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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발전, 현대사와 함께 한 100년

2026 북중미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의 역사를 되짚는 일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월드컵이 어떻게 인류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로 성장했는지를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1930년 열린 첫 월드컵부터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축구는 전쟁과 냉전, 혁명과 민주화, 기술 혁신, 그리고 수많은 스타들의 등장 속에서 함께 진화해왔다. 한국 축구 역시 이 흐름 속에서 도전과 성취를 반복하며 세계 축구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한 첫 월드컵은 1930년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당시 유럽은 대서양 횡단에 필요한 비용 부담으로 인해 많은 팀이 출전을 포기했고, 결국 13개국만이 참가했다. 우루과이는 초대 챔피언에 올랐고, 월드컵이라는 ‘거대한 실험’은 성공적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1934년 이탈리아, 1938년 프랑스 대회를 끝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월드컵은 12년 동안 중단됐다. 축구 발전의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지만, 전쟁 이후 월드컵은 새로운 국제 질서의 형성과 함께 더 큰 폭발력을 얻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은 ‘마라카낭의 비극(Maracanazo)’이라 불리는 충격적인 결승전으로 유명하다.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결승전에서 브라질이 예상과 달리 1-2 역전패를 당한 것이다. 브라질 축구사의 최대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러나 브라질은 이후 펠레라는 천재의 등장과 함께 1958·1962·1970년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축구의 황금기를 열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컬러 TV 중계가 본격화된 첫 대회였다. 월드컵의 생생한 장면이 전 세계 가정으로 전달되면서 ‘지구촌 라이브 이벤트’라는 개념이 확립됐다.   1974년 서독 대회는 ‘토털 사커(Total Soccer)’가 세계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순간으로 평가된다.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는 공간 활용과 포지션 유동성을 극대화한 혁신적인 축구를 선보였고, 이는 현대 전술의 기초가 됐다.   1986년 멕시코 대회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시간이었다. 잉글랜드전에서 나온 ‘신의 손’ 골과 ‘5인 돌파’ 골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되면서도, 상징적 장면으로 꼽힌다. 마라도나는 개인 능력 하나로 한 팀을 정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현대 축구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조직적인 수비, 압박, 체계적 전술 운영이 강화되며 ‘전술의 시대’가 열렸다. 득점은 감소했지만 경기 운영과 전술의 중요성은 이전보다 훨씬 강조됐다.   이 시기 월드컵은 경기 스타일, 스타 플레이어, 방송 기술 등 모든 측면에서 현대 스포츠의 표준을 완성한 시대로 평가된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월드컵 세계화’의 분기점이 됐다. 평균 관중 6만 명, 총 관중 356만 명이라는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스폰서십, 방송권료, 글로벌 마케팅이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 2002년 월드컵은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이었다. HD 디지털 중계, 국제 심판 시스템 개선 등 다양한 변화가 이 대회를 통해 도입됐다. 한국 대표팀은 비유럽·비남미 국가 최초로 4강에 진출하며 월드컵 역사의 흐름을 새롭게 썼다.   2010년 남아공 대회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열린 첫 월드컵이었다. 이후 골라인 기술(GLT), 비디오판독(VAR), 반자동 오프사이드 기술(SAOT) 등 첨단 시스템이 본격 도입되며 경기 공정성과 기술적 정밀성이 강화됐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중동 최초 개최이자 ‘겨울 월드컵’으로 기록됐다. 약 2200억 달러가 투입되며 사상 최대 규모의 월드컵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썼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은 48개국 체제로 확대되는 첫 대회다. 도시와 국가, 선수와 팬, 그리고 전 세계 스포츠 산업은 또 한 번 거대한 변화를 맞게 된다. 월드컵의 100년 역사는 이제 또 하나의 새 장을 앞두고 있다.   장열 기자현대사 혁신 브라질 월드컵 카타르 월드컵 북중미 월드컵

2025.12.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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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년 산책] 격동의 한국 현대사, 왜 내 꿈에 미리 나타났을까

나는 비교적 꿈을 많이 꾸는 셈이다. 생리적 반응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꿈.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꿈은 인간의 잠재의식이 시간제한을 받지 않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는 삶의 격동기를 치르면서 어떤 영감(靈感)으로서의 꿈도 경험해 온 것 같다. 25세 때, 해방과 더불어 15~16년 동안은 더욱 그랬다.   1945년 8월 14일 밤, 아무런 생각이나 소원도 없이 잠들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진남포로 갔다. 넓은 바닷가에 중학생 때부터 나를 키워준 마우리(E M Mowry) 선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는 엄청나게 큰 널판자로 지은 창고 두 개가 있었다. 목사님은 나를 이끌고 그 창고로 가 문을 열었다. 높은 창고 꼭대기까지 일본인 시신이 가득 차 있었다. 바닷물 때문이었을까. 시신은 모두 부풀어져 있었다. 놀라서 문을 닫고 다음 창고로 갔다. 그 창고 안에도 일본인의 시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살펴보니까 대학 동창들의 시신도 끼어 있었다. 깜짝 놀란 우리는 창고 밖으로 나왔다. 온 세상이 조용했고 집들과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역사의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꿈이었다. 다시 잠들었다.   동쪽 산 너머로 진 붉은 태양   새벽꿈이다. 역사의 저녁 같았다. 나는 한없이 넓은 들 한 모퉁이에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뒤따라 밭을 갈고 있었다. 큰 쟁반같이 붉은 태양이 서쪽이 아닌 동쪽 산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저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올 텐데, 한없이 넓은 이 땅을 어떻게 다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이 정지된 듯싶었다.   아침에 부친에게 꿈 얘기를 했다. 생각에 잠겼던 부친이 “내가 네 나이였을 때 꿈이었다. 동쪽 산 위로 무수히 많은 작은 태양이 떠올라 온 세상에 가득 차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일본의 일장기가 세상을 가득히 메웠는데…. 혹시 무슨 소식이 있을지 모르겠다. 평양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날 낮 12시, 일본 천황의 방송이 전해졌다.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하고, 전쟁은 끝난다”는 선포였다. 우리 민족에는 새 역사가 시작되었고, 나는 교육계에서 밭을 갈기 위해 긴 인생길을 출발하게 되었다.   1950년 정월 초하룻날, 새벽의 꿈이다. 어떤 소리의 예감에 놀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내가 들은 소리는 수없이 많은 군인이 중무장하고 넓은 길 남쪽으로 행진하는 발소리였다. 북쪽을 바라보았다. 군대 행렬이 한없이 길었다. 멀리 그 배후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나타나 보였는데, 소련의 스탈린 사진이었다. 나는 놀라서, ‘공산군’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군대의 모습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체격과 군복이었다. 컴컴한 새벽 시간이었다.   6개월 후에 6·25가 발발했다. 그해 봄부터 북에서는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군사행동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고당 조만식을 남으로 보낼 테니까,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공산당 지도자 이주하·김삼룡과 교환하자는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군사력과 무기 종류 등을 점검했고, 평화를 가장한 인적 교환을 제안했다. 그리고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했다. 나는 정초 새벽꿈이 연상되었기 때문에 26일 월요일에 봉직하던 중앙중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심형필 교장을 찾았다. 이번 군사행동은 틀림없는 전쟁이니까 학교에서 은행에 맡겨둔 적금을 찾아 3개월씩의 봉급을 선불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어차피 공산군에게 빼앗길 돈이기 때문이다.   심 교장은 생각에 잠겼다가 교주인 인촌(김성수)께서 허락해주실지 걱정했다. 나는 선불해 주었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심 교장의 얘기를 들은 인촌은 사리판단이 넓은 분이었다. 그렇게 중앙학교 교직원은 어려운 3개월을 편히 지낼 수 있었다. 3개월 후 서울이 탈환되었으니까. 나도 아내와 세 어린 것들을 서울에 남겨두고 부산까지 피난 갈 수 있었다.   1960년 4월 10일 밤, 꿈이었다. 한밤이었다. 그러나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빛은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혼자 서울시청 앞에서 광화문 네거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차량도 인적도 없고 시간과 역사도 만물과 함께 정지되어 있었다. 광화문 네거리 앞에 도달했을 때 충격적인 장면이 보였다. 네거리 한가운데 직사각형으로 땅이 패었고, 그 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십자가 모습 그대로 누워져 있었다. 가시관도 그대로였는데 순백의 시신 옆구리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는 듯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마산 앞바다서 발견된 김주열군 시신   다음날 11일에는 마산 고등학생들이 두 번째로 이승만 정권의 부정투표에 항의하는 데모가 일어났다. 첫 번 데모 때, 최루탄이 눈에 박혀 죽은 김주열군을 경찰이 바다에 버렸는데, 그 시신이 발견되면서 재발한 데모였다. 대구의 중고등학생들도 뒤를 이어 항의 데모에 동참했다. 4월 18일 저녁에는 고려대생들이 당시 국회의사당이었던 현 시의회 앞까지 행진했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자유당이 조종하는 깡패들에게 폭력습격을 받았다. 그 소식에 접한 서울 시내 모든 중고등학교와 대학생들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4월 19일 데모가 전 서울 시내를 휩쓸게 되었다. 나는 연세대생들과 데모대에 동참하면서 보호 감독하는 일원이 되었다. 데모는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경무대 앞에서부터 발포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역 앞에서도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졌다. 부상당한 학생들은 병원으로 실려 가고, 선량한 학생들은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학생 218명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5일에는 교수들과 시민들까지 데모에 가담했고 27일에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막을 내렸다. 나는 지금도 4·19묘역에 가면 그 당시의 아픈 마음을 생생히 떠올리곤 한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일본 현대사 김주열군 시신 항의 데모 마산 고등학생들

2022.10.1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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