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아닌 악이 웃다…권선징악의 해체
데이비드 핀처는 현대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스탠리 큐브릭처럼 냉철한 통제와 기술적 완벽성을 중시한다. 어두운 세계관과 차가운 현실감을 바탕으로 한 90년대 디지털 시대 네오느아르의 대표적 감독으로 평가받는 영화의 장인이다. 마돈나의 ‘익스프레스 유어셀프(Express Yourself)’ 등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하던 그는 1992년 ‘에일리언 3’로 데뷔하지만 혹평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1995년 개봉한 차기작 ‘세븐’은 명성과 함께 그만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계기를 가져다 준다. ‘세븐’은 세상은 불합리하고, 인간은 나약하며, 정의는 언제나 지연된다는 핀처 특유의 세계관을 세상에 알리며 이후 ‘파이트 클럽’,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올드보이’ 같은 영화들이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은퇴를 앞둔 노련한 형사 서머싯(모건 프리먼)은 도시의 타락과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새로 전근 온 젊고 혈기왕성한 형사 데이비드 밀스(브래드 피트)가 그의 파트너로 배정된다. 성격이 정반대인 두 형사는 첫 사건부터 충돌한다. 비만 남성이 강제로 음식을 먹다 죽은 현장이 발견된다. 서머싯은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직감한다. 이어 부유한 변호사가 잔혹하게 살해된다. 현장에는 ‘그리드(GREED)’라는 단어가 피로 쓰여 있다. 체계적인 연쇄살인 의도가 보인다. 서머싯은 범인이 기독교의 7대 죄악을 따라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고 추정한다. 이후 서머싯의 예상대로 연쇄살인 사건은 ‘나태(Sloth)’, ‘색욕(Lust)’, ‘교만(Pride)’의 순서로 이어진다. 1년 동안 고문받으며 살아온 마약 중독자가 발견된다. 시체처럼 보였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어 모두가 충격에 빠진다. 나태한 자의 최후! 나이트클럽에서는 남성에게 칼날이 달린 성기구를 착용시켜 여성에게 끔찍한 짓을 하도록 강요한다. 색욕에 해당하는 범죄다. 미모의 여성의 얼굴을 훼손한 뒤 죽거나 추하게 살거나 둘 중 선택하게 해 자살로 몰아간다. 서머싯과 밀스가 도서관 기록, 수사망 등을 좁혀가며 범인 추적을 이어가는 중 범인이 먼저 경찰서에 스스로 피투성이가 된 채 자수한다. 신원 확인이 안되는 그는 존 도우(케빈 스테이시)로 불린다. 서머싯이 예견한 대로 그는 기독교의 7대 죄악 중 탐식, 탐욕, 나태, 색욕, 교만, 시기, 분노 등에 해당하는 5개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그리고 마지막 두 죄악이 아직 남아 있으며 수갑에 채워진 채 이를 실행하겠다고 선언한다. 두 형사는 점점 그의 치밀한 계획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존 도우는 두 형사를 시 외곽으로 데리고 간다. 이동 중에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들을 “세상의 타락을 고발하기 위한 사명”이라고 설명한다. 그곳에 택배 트럭이 도착한다. 서머싯이 배달된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밀스의 아내 트레이시(기네스 펠트로)의 머리가 들어 있다. 서머싯은 그의 광기에 경악하고 밀스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다. 존 도우는 자신이 밀스의 행복한 가정을 시기(Envy)해 트레이시를 살해했다고 고백한다. 이제 밀스가 분노(Wrath)로 자신을 죽이면 7개의 죄악이 완성된다며 자신을 쏘아 줄 것을 종용한다. 서머싯은 필사적으로 “총을 쏘지 말라”고 말리지만, 밀스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존 도우를 현장에서 쏘아 죽인다. 이로써 7대 죄악이 완벽하게 완성된다. 서머싯은 사건을 막지 못한 무력감에 휩싸이고 밀스는 체포된다. 영화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세계, 악이 치밀하고도 완벽하게 승리하는 비극적 구조 위에서 진행된다. 범죄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철학적 영역으로 관점을 확장한다. 존 도우는 단순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사회에 부조리를 고발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존재로 등장한다. 세상의 죄악을 고발하는 일종의 종교적 테러리스트처럼. ‘세븐’은 네오느아르와 스릴러 장르를 재정의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도덕적 회색지대와 패배감이 주된 기조를 이루던 50년대의 느와르는 ‘세븐’을 계기로 90년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느와르로 전환한다. 밝음보다는 어둠, 해답보다는 절망으로 끝나는 결말을 통해 할리우드의 전통적 영화 개념인 권선징악이 해체된다. 그리고 이후 포스트모던 범죄 스릴러의 대표작들인 ‘메멘토’, ‘조디악’ 같은 영화들이 그 흐름을 이어간다. ‘세븐’은 영화 외 드라마와 게임 전반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브래드 피트는 ‘레전드 오브 폴’, ‘인터뷰 위드 뱀파이어’ 등의 작품으로 이미 스타의 위치에 있었지만, ‘세븐’은 그에게 잘생긴 스타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거칠고 불완전한 캐릭터 데이비드 밀스 역할로 ‘연기하는 배우’로서 변신에 성공한다. 브래드 피트의 데이비드 밀스 역은 순진한 정의감을 가진 신참 형사가 어떻게 악의 교묘한 설계 때문에 무너지는지 보여주는 비극적 인물이며, 동시에 피트를 할리우드 대표적 배우로 각인시키는 역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 서머싯 형사에게 “박스 안에 뭐가 있어!”라고 물으며 감정이 폭발하는 연기는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세븐’은 또한 케빈 스페이시라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던 배우가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는 계기를 가져다 준 영화였다. 핀처 감독은 이 영화에 스테이시를 ‘전략적’으로 캐스팅했다. 그는 이미 같은 해 개봉한 ‘유주얼 서스펙트’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세븐’에서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채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이는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의 충격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내기 위함이었다. 핀처 감독의 의도대로 스페이시의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영화 전체를 장악해 버리는 효과를 내기에 충분했다. ‘세븐’과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스테이시가 연기한 캐릭터는 차가운 지성형 악역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스테이시는 ‘LA 컨피덴셜’(1997), ‘아메리칸 뷰티’(1999)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할리우드 최고 배우 반열에 오른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권선징악 해체 형사 서머싯 형사 데이비드 이후 서머싯
2025.09.10. 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