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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망치와 모루 작전

1950년 9월 15일, 9월 23일, 그리고 9월 28일은 대한민국이 적으로부터 회생과 반격의 불씨를 되살린 역사적인 날들이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은 소련제 T-34 탱크 242대와 122 미리 곡사포 172문을 앞세워 국군의 2배나 되는 20만여 병력으로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을 남침했다. 불과 3일 만에 한국은 수도 서울을 함락당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적군에 갈피를 못잡던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8일,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UN군 총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넘겼다. 그러나 전황은 계속 악화했다. 10월 19일에는 중공군 83만명이 압록강을 도하하면서 인해전술을 감행했고, 11월에는 소련군 미그기가 청천강 일대에 출몰하여 위협을 가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렇게 급박한 형세를 일시에 해소하기 위해서 만주 일대 원자력 폭탄을 투하할 구상을 했지만 반대가 심해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급기야 UN군과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며 대한민국의 영토는 경상남북도로 축소되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맥아더 장군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고안한 ‘망치와 모루(Hammer and Anvil)’ 작전을 구상했다. 망치는 불로 달군 쇠를 두드리는 연장이고, 모루는 그 쇠를 올려놓는 받침대다. 이 작전은 적을 한곳으로 몰아넣고 양쪽에서 공격하는 포위 섬멸 전술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조수 간만의 차가 10m에 달해 수많은 미군 장성들이 반대했지만, 맥아더 장군은 위험이 클수록 기습 효과가 크다며 작전 수행을 강행했다.   1950년 9월 15일,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다. 미 해병 제1여단, 미 육군 제7보병사단, 한국 해병 2개 대대, 육군 제17연대로 구성된 UN군과 한국군 상륙부대는 인천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들은 한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며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모루 역할을 수행했다.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했던 미 제1기갑사단과 UN군, 한국군으로 편성된 제8군은 9월 23일 낙동강을 도하해 북진하며 망치 역할을 맡았다.   이 양동작전으로 북한군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10만여 명의 병력을 잃었고, 3만 명의 잔여 병력은 북으로 도주하는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다. 이 작전은 전세를 뒤집고 대한민국의 존망을 지켜낸 기념비적인 승리였다.   그후로 75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수도를 점령당하면 패전한다”는 옛 병법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도전적이고 악랄한 북한군을 불과 40km 거리에 두고 있다. 6.25 전쟁 당시처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 마지노 방어선과 같은 철통같은 방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나치군이 파리를 정면 공격하지 못하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우회해야 했던 것처럼, 방어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쟁 억지력을 높여야 한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열린광장 망치 모루 작전 수행 낙동강 방어선 한국군 상륙부대

2025.09.1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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