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90년대만 해도 미국의 식당 내부 구조는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었다. 조리는 주방에서만 가능했다는 뜻이다. 손님이 테이블에서 생고기를 굽는다는 개념은 생소함을 넘어 불법 영업으로 간주됐다. 당시 LA 시건물안전국은 고기를 테이블 위에서 구우려면, 테이블마다 스프링클러와 자동 소화 시스템을 갖춘 주방 수준의 후드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대부분이 포기했지만, 이를 정면 돌파한 식당이 있었다. 버몬트길 현재 ‘국대고집’ 자리에 1983년에 개업한 ‘해운대 왕갈비’다. 과도하다고 할 만큼 완벽한 시설을 갖춘 이 식당은, 결과적으로 한식 테이블 바비큐 문화를 정착시킨 1세대 식당으로 기록된다. 이 식당에서 시작해 한인타운의 요식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이들이 이인천씨 형제들이다. 해운대 왕갈비가 대박을 거둔 이후 한동안 한인타운 요식업계는 이씨 형제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그 나머지로 분류될 정도로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현재는 대부분의 형제들이 라스베이거스로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이들이 타운에 남긴 역사는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씨 형제의 식당 계보를 정리하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먼저 해운대 왕갈비를 시작한 사람은 큰 누나다. 큰형은 ‘황태자’, ‘신라부페’, ‘수라원’, 할리우드의 ‘란제리’ 클럽, 라스베이거스의 ‘김치바비큐’를 열었다. 둘째는 원산면옥, 진주곰탕, 미스터 순두부, 콜로라도의 ‘서울바비큐’, 라스베이거스의 ‘진주설렁탕’을 개업했다. 셋째가 이인천 사장인데 LA에서 ‘주막74’를 비롯해 클럽 ‘6th Ave’, 클럽 ‘360’, ‘노량진 회센터’를 운영했고 라스베이거스로 이주해서는 ‘진생바비큐’, ‘대장금’, ‘김치바비큐’에 이어 ‘야마 스시’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넷째는 ‘알배네’와 ‘미아리 칼국수’를 개업했다. 이씨 형제들의 사촌도 요식업계의 큰손이다. 바로 북창동순두부 창업자 고 이희숙씨의 남편 이태로씨다. 이씨 형제의 사돈의 팔촌이자 동네 친구도 LA서 식당을 열었다. 양지설렁탕과 양지감자탕의 이기영 사장이다. 이제는 2세들까지 가세해서 북창동 순두부의 경우 고 이희숙 사장의 세 아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큰형의 수라원은 딸이, 셋째의 딸도 라스베이거스 김치바비큐와 야마 스시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씨 형제들이 불을 지핀 테이블 쿠킹 문화는 이제 미국 전역은 물론 다양한 민족 요리에서도 일반화됐다. 양꼬치, 야키니쿠, 데판야끼, 샤부샤부, 핫팟 등 다양한 형태로 재탄생하고 있다. 불판의 기술적인 진화는 경이롭다. ‘타입1 시스템’은 기름과 연기를 걸러내는 고성능 후드를 뜻한다. ‘타입2 시스템’은 수증기를 위주로 배출하고 ‘다운 드래프트 시스템’은 연기를 테이블 아래로 흡수하는 장치다. 코끼리코처럼 천장에서 내렸다 올렸다 하는 자바라 스타일 후드도 최근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는 후드없이 자동 소화 시스템도 생략되고 간단한 필터시스템만 갖춘 전기 인덕션 스타일이 일반화 될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한식당의 불판에서 시작된 도전 정신은 이제 외식 산업의 경계를 넘어섰다. 노래방, K-뷰티, K-팝까지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모두가 어렵다고 고개를 저은 규제를 뚫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한인 1세대 개척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한인타운의 풍성한 식문화는 이들이 흘린 땀과 도전의 결과물이다. 이씨 형제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로 길이 남기를 바란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혁명 선도 라스베이거스 김치바비큐 클럽 라스베이거스 이씨 형제들
2025.06.29. 16:25
이 우울은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 바닷바람에 소리 없이 흘러가는 산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함께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산안개처럼 가기도 하고, 때로는 갔다가 다시 오기도 한다. 6·25 전쟁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4월을 돌고 돌아 우리 형제들을 치마폭에 안으셨던 어머니 생각에 우울한가 보다. 아니, 어쩌면 이십여 년 전, 오피스 근방 길거리에서 살다가 우리 집으로 입양되어 살았던 두 마리 고양이와 친구도, 배필도 없이 그리피스 공원에서 십여 년을 맴돌던 외톨이 산사자 P-22의 외롭고 아팠던 삶과 죽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실 것이다. 숱한 일을 겪으셨던 어머니는 4월이 되면 다시 이생을 방문하신다. 나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던 데모가 정권을 뒤엎을 수 있었던 ‘4·19 혁명’의 정치적 관념과 멀리 있었다. 그저 쫓기는 흑백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이들을 뒤쫓는 경찰들, 희뿌연 최루탄 연기가 기억 속에 멈추어 있을 뿐이다. 범벅의 카오스 가운데 엄마가 있고, 엄마는 엄마의 특수했던 그 날의 동선(動線)과 함께 되돌아온다. 엄마의 동선은 이랬다. ‘4·19 혁명’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 터졌다. 정치인들의 부패를 규탄하는 데모가 혁명 이전부터 거의 매일 광화문을 중심으로 있었는데, 밥상머리에서 주워듣던 신문보도에 의하면 데모는 나날이 격앙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꽤 많은 초, 중고교 캠퍼스가 사대문 안에, 주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큰 조카와 내가 각각 다른 여자 중학교에, 작은 오빠는 근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산재한 학교들과 학생들에게 경계를 이루지 않는 매운 최루탄 연기는 아비규환의 전쟁 아닌 전쟁터를 넓히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로 학생들은 즉시 퇴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으시고 조카의 학교로 향하셨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조카는 자기 엄마와 분가해서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학년이 위였다. 나는 혼자 걸어서 집에 갔다. 그랬던 4월은 내 기억에 회색과 검은색으로 희미하게 채색되어 남아있다. TS 엘리엇(1888-1965)은 ‘황무지’라는 무려 434행으로 구성된 시에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시작한다. 이 부분은 인기가 많다. 시 ‘황무지’는 나에게는 철학 논문 같기도 하다. 그의 개인적 삶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에게는 난해하고 지루한 글이다. 엘리엇도 4월에 전사한 친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시로 쓴 것이었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준다. 어디 4월만 잔인하랴. 어디 죽음만 있으랴. 뮤지컬 ‘캣츠’로 많은 이에게 친근한 엘리엇은 미국 출생이었지만 영국에 귀화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도 재학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영국은 편안한 곳이었나 보다. 시, 희곡, 소설 등 다작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그는 평론가이며 출판가이기도 했다. 그의 시 ‘황무지’의 서두가, 월트 휘트먼과 제프리 차우서의 시와 많이 닮았다는 혹평도 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인도 철학, 로마나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내용으로 짜깁기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4·19 학생운동’ 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안에 있는 모든 학교가 강제로 폐교되었을 때, 나를 뒷 전으로 하셨던 어머니, 쌔~애 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서둘러 조카를 찾아 그 애의 학교로 향하셨던 어머니가 카오스의 광화문 광장 중심에 있는 나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을 리는 없다. 그저 내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10년이 지났던 그때에도 조카의 아버지를 잃어서 생겼던, 아물기를 거절하고 있던 생채기가 세상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어제는 칼라바사스에 있는 킹 질렛 커뮤니티 파크 센터에서 하는 소품 전시회에 들렸다. 소박하고 유명세에 관심이 없는 화가들의 작품은 평화로웠다. 전시 센터에서 P-22의 얼굴이 새겨진 9″x 12″x 0.5″ 크기의 우드버닝(pyrography) 작품을 발견했다. 녀석의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강렬했던 눈빛이 좀 온순하게 표현되기는 했어도,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P-22라는 이름표를 달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도 죽는데, 마음 쓰지 말거라’ 하시던 어머니도 P-22를 아끼실 것 같다. 류 모니카 / 수필가문예 마당 어머니 혁명 어머니 생각 여자 중학교 혁명 이전
2024.04.25. 18:09
“혁명은 다 익어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체 게바라·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한마디 혁명 사과 아르헨티나 출신
2022.06.03. 18:34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9〉 손에 200불 쥐고 유학길 올라 영어 문제 극복하며 아르바이트로 버텨 '땀 흘려 일해야' 대가 삶의 기본 깨달아 군대에서 빨리 제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국은 부패가 만연했고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더 오래 있어 봤자 안 좋은 것만 계속 볼 것 같았다. 당시 군대 의무복무기간은 36개월. 나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의병 제대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대전에 있는 63육군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악성치질. 병원에서는 주말마다 외출증을 끊어주며 나보고 집에 가라고 했다. 주말에 배급되는 내 양식을 빼돌리기 위해 나를 내쫓는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고문관들로 구성된 병원 감사반이 들이닥쳤다. 계획이 틀어졌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만한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급한 대로 치질 수술을 했다. 멀쩡한 생살을 찢고 꿰맨 것이다. 그런데 수술 후 처리를 잘못 했는지, 수술 부위가 감염돼 엄청난 고생을 했다. 10개월 만에 의병 제대를 했다. 치질 수술 부위는 계속 말썽을 일으켰다. 잘 걷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도 한동안 고생했다. 어쨌든 조기 제대를 했다. 미국 유학 시험 준비를 서둘렀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있던 한국외국어학원(FLI)을 찾아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FLI는 한국 정부에서 유학 준비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정식 영어교육기관이었다. 그날도 FLI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에서 경찰이 길을 막았다. 경찰 어깨너머로 사람들 머리가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이기붕을 죽이고 이승만은 물러가라.” 다다다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나도 겁에 질렸다. 몸을 웅크리고 뛰었다.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선거도 부정으로 얼룩졌다. 정권연장에 눈먼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저질러 학생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그날 내가 맞닥뜨린 것이 4·19 혁명이었다. 유학 시험은 국사 과목에서 한차례 낙방했다. 석 달 만에 다시 치러 합격했다.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이승만 정부가 물러났다. 허정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호적초본을 떼는 데도 양담배 한 통을 건네줘야 했다. 국방부에 출국증을 받으러 가니 담당 직원은 양복 한 벌을 요구했다. 모든 수속을 끝냈다. 미국에 가져갈 수 있는 한도액 200달러를 손에 쥐고 1961년 1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하얗게 얼어붙은 김포벌판을 날아오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웅 나오셨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채피 대학이 있는 LA 인근 업랜드(Upland) 시에 방을 얻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 같은 도시였다. 미국에 도착하니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문제였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외국어학원에서 도대체 무얼 배운 것인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1961년 당시만 해도 남가주에는 아시안이 적었던 시절이다. 나는 세계 최빈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한 단어는 “파던(pardon: 뭐라고요)?”이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서머타임을 몰라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 기다린 적도 있다. 친척도, 친구도, 돈도 없었다. 아파도 혼자였다. 미국 교회를 가려 해도 여의치 않았다. 잘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일요일에도 일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할 때였다. ‘내가 미쳤다고 왜 이 타지에 왔지?’ 미국에 온 지 2주도 안 돼 가난과 부패에 찌든 한국이 너무도 그리웠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뿐이었다.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주님, 제 옆에 바짝 붙어 지켜 주세요. 저 혼자서는 이 고난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말 자동차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자동차 살 돈이 없었던 나는 중고 오토바이 한 대를 샀다. 그걸 타고 동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해 생활비를 벌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오토바이 운전 실력도 늘었다. 어느 날, 철길 근처에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순간 오토바이가 ‘붕’하고 높이 떠올랐다. ‘아, 기분 좋다’하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오토바이에서 튕겨 나갔다. ‘쿵’하고 오토바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사고가 난 지 이틀이 지났다고 했다. 정신을 잃었을 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원실을 나가려 하자 병원 관계자들이 들이닥쳤다. 병원비를 정산하라고 했다. 200달러 들고 와 방을 얻고 오토바이를 샀으니 무슨 돈이 남아 있겠는가. 들어놓은 보험도 하나 없었다.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병원 관계자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란 점을 고려해 병원비의 4분의 1만 받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받아갔다. 명동 암달러상한테 바꿔온 돈 200달러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일푼이 된 나는 방값이며 밥값을 버는 게 급선무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지만, 새벽이면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일어났다. 병원 청소도 했다. 업랜드에 있는 샌안토니오 병원의 더러운 마룻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고 피고름 묻은 거즈가 가득한 쓰레기통을 치웠다. 서울이었다면 코를 틀어막고 도망갈 일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각이 바뀌니 못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에서 누구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훗날 나는 샌안토니오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 병원에서 지역구 연방하원의원을 초청했다. 병원의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저는 이 병원을 잘 압니다. 매일 밤 제가 청소하던 곳이니까요.” 사람들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농담이 아닙니다. 30년 전 저는 이 병원의 청소부였습니다. 마룻바닥 닦는 일을 제일 많이 했지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손뼉 치며 환호했다. 미국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학교 수업도 따라가기 힘든데 아르바이트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영어도 못하고 주머니에 돈도 없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서울에서는 돈과 ‘백’에 의지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햄버거 하나를 먹어도 내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만 먹을 수 있었다. ‘1+1=2’라는 삶의 기본을 깨달아가는 날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도 정작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버지 힘을 빌려 손쉽게 모든 일을 해결했다. 미국에서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해진 이유. 그것은 나의 힘으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미국 혁명 병원 감사반 중고 오토바이 부정선거 책임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05.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