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하늘은 우주의 근원으로서 지혜, 공정, 덕의 궁극적 원리로 여겨진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 속에는 대중이 하늘과 같이 지혜롭고, 공정하고, 덕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반면, 중우(衆愚)정치라는 말도 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고, 장기적 공익보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대중의 모습에 기초한 단어이다. 현실에서 보여 지는 대중의 모습은 하늘과 중우, 어느 쪽에 가까울까. 대중은 합리적이고 공익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운 한계들을 갖고 있다. 우선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고급 정보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고, 왜곡된 정보를 접할 가능성도 크다. 둘째, 경제, 과학 같은 전문 지식이 필요한 사안을 판단할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대중이 각 분야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공통된 제언으로 강좌를 마무리하는 이유이다. 셋째,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객관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두려움, 분노, 혐오, 탐욕 등 감정이 판단을 흐리고 인종, 종교, 이념, 지역감정 같은 선입견이 사실보다 우선한다. 이는 집착이 지혜를 가린다는 불가의 견해일 뿐 아니라 실험에 의해 입증된 현대 인지과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넷째, 전체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이다. 장기적, 공익적 판단보다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이익을 선택하는 경향이 크다. 즉 ‘지금 당장 나에게 유리한가’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지혜롭고 정의로운 존재로 과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동양의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이다.),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나 현대의 집단지성(Wisdom of the Crowd) 등 사상적 근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하다. ‘모두가 부처’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괴팍한 직상 상사나 사고뭉치인 막내아들까지는 봐줄만 하다. 뉴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억대 사기범들과 연쇄 살인마에 이르면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는 두 가지 모습으로 구분한다. ‘부분적 부처’와 ‘완전한 부처’. 원래는 모두 부처이지만, 100% 발현되지 않은 사람을 부분적 부처, 100% 발현된 사람을 완전한 부처라고 표현한다. 누구든지 마음이 맑고 지혜로울 때는 완전한 부처인 것이고, 마음이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가려 있을 때는 부분적 부처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라는 말은 현실 모습 자체가 아닌 수행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목표 혹은 누구나 완전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봐야 한다. 대중은 지혜롭고 정의롭기도 하지만, 한 없이 어리석은 존재이기도 한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현실의 모습이 그렇다기보다는 교육과 수행을 통해 달성 될 수 있는 목표 혹은 누구나 천심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민심이 천심’의 본의와 한계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지지가 절대적인 현대민주주의에서 정치인들의 이익에 의해 대중은 계속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들에게 휘둘리는 중우(衆愚·어리석은 대중)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민심 천심 장기적 공익적 부분적 부처 현대 민주주의
2025.08.18. 17:38
중국 시진핑 3기 지도부 교체 기간, 서구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도 새 지도자 선출 중이었다. 44일 만에 단명한 리즈 트러스 총리의 후임자를 뽑는 작업은 초스피드로 이뤄졌다. 집권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 의원내각제에서 핵심은 당 대표를 어떻게 뽑느냐다. 리더십 공백 혼란을 줄이기 위해 불가피했다지만, 임의로 바뀐 경선 룰에 따라 단독 출마한 리시 수낵은 후보 등록만으로 총리가 됐다. 벌써부터 영국에선 조기 총선을 실시하란 요구가 빗발친다. 그랬다간 노동당에 다수석을 잃을 위기의 보수당은 못 들은 척 “단결해서 국난 극복”만 외치고 있다. 영국은 브렉시트 파동 속에 2015년 5월 이후 7년새 총리가 5번째(데이비드 캐머런→테리사 메이→보리스 존슨→트러스→수낵)다. ‘감세안 후폭풍’ 위기가 다급했다곤 해도, 수낵이 지난 9월 트러스와 경선에서 당원들의 표심을 얻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트러스 시절 핵심 장관을 대거 유임한 것도 좋게 보면 ‘빅텐트’ 탕평 내각이고 달리 보면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총리직만 물러났을 뿐 존슨도, 메이도, 트러스도 모두 현역 의원으로 건재하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치란 이미 엘리트들에게 접수됐고, 진짜 민의는 대변되지 않고 있다는 의구심이 나올 만하다. 이를 당분간 잊게 한 게 시진핑의 3연임 대관식이었다. 입장 순서가 서열 순서이고, 공개된 대회장에서 만장일치로 당헌 변경을 추인하는 중국식 ‘권력의 극장’은 21세기에 걸맞지 않게 그로테스크했다. 무엇보다 1인자의 눈짓에 끌려가듯 퇴장당한 후진타오 전 주석의 모습은 상징적이었다.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의 새로운 장을 쓰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실현”하자는 시 주석의 3연임 일성은 최소 5년간 중국이 일사불란하리란걸 예고했다. “우리(서구 민주진영)에겐 문제가 많고 지도자들도 흠결투성이다. 사회 경쟁력도 많이 쇠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는 지난 18일 이렇게 고백했다. 흔들리는 서구의 대의정치, 확산하는 포퓰리즘을 보면 기우도 아니다. 하지만 신랄한 풍자 칼럼 제목은 ‘땡큐, 시진핑’. 시 주석의 지난 10년간 반대파 숙청과 1인 통치 강화 과정을 조목조목 짚으며 그가 자유세계와 반자유세계의 경쟁에서 무의식적으로 전자의 주장을 돕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질문했다. “이런 중국에 하루라도 살고 싶은가.” 시장이 먼저 답했다. 절대 안정을 선언한 중국에서 투자금이 빠지는 ‘차이나 런’ 동안, 42세 초짜 총리가 맡은 영국 국채 금리는 안정세로 돌아섰다. 강혜란 / 국제팀장J네트워크 중국 영국 리즈 트러스 현대 민주주의 트러스 시절
2022.10.26. 18:32
‘민주냐 전제(專制)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시진핑 주석을 때리고 싶을 때마다 쓰는 말이다. 지난 2월 바이든 대통령은 시 주석을 향해 “민주주의적인 구석이라곤 전혀 없다”고 말했다. 4월엔 미·중 관계의 핵심을 “민주주의와 전제정치의 문제”라고 정리하더니 12월 9~10일엔 108개 국가를 초청해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세계적인 반중국 블록 구성에 나서는 것이다. 시 주석이 가만있을 리 없다. ‘중국식 민주’를 내세워 더는 서방이 ‘민주’를 갖고 중국 때리기에 나서지 못하게 맞불을 놓고 있다. 시 주석은 우선 ‘서구 민주’를 공격한다. “민주는 소수 국가의 특허가 아니다”라며 “인민이 투표할 때만 관심을 받고 선거 후 냉대를 받는다면 이런 민주는 진정한 민주가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또 “선거 과정에서 어떤 승낙을 받는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런 승낙이 얼마나 실현되느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중국식 민주’를 내 세운다. 시 주석의 말을 들어 보면 중국식 민주주의 형식은 ‘인민대표대회’, 내용은 ‘전과정인민민주’다. 시 주석은 인민대표대회 제도가 “중국의 국정과 실제에 부합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실현을 보장하는 좋은 제도로서 인류의 정치제도 역사에 있어 위대한 창조”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2019년 11월 자신이 처음 제기한 ‘전과정인민민주’를 강조한다. 전과정인민민주는 서방 민주와 다른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 첫 번째, 서방의 민주가 서로 다른 이익집단 간의 다툼에 불과한데 전과정인민민주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변한다. 두 번째, 서방 민주는 민주를 ‘경쟁성 선거’로만 이해하지만 전과정인민민주는 선거에서 감독까지 모든 걸 포함한다. 현대 민주주의가 여러 문제점을 내포한 건 맞다. 보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중국식 민주’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이 하는 말과 현실이 다르다. 미국으로 망명한 중국의 한 인권 운동가는 시 주석의 말을 “중국에도 민주가 있다고 그저 우기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운동가는 “인민대표대회 사무실에도 들어갈 수 없는 게 중국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중국에선 '민주’의 토대인 ’언론의 자유’가 없다. 중국 언론은 스스로 자신의 성(姓)을 '당(黨)’이라고 하지 않나. 아무튼 시 주석은 이제 '중국식 민주’의 기치를 올리며 '민주’에 대한 해석권을 놓고 서방과 기나긴 싸움에 돌입한 모양세다. 이 다툼은 인류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당장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초대받은 우리나라는 어떤 자세로 회의에 임할지도 관심이다. 유상철 / 한국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J네트워크 시진핑 민주 민주주의 정상회의 현대 민주주의 민주주의 형식
2021.11.25.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