장 안을 거닐면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워싱턴은 두 차례의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주변의 간곡한 연임 권고를 거부하고 사저로 돌아와 살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쓰면 워싱턴은 “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지금 백악관에 계십니다. 이름만 부르기 어색하면 파머(farmer·농부)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영국 전통을 따라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면 응당 국회의사당 안에 안장될 것으로 여겼다. 그 분위기를 잘 아는 워싱턴은 자기는 내 농장 집, 내가 지정한 장소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지금도 살던 저택 왼쪽 그것도 돌들이 쌓여 있던 경사지에 잠들어 있다. 여러 차례 국회의사당으로 이장할 것을 시도했으나 아직까지 유언에 따라 옮기지 못했다. 보초 군인 두 사람이 교대해서 경호를 서고 있다.   워싱턴 “농부라고 불러주세요”     그가 살아 있을 때 창고 비슷이 사용하던 건물 안에는 그의 애용품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바이블을 얼마나 애독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섬기는 사람이 참다운 지도자라는 아메리카의 정신적 원천을 암시해 준다.   내가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미국의 지도자는 워싱턴보다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워싱턴보다 26년 선배였고 필라델피아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필라델피아 어디에 가든지 그의 삶의 향기와 흔적이 남아있다. 필라델피아라기보다 프랭클린시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그의 무덤을 찾아보고 싶어 찾아다니다가 안내를 받아 발견한 곳은 일반인과 같은 묘소에 누워있는 비 교적 큰 돌비석 무덤이었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가이지만 찾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으면 초창기 아메리카의 실정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했고 미국 헌법제정에도 참여했다. 대서양을 왕복하면서 영국과 유럽의 문화 사상계와 교류도 많았다. 학문과 정신계의 친구들은 모두 유럽에 있었다. 미국인은 그를 과학자와 발명가로 평가할 정도로 존경하나 정규적인 과학교육은 전무했고 학교교육도 받은 바가 없었을 시대의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건설했다.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교회와 대학이 설립되었고 정치지도자보다 사회지도자들이 나라를 건설했다. 그 기반에는 기독교의 휴머니즘이 깔려있다. 어떻게 보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니고 반석 위에 세워진 건물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정치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의 부산물이었고, 민주정치는 인간다운 삶의 유물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나는 지금까지 10명의 우리나라 대통령과 함께 지냈다. 그런데 한 번도 어느 대통령의 무덤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물론, 내 편협 된 견해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정치 노선을 굳건히 한 데는 존경심을 갖는다. 그러나 왜 철없는 경무대(현 청와대) 측근들의 장막에 가려 4·19 때 애국심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에게 발포를 허락했는지 애석한 마음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다. 국민을 절대빈곤에서 경제건국의 기틀을 만든 공로는 인정하면서도 유신헌법을 만들고, 인권경시의 과오를 범했는지 유감이다.   최근에는 나도 모르고 있던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마을 묘역과 시설이 그렇게 넓은 줄은 몰랐다. 그리고 역대 대통령들이 무궁화대훈장을 셀프 수상했다는 사실이다. 국회에서 생전이나 사후에 증정하는 것으로 알았다. 구소련의 흐루쇼프 수상이 셀프 영웅훈장을 받았고 같은 독재국가에서는 관례가 되어 있다. 김정은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 출신이니까 받고 싶었을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 원수의 셀프훈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앞으로는 무궁화대훈장을 국민이 드리고 싶은 정치지도자가 많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직과 진실, 인간의 기본 가치   그런데 나는 지금도 도산 안창호의 묘지를 찾아갈 때가 있다. 나만이 하고 싶은 말씀을 드린다. 이장하기 전에는 인촌 김성수의 묘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들은 정치계에 몸담고 살면서도 국민계몽과 교육을 더 소중히 여겼다. 국민 모두의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았다. 국민에게 모든 것을 바쳤지 국민과 정치를 통해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나라를 위해 태어났다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베푸는 생애를 살았다. 개인적으로 대면했을 때도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을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처했다.    정치는 정권과 공존한다. 그 정권욕에 빠지면 국민은 정치의 수단이 된다. 두 사람에게는 정권욕이 없었다. 항상 더 유능한 인재를 찾아 양보하는 모범을 보였다. 명예를 탐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교육과 종교계의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도산과 인촌에게서는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정직과 진실, 공정과 정의, 휴머니즘의 기본가치인 인간애 등은 정치적 사회가치의 기본이다. 그분들은 인격과 더불어 그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정치 그 자체는 목적이 못 된다.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구현하는 수단과 과정임을 보여 준 지도자들이다. 우리 위해 사시다 가신 지도자 중의 지도자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프랭클린 벤저민 삶의 향기 우리나라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2022.07.11. 19:07

[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20세기 초 미국은 수많은 과학 기술과 새로운 제도가 생겨나 풍요를 누리면서 모든 주식은 끝없이 상승하였다. 그러나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한 사람이 느닷없이 주식을 대량으로 매도하자 수 많은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고 매도는 도미노처럼 일어났다. 수습이 불가능한 사태로 치달았다.     주식 시장의 붕괴는 경제 발전의 적신호다. 800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900만개의 예금 통장이 사라졌다. 2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미국의 경제는 14만개 기업의 부도를 처리했고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미국서 시작된 이 위기는 영국 독일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을 강타했고 세계는 경제 공황에 빠졌다.   이 때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이를 극복하리라 생각했지만 대공황은 계속됐고 국가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1700만명이 직업을 잃었고 200만명이 길거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32년 민주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희망”이라는 경선 구호로 제3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민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어 줄 것을 호소했다.     서방 국가들이 경제위기를 맞고 있을 때 새로 탄생한 소련의 국가 풍경은 황홀했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사회의 관리 방식을 창조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계획경제라고 불렀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서방의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는 몇년동안, 소련은 첫번째 5개년 건설계획을 실시한다.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발전했고 사회 전반에도 발전이 이루어졌다. 서방의 정치가들은 소련의 성공에 주목했다. 정부의 간섭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던 미국은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시기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유주의 경제에 나타난 시장의 문제점을 발견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정부는 보이는 손이 되어 경제에 관여하고 국가의 힘을 경제 정책에 이용해야 한다”며 프랭클린에게 편지를 써서 정부 지출을 증가시킬 것을 권했다. 그는 취임 즉시 경제에 대한 정부의 대규모 관여를 시작하였다. 긴급 은행법을 통해서 은행 질서를 정돈했고 긴급 구제법을 통해서 구조기관을 설립해 빈곤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돌보게 했다.   농업 조정법을 통해서 농산품 가격 회복을 도왔고 정부 산업 부흥법을 통해서 경제 복구에 자금을 투자했다. 1933년 테네시강 관리국이 설립됐다. 국가의 지도와 정부의 투자로 이 유역에 20개의 새로운 댐을 건설했고. 대량의 공공 건설 작업은 사람들에게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경제위기가 가져다준 사회 불안을 노동을 통해서 해소한 것이다.     미국은 새로운 정치 기간에 노후 대비와 실업 분야 같은 사회보장 체계를 구축했다. 대통령이 추징한 사회 혁명과도 같았다. 프랭클린은 국민들에게 가난을 피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빈곤에서 벗어 나는 일이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빈곤을 막아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유명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론“이다.   1936년 미국의 경제는 회복하고 있었으며,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새로운 정치는 시장 경제의 새로운 발전 방식을 창조했다.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과 정부의 보이는 손이 힘을 합쳐 경제를 자극했으며 시장 역할과 정부 역할을 동시에 발전시켰다. 그는 대통령 4선을 지낸 후 세상을 떠났다. 전쟁 직후 미국의 산업 생산량은 전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고 달러를 중심으로 한 국제 금융체제를 구축했다. 20세기 후반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국이 등장한 것이다. ([email protected])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roosevelt 프랭클린 민주당 프랭클린 경제학자 케인스 경제 발전

2022.04.2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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