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세계 지도를 보면 대한민국은 참 작았다. 한반도는 손가락으로도 가려질 정도였지만 미국은 지도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큰 나라가 더 강하고, 더 좋은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거대한 나라 미국에서 살고 있다. 상상도 못 했던 삶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나라의 크기가 아니라 사람의 힘이 나라를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K-푸드, K-팝, K-드라마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통한다. ‘K’라는 글자는 이제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다. 오랫동안 결혼정보회사에서 일하며 많은 한인을 만난다.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놀라움과 존경심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 이민와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며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낯선 사회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리를 잡은 삶의 태도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같은 언어와 문화, 같은 정서를 나눌 수 있는 한인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같은 말을 쓰고 정서를 이해하는 사람과 마주 앉았을 때 느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크고 단단하다. 한인이 많지 않은 타주로 출장을 갔을 때 우연히 한국말이 들리거나 한글 간판이 눈에 들어오면 괜히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럴 때마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떠올리게 된다. 한글은 단지 문자가 아니라 백성의 삶을 바꾸기 위한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는 혼기가 차면 좋은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어야 나라가 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매는 단순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단순히 사람을 소개하는 일일까. 좋은 인연을 이어주고, 가정을 이루게 하고, 그 가정에서 또 다음 세대가 자라난다.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혼사의 일을 이 시대의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일은 비즈니스를 넘어 사람의 삶을 잇는 일이며, 공동체의 뿌리를 단단히 하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릴 적 지도 속에서 작게만 보이던 대한민국은 이제 내 마음속에서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위대한 한글이 있고, 끈질긴 정신력이 있으며, 어디서든 당당하게 살아가는 한국인이 있다. 그리고 그 인연을 이어가는 나의 일이 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하지만 분명한 마음으로 외친다. “대한민국 만세.” 제니퍼 이 / 결혼정보회사 듀오 팀장일터에서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한글 간판 세계 지도
2026.03.01. 18:01
한인 사회에서 소니아 석(1917~1997) 여사는 ‘애국 할머니’로 통했다. 중앙일보 본국지 1972년 10월4일자 기사에서 찾은 석 여사는 그렇게 한마디로 표현돼 있다. 자서전 '맨발의 소니아 석'에는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석 여사가 캐딜락을 처음 산 건 1964년이었다. “나는 DMV에 신청한 ‘KOREAN’ 번호판을 캐딜락에 달고 다녔다. 항상 한국을 소개하고 싶었다. 뒷창문에는 태극기도 붙였다.” 석 여사는 16살 때 첫 운전대를 잡았던 인물이다. 고향인 평안남도에서 최초의 여성 운전사였다. 남자들을 제치고 운전대를 잡을 정도니 강단 있던 여성이다. 미국에 온 건 1948년이다. 30대 초반이었다. 집안을 살리기 위해 장사를 하느라 공부를 하지 못했던 것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선택한 게 유학이다. 영어 한마디 못해도 끈기로 버텼다. 노스캐롤라이나 장로교 대학원(1949년), 몬터레이 시립대학(1952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1955년) 등에서 국제무역 등을 공부하며 미국 생활에 정착했다. 석 여사는 유학 도중 한국 전쟁을 겪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피란민들의 울부짖는 모습이 연일 보도됐다”며 “그때부터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배웠고 오늘까지 계속 기도한다”고 적었다. 이는 석 여사가 고국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많은 것을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1962년 부동산 업계로 뛰어 들었다. 한인 최초의 브로커 자격증과 감정 평가사 자격을 취득했다. 큰 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자서전에는 “가주한국외환은행 지점, 한인회관, 대한항공 등을 위해서는 좋은 조건으로 건물이나 땅을 사주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렇게 번 돈을 한인 사회에 다양한 방법으로 환원했다. LA의 한인 인구가 3000명가량 될 때다. 석 여사는 한인센터 이사로 한인 사회를 위해 첫 봉사를 시작했다. 그는 한인타운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LA지역 올림픽 길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업소들을 돌며 한글 간판을 붙이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미국인 업주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석 여사는 그때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 사람들이 호통을 쳤다. 그러나 나는 이게 너희 장사를 잘해주기 위해 하는 것이니 기다려 보라고 설득했다. (중략) 미국 간판을 우리말로 바꾸어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올림픽길이 한인타운의 면모를 더해갔다.” 이후 미주총연합회 초대 회장, LA한인회장(1971년) 등에 선임됐다. 이듬해 전국체전에 참여할 미주선수단의 초대 단장을 맡아 고국 땅을 밟기도 했다. 그는 미국 정계와도 가까웠다. 닉슨 대통령 행정부 시절 공화당 가주유산위원회 부회장(1972년), LA시 커미셔너(1976년), 공화당 가주지구당 부위원장(1981년) 등을 맡아 한인 사회의 정치력을 다져갔다. 세계적인 테마파크였던 애너하임 디즈니랜드 내 ‘스몰 월드’에 최초로 한국 인형을 넣은 것도 석 여사가 한 일이다. 그가 일평생 한국과 한인 사회를 위해 한 일을 제한된 지면에 모두 담기엔 부족할 정도다. 그만큼 많은 씨앗을 뿌렸다. LA에서 한인으로서는 지난 1971년 처음으로 치과를 개업한 장기열 박사가 석 여사의 장남이다. 석 여사는 8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삶의 행적에는 ‘애국’ 한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초대회장 소니아 올림픽길이 한인타운 미주 한인사회 한글 간판
2023.09.21.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