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유명한 러시아 작가 푸시킨은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건의 시간적 배경은 1837년 1월 27일 오후 4시, 공간적 배경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의 초르나야였다. 여기서 푸시킨은 당테스라는 프랑스 장교와 결투를 벌였다. 당테스가 푸시킨의 아내와 자기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을 퍼트리자 화가 난 푸시킨이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결투는 푸시킨의 패배로 끝났다. 평생 글이나 쓰던 백면서생이 군인에게 대들었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푸시킨은 결투 중에 상대편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어이없는 죽음이 또 있을까. 러시아가 자랑하는 위대한 작가가 겨우 이런 일로 목숨을 잃다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푸시킨이 세상을 떠나기 9년 전에 이미 소설을 통해 자기와 똑같은 최후를 맞은 인물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문제의 소설은 『예프게니 오네긴』이다. 여기에 렌스키라는 시인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푸시킨처럼 애정 문제로 결투를 벌이다가 친구의 총에 맞아 죽는다. 푸시킨은 소설에서 렌스키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를 읊게 한다. 레테강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젊은 시인의 마지막 독백이다. ‘오! 어디로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내 젊음의 황금 같은 날들이여./ 다가오는 내일은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 두었는가. 헛되이 그것을 바라볼 뿐 모든 것이 어둠 속에 가려져 있구나./ 그러나 상관없는 일 운명이 가는 길은 항상 옳은 것이니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어도 모든 것은 예정된 시간에 따라 움직이거늘.’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이 소설을 가지고 오페라를 만들었다. 소설에서처럼 오페라에서도 렌스키는 생의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 푸시킨의 주옥같은 시어를 담은 선율이 가슴을 울리는데, 그 울림이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황금 러시아 작곡가 시간적 배경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2023.10.06. 19:27
‘Dawn of the Belle Epoque’가 원제인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를 읽었다. 오늘날 세계 예술과 패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는 성지로서의 매력을 가진 파리는 바로 이 벨 에포크 시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파리는 문명의 중심이다. 왕국도 제국도 아닌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인류 전체이다”라고 빅토르 위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 벨 에포크, ‘빛의 도시 파리’를 눈부시게 밝혔던 예술가들의 이야기,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조, 오귀스트 로댕, 클로드 드뷔시, 사라 베르나르 등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재능을 꽃피웠던 수많은 예술가의 이야기를 당시 프랑스 정치와 경제 상황과 곁들여 맛깔스럽게 쓰인 보물과 같은 예술사이다. Mary McAuliffe는 예술사상 가장 다이내믹했던 이 시기(1871~1900), 파리에 모여든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맞춰 그들의 작품활동, 작품세계 그리고 그들의 친분까지 흥미롭게 적어 내려간다. 이 시대의 미술,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등의 예술 분야는 물론이고 건축, 사업, 정치의 주요 인물들과 사회적 이슈까지 논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세계 수도로서 파리, 역사 속의 파리로 타임캡슐을 타고 다녀온 듯한 감동에 젖어 한동안 행복했다. 프랑스는 그 당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난 후 국민의 사기가 침체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며 유혈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파리시민들은 파리코뮌(1871, 3.28~5.28)이라는 사회주의 자치정부를 세운다. 이는 세계 최초의 민주적이며 혁명적인 자치정부였고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긴 정부이다. 비록 존속 기간이 2개월밖에 안 되지만, 이들의 활동은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유혈 상태를 맞고 무참히 짓밟힌다. 그 후 왕정파와 공화파의 적대감은 커가고 공화국과 교회 간에도 그에 못지않은 적대감이 계속된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불안으로 파생된 온갖 문제와 결핍은 오히려 이 시대를 강하게 꾸려나가는 역동적인 힘이 되었다. 그 당시 졸라는 ‘목로주점’(1877)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민중의 참된 냄새를 지닌 보통 사람들에 관한 최초의 소설을 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처럼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가 있다.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1831), 레미제라블(1862)은 파리의 자존심이다. 프랑스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서 있던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시대가 가고 에밀 졸라의 시대가 온다. 베르트 모리조는 인상 주위 화풍의 개척자이다. 그 후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는 인상파 화가들로 기성 화단의 무시와 조롱을 받아 가면서도 착실하고 꾸준하게 그들의 입지를 굳혀나간다. 천재 조각가 로댕이 1877년에 ‘청동시대’를 출품했을 때 이 작품은 찬탄과 의혹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비평가들은 실물의 본을 뜨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조각상을 만들 수 있을지 의아해했다. 심지어는 시체로부터 본을 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로댕은 그의 예술적 정직성과 작품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어 생동감을 주고자 하는 그의 깊은 고뇌에 상처받기도 했다. 그 후 로댕은 지옥의 문, 키스, 영원한 봄 등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며 에펠은 에펠탑, 자유 여신상을 제작했다. 졸라는 1895년에 프랑스 사회를 둘로 나눈 드레퓌스 사건에서 부당하게 스파이로 몰린 유대인 군인 드레퓌스 대위를 위해 ‘나는 고발한다’를 쓰는 등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운다. 이 소설은 1945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그 시대를 살고 간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들은 서로 교류하고 공감하고 동지애를 아낌없이 나누며 서로 돕고 살다 간 아름다운 영혼들이어서 황금보다 빛났던 아름다운 시대를 꽃피울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황금 사회주의 자치정부 작품활동 작품세계 사회주의 정책
2023.03.24.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