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민족 주민·상권 공존, LA 속 ‘글로벌 타운’ 진화
LA 한인타운은 이제 ‘다민족 타운’이 되고 있다. 10년 전만해도 넘쳐나던 유흥주점 대신 이제는 주거 밀착형 비즈니스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한인타운에서 성공하면 다른 도시에서의 성공 가능성도 확인하는 것이란 믿음도 퍼지고 있다. 변화의 물결 속에 한인타운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본지 창간 51주년을 맞아 세대 교체 상황에서의 한인타운 변화를 추적해 본다. ▶염소고기 찾는 2세들 노릿하면서도 고소한 염소고기 향기가 맴돌던 노포가 카페처럼 깔끔해졌다. 고소한 맛이 더 짙어지자 메뉴도 영어로 바뀌었다. 새로 개장해 2년째 접어든 한미정 식당에는 주말이면 각종 앱과 리뷰를 보고 찾아온 손님들이 북적인다. LA 한인타운 남쪽 피코 불러바드에 있는 이 식당은 20년을 넘어 2대째 영업 중이다. 손님들이 가장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2세인 아들이 식당을 이어받아, 염소라는 비교적 ‘고전적인’ 음식으로 한인 2세는 물론, 타인종 손님들까지 줄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한미정은 2020년대 들어 한인타운이 마주하는 변화의 예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인타운이 한인만을 위한 공간을 벗어나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는 한인타운의 주요 식당 메뉴에서 감지된다. 영어와 중국어 음식 이름이 먼저 표기된 식당도 있다. 젊은층에 인기가 있다는 선농단은 메뉴에 한글 다음으로 중국어를 올렸다. 식당 관계자는 “이미 주 고객층이 바뀌고 있어 중국어가 필수, 영어는 선택이 된 느낌”이라며 “주요 SNS(소셜미디어)와 지도 앱에 리뷰를 적는 고객 대부분이 중국계, 한인 2세들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에서 진출한 대도 식당은 주류와 음료수 메뉴에서 아예 한글을 빼고 시작했다. 냉면과 바비큐로 자리를 잡은 가빈 식당도 메뉴에는 영어가 한글보다 먼저 나온다. 한인 1세들이 2세와 다민족 주민들에게 자리를 내준 모습이다. 환경이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대규모 주거지 개발 프로젝트 활기 한인타운을 오랜만에 방문하는 한인들은 가장 달라진 것 중 하나로 ‘스카이라인’을 꼽는다. 버몬트와 윌셔 인근에는 38층 규모의 한라산(Hallasan), 윌셔와 후버에는 23층 규모 럭셔리 아파트 커브(Kurve)가 자리를 잡았다. 윌셔와 아드모어 인근에는 22층 규모의 오퍼스(Opus)도 있다. 테라스 블록, 웨스턴 스테이션, 세이지 등 다른 대규모 아파트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부동산 매체 리얼딜에 따르면 올해에만 한인타운에 2200여 개 유닛이 새로 생겨날 예정이다. 어바나이즈LA에 따르면 버몬트와 웨스턴, 3가와 올림픽 사각형(한인타운) 안팎으로 무려 50여개가 넘는 다세대 콘도와 아파트 프로젝트가 마무리됐거나 기획 중이다. 이런 공급의 근원은 무엇일까. 10여년 전부터 젊은층은 인근 버뱅크, LA다운타운, 북쪽의 글렌데일과 패서디나의 높은 렌트비와 집값을 피해 한인타운을 보금자리로 선택하기 시작했다. 명확한 시작점을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K-컬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5년 전후가 유력하다. 70~80년대 지어져 노후된 아파트와 빌딩들이 줄이어 리모델링에 들어가고, 팬데믹으로 인한 공실 탓에 상업용 건물을 매입해 콘도로 변경하는 프로젝트들도 줄을 이었다. 같은 시기 한인 이민은 줄기 시작했고, 한인타운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학군과 주거 환경을 찾아 외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생겨난 한인타운에 오히려 한인타운을 누리려는 비한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윌셔가의 새로운 아파트 건물에 입주한 김유진(33)씨는 “한인타운에 있다고 모든 것이 한국어나 한국식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며 “아무래도 다양해진 입주자들의 문화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상권 작지만 기회는 국제적 동네 주민이 바뀌자 식당과 업소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업소 주인들은 아예 한국에서 오거나, 타인종으로 바뀌고 소위 거리 감성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인타운이 K-컬처의 리트머스지가 되면서 한국의 대형 식당 체인들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식당, 디저트 카페, 커피 전문점 등이 속속 들어왔고, 덩달아 대만, 일본, 베트남 업체들도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과거 정스마켓이 있던 자리에는 대만계 음료 체인점인 투차(Tu Cha)가 올해 초 오픈했다. 고객들이 가장 붐비고, 유행을 선도하기 때문에 추후 지점 확산을 위해 한인타운을 교두보로 선택했다는 후문이다. 2년 넘게 오픈 준비를 했다는 ‘스시 잔마이’(채프먼몰 소재)는 리틀도쿄나 다운타운 대신 한인타운 한복판을 미국 내 첫 직영점으로 선택했다. 기무라 기요시 대표는 “경쟁을 피한다는 의미보다는 중고급 수준의 스시 메뉴에 지갑을 열 수 있는 손님들이 가장 밀집한 곳이라는 점이 감안됐다”며 “여기서 자리를 잡으면 미국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식당과 업소 리뷰에는 한인들의 목소리보다 타인종들의 의견과 조언이 더 많아졌으며, 손님들이 바뀌면서 영어나 스패니시를 구사하는 직원을 더 쓰게 됐다. 버몬트길 소재 한 식당 매니저로 일하는 톰 양씨는 “실제로 영어를 구사하는 라틴계 직원을 선호하는 추세다. 중국어 구사자도 필요해졌다”고 전했다. 그는 “이젠 한인들끼리 설렁탕이나 바비큐 품질을 놓고 경쟁하기보다는 주변의 일식, 미국식, 중국식 음식들과 경쟁해야 한다”며 “노포가 사라지는 배경이기도 하지만 독특한 한인타운이 당분간 겪어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타운 멋 지켜야” 목소리도 다민족화가 추세지만 한인타운의 ‘명맥’은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LA 한인회 이사장을 지낸 한 원로는 한인 비즈니스들의 노력을 주문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또 다른 리틀도쿄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결국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비관론이 있죠. 하지만 지금의 한인타운이 있기까지는 지키고, 가꾸고, 발전시켰던 이민 선배들의 노력이 있었잖아요.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전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이고 고유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잘 지켜야죠.” 1980~90년 한때 한인타운은 나이트라이프(밤 유흥) 타운으로 유명했다. 노래방과 주점, 사우나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그때다. 하지만 이젠 폭동을 딛고 일어서 부흥을 이어가는 역전의 상징이 됐다. 캐런 배스 LA 시장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한인 업주들에게 “전 세계에 소개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한인타운이라 자랑스럽다. 더 멋진 곳으로 만들어보자”고 격려한다. 이 흥미로운 곳은 내년부터 LA에서 시작되는 월드컵(2026년), NFL 결승전(2027년), 올림픽(2028년)을 거치며 더욱 빛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한인타운을 지키며 새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최인성 기자글로벌 다민족 한인타운 변화 la 한인타운 한인 2세들
2025.09.21.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