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사이트] AI시대,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말할 때 한국은 종종 ‘준비된 나라’로 언급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제조 능력, 촘촘한 통신 인프라, 제조업 전반에 축적된 데이터와 자동화 경험까지 갖춘 나라라는 평가다. 특히 AI 경쟁의 핵심 자원으로 꼽히는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은 여전히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에 서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인식이 퍼져 있다. “하드웨어가 강하니, 인공지능 경쟁에서도 유리하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절반의 진실이며, 동시에 상당히 위험한 착각일 수 있다. 최근 이 착각은 새로운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확보 계획이 발표될 때마다, 한국의 AI 경쟁력이 한 단계 도약한 것처럼 포장된다. GPU와 같은 장비를 얼마나 확보했는지, 데이터센터 규모가 얼마나 커졌는지가 전략의 핵심처럼 다뤄진다. 기술 담론은 점점 ‘설계’보다 ‘조달’에 가까워지고, 인공지능 논의는 언제부터인가 구매 목록과 예산 규모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하드웨어를 갖췄다는 사실이 곧 지능을 확보했다는 증거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물론 오늘날 인공지능 경쟁에서 하드웨어의 중요성이 커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규모 언어 모델과 생성형 AI는 상상을 초월하는 연산량을 요구하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GPU와 데이터센터를 확보하지 못하면 경쟁에 참여조차 어렵다. 이 때문에 AI 경쟁은 알고리즘의 우열을 넘어, 반도체 생산 능력과 자본, 전력과 외교 전략이 결합된 국가 간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이 하드웨어 인프라를 중시하는 선택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 단계다. 하드웨어는 경쟁의 필요조건이지, 승리를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공지능의 성능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소프트웨어, 즉 모델 구조와 학습 방식, 시스템 설계와 최적화 능력이다. 같은 하드웨어 위에서도 누가 설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하드웨어가 가능한 최대치를 정한다면, 소프트웨어는 그 최대치에 도달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그런데 한국의 인공지능 산업 구조는 이 두 요소 사이에서 점점 불균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 ‘만드는 능력’에는 강하지만, ‘지능을 정의하고 활용하는 능력’에서는 아직 중심에 서 있지 못하다. 반도체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글로벌 AI 흐름을 주도하는 대형 모델과 플랫폼은 대부분 해외에서 만들어진다. 미국은 소수의 기업과 연구 집단이 모델, 플랫폼, 생태계를 동시에 장악하고 있고,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인재와 데이터를 집중시키며 추격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AI를 빠르게 도입하고 적용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AI의 방향성과 표준을 결정하는 위치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이 불균형이 지속될 경우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한국이 AI 시대의 ‘고급 하청 국가’로 고착되는 것이다. 핵심 모델과 알고리즘, 표준은 해외에서 만들어지고, 한국은 이를 실행할 반도체와 인프라를 공급하며 산업 현장에 적용하는 역할에 머무르는 구조다. 이 경우 한국은 분명 AI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겠지만, 가장 큰 부가가치와 결정권은 다른 나라가 가져간다. 이는 단순한 산업 수익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주권과 데이터 통제,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는 “지금은 기반을 깔 때이니, 소프트웨어와 인재는 나중에 따라가도 된다”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 생각이 위험한 이유는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특성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특히 AI 연구와 인재 생태계는 시간과 경험이 누적되는 영역이다. 논문, 실패, 오픈소스 기여, 글로벌 네트워크는 자본을 투입한다고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드웨어는 투자 규모에 비례해 생산량을 늘릴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 역량은 그렇지 않다. 이미 글로벌 AI 인재는 미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집중되고 있고, 한국은 인재의 절대량 부족과 유출이라는 이중의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이 불균형이 곧 한국 AI 산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불균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방치하느냐 전략적으로 관리하느냐다. 한국은 모든 영역에서 미국이나 중국을 모방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대신 제조업과 산업 현장에서 축적된 강점을 살린 산업 특화 AI, 반도체 역량과 결합한 시스템·에너지 효율 중심의 AI, 그리고 대규모 인력 양성보다 핵심 소프트웨어 아키텍트와 설계자를 중심으로 한 선택적 육성이 보다 현실적인 경로일 수 있다. 결국 관건은 하드웨어 강국이라는 자부심 위에 소프트웨어 약국이라는 현실을 얼마나 냉정하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공지능 시대의 경쟁은 더 빠른 칩을 만드는 싸움이 아니라, 어떤 지능이 표준이 될지를 결정하는 싸움이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하드웨어의 성공 경험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가리지 않도록 하는 전략적 자각이다. 이 경고를 실제 선택과 투자로 옮길 용기가 있는지가 한국 AI 산업의 미래를 가를 것이다. 김선호 / USC 컴퓨터 과학자AI 인사이트 ai시대 설계자 인공지능 경쟁 ai 경쟁력 하드웨어 인프라
2025.12.25.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