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학문이 있다. 자고로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학문적 연구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과사전의 설명을 옮기면 ‘삶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을 철학적, 심리학적, 의학적 관점에서 탐구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줄이고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학문’이란다. 단순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묵상함으로써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사랑하고, 더욱 진실하고 밀도 있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한다. 또한, 아름답게 잘 준비된 마무리인 웰다잉(Well-dying)을 목표로, 죽음을 소멸이 아닌 ‘삶의 이동’으로 받아들여,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죽음, 상실, 고별 등과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슬픔, 분노, 외로움 등의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을 탐구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도 연구한다. 그러니까, 죽음학은 품위 있게 사람답게 죽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 모양이다.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인가? 누구나 ‘죽음학’이 꿈꾸는 대로 건강하게 살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추하지 않고 멋있게(?) 죽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완강한 벽과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대표적인 것이 첨단 의료 시스템, 이른바 ‘진료 컨베이어 벨트’ 같은 제도들이다. 나이 들면 여기저기 아프고, 병원 출입이 잦아지고, 검사실 뺑뺑이를 돌다 보면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앞서간 이들의 죽음을 되살펴 보기도 한다. 죽음이 꼭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현대 의료시스템은 내가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죽을 사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 놓는다. 그것을 의학의 의무이자 존재 이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숨을 쉰다고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의학적 사망과 환자가 원하는 죽음이 다르다. 당연한 말이지만, 죽음은 단순히 의학의 문제가 아니다. 철학적, 종교적, 법적, 심리적, 정서적 문제다. 혼자만의 문제도 물론 아니다. 존엄사, 안락사, 굶어죽기(단식 존엄사), 집에서 죽기 등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모양이지만, 아직은 완고하다. 환자 스스로가 언제 어떻게 죽겠다고 선택할 수 없다. 병원에서 환자는 어디까지나 ‘을’의 신분이다. 절간에 간 새색시 신세다. 죽음의 방식은 그렇다 치고, 뒤처리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마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오늘날 죽음에 관계된 모든 것을 업자들이 결정하고, 우리는 그저 내라는 돈을 내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는 일그러진 구조다. 죽음은 반드시 의사가 확인해야 하고, 장례 절차나 비용 등은 모두가 장의사가 정해놓은 대로 진행된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슬픈 듯 아닌 듯한 표정, 피곤함에 지친 자세로 늘어선 화환들, 관에 누운 이를 한껏 치켜세우는 미사여구들…. 그런 형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한평생을 너무나도 고분고분 체제에 순응하며 길들여진 비겁한 모범생으로 살았으니, 끝마무리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 나이 들수록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자주 느낀다. 하늘을 온통 검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볼 때,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 같은 음악을 들을 때…. 죽음에 대해서 관념적인 일반론을 이야기할 때는 잔뜩 멋을 부려가며 그럴듯하게 말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게 마련이다. 나약한 인간이니 어쩔 수 없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을 순순히 믿고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참 어렵다. 요즘 내가 읽는 책의 제목은 ‘나는 나답게 죽기로 했습니다’이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죽음 성찰 오늘날 죽음 학문적 연구 현대 의료시스템
2026.05.21.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