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최신기사

[취재수첩] 멈춰선 70년…미네소타 가는 곳마다 한국전 사연

19일 오후 3시, 출장 일정을 끝내고 미네소타를 떠나기 전이다. 잠시 미니애폴리스 다운타운에 들려 5가 인근의 밥 딜런 벽화 앞에 섰다. 미네소타는 밥 딜런이 나고 자란 곳이다. 그는 평화를 노래했다. 흥얼거림은 인식으로 스민다.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은 음률을 입은 그의 가사를 좀 더 음미하며 들었을 거다. 그래서일까. 조지 플로이드가 짓눌렸던 그 자리에는 지금 평화의 생기가 움튼다. 미네소타주는 애칭이 있다. '미네소타 나이스(Minnesota Nice)’. 이곳의 기운이 묻어나는 별칭이다. 미네소타에서 나눈 여담을 잠시 적는다. 이곳의 겨울은 미국 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춥다. 북유럽 이민자가 많은 이유다. 이곳 사람들은 혹한을 이타심으로 이겨낸다. 미네소타에서 45년째 산 한현숙(전 미네소타아동복지회)씨는 “한 예로 한겨울에 차가 멈춰버리면 너무 춥기 때문에 정말로 위험한 곳이 여기”라며 “그래서 차가 멈추면 너도나도 와서 도와주는 게 미네소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네소타의 혹한은 한국과 인연으로 닿았다. 한국전쟁 당시 추위에 익숙한 병사가 필요했던 탓에 미네소타의 병사들이 대거 차출됐다. 정전협정 뒤에도 미네소타와 한국의 인연은 계속됐다.한인 입양아도 많다. 미네소타 입양 역사 이면에는 한국전이 있다. 미네소타대학은 서울대학교에 학문과 기술을 전수하는 프로그램(미네소타 프로젝트)을 진행한다. 연간 75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710만 달러)를 투입했다. 취재 도중 그 당시 미국행 비행기 삯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미네소타대학 송창원 박사(88)를 만났다. 방사선 생물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그런 송 박사가 뜬근없이 퀴즈 하나를 냈다. 그는 1세대 국비 유학생(1959년 9월)이다. “장 기자, 내가 유학올 때 비행기표 값이 얼마였을 것 같아요.” 나는 1979년생이다. 맞출 리가 없다. “950달러였어요. 그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이 60달러대였으니 상상이 되십니까.” 미네소타대학이 한국을 돕기 위해 매년 지원한 금액이 어느 정도 규모인가를 가늠해본 대목이다. 이 대학 농과대학 부속 식물원에는 한국산 식물 수십 종이 있다. 한국전 후 미네소타대 교수들이 한국에 나가 가르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것들이다. 미네소타에서 태양광 회사 EVS를 운영하는 김권식 대표는 이곳에 ‘한국의 언덕’ 제작을 추진중이다. 식물원 측과 어느 정도 논의가 오간 상태다. 인연은 여러 면에서 공교롭다. 미네소타는 작가 찰스 슐츠의 고향이다. 그는 미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은 만화 캐릭터 찰리브라운과 스누피를 그려냈다. 한편으로는 ‘찰리 브라운’하면 김시스터스(The Kim Sisters·1953년 결성)다. 한국전 이후 미군 부대에서 인기를 끌다가 1959년 미국에 진출한 원조 케이팝 걸그룹이다. 이들이 부른 찰리 브라운(1962년)은 아직도 미네소타 사람들 기억에 남아있다.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린다. 당사자에게 그때의 기억을 묻는 건 상당히 조심스럽다. 전쟁은 실제다. 악몽을 소환해야 한다. 추상적 질문은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해서다. 질문자와 답변자 사이의 괴리다. 대신 이곳에는 흔적이 많다. 한국과의 접점들이다. 그 자취는 저마다 인연을 담아낸다. 종적을 따라간 건 답을 듣기 위한 과정이었다. 미네소타는 한국전의 ‘사실’을 70년이 흐른 지금도 사연으로 말하고 있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20.06.25. 19:38

썸네일

미네소타 참전 용사들 전쟁 고아까지 품었다

버려진 게 아니다. 인연으로 지켜진 거다. 미네소타주에는 가슴으로 낳은 생명이 많다. 한현숙(83ㆍ사진)씨는 미네소타주 한국 입양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외길만 걸었다. 미네소타아동복지회, 국제사회봉사회 등에서 40년간 해외 입양만 담당했다. 입양의 연분은 슬프게도 전쟁이다. 6·25는 고아를 양산했다. 곳곳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한국전의 또 다른 그늘이었다. 한씨는 “미네소타주의 한인 입양 역사를 보면 미군들이 한국전 참전 후 이곳으로 돌아올 때 한국서 고아를 데리고 오거나 양자를 삼으면서 시작됐다”며 “이후 입양 기관들이 생겨나면서 한국의 아이들이 공식 입양 절차를 밟게 되면서 입양아가 더 많아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미네소타주 참전용사를 돕는 김병문 박사 역시 “참전용사는 물론이고 그 자제들 중에는 아버지로부터 ‘한국전’ 이야기를 듣고 훗날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한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미네소타아동복지회가 한씨를 통해 이곳에 데리고 온 한인 입양아는 무려 1만 명이 넘는다. 한국전 이후 가슴으로 품고 지켜낸 어린 생명들은 그렇게 미네소타로 건너왔다. 한씨는 “미네소타는 한인 사회 구성이 타주와 다르다. 이곳의 한인 입양아는 현재 1만5000여 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한인 이민자보다 더 많다”며 “대부분 아기 때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기 때문에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한인들”이라고 했다. 입양인이 한인 이민자 1.5배 주 공화당 의장도 입양인 센서스국 조사도 진행중 실제 센서스국에 따르면 미네소타 지역 한인은 총 2만995명(2010년 기준)이다. 이중 한국어 사용자는 5678명 뿐이다. 센서스국도 미네소타주 입양인 사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특별히 올해 센서스에서는 입양인 인구 조사도 하고 있다. 정확한 입양 인구를 파악하겠다는 심산이다. 미네소타주의 한인 입양아들은 사회 곳곳에서 활동중이다. 미네소타주 공화당 의장 제니퍼 카나한도 입양아다. 지난 2016년 국적을 회복해 한국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에서 활동한 마리사 브랜트(한국명 박윤정) 역시 미네소타주에서 자란 입양아다. 한때 골수 이식으로 한국에서 관심이 높았던 미 공사생도 성덕 바우만 역시 미네소타주 출신이다. 한씨는 “유명 체인 스토어 ‘타겟(target)’이 미네소타주에서 처음 생겨났는데 그때 창업자(존 제스)도 한인 여자 아이를 입양해 내가 도움을 줬다”며 “한국전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연이 여러모로 많은 곳이 미네소타주”라고 말했다. 피보다 진한 인연이다. 거기엔 가슴으로 낳고 키운 생명들이 있다. ------------------------------------------------------------------------------ 한인 입양아, 왜 미네소타인가 미네소타와 한국은 1950년을 기점으로 각별해졌다. 특히 가장 많은 전쟁 고아를 입양해 돌본 곳으로 기록됐다. 그 흔적을 따라가봤다. “미네소타 입양아들 기록으로” 킴 잭슨 수석 아트 디렉터 킴 잭슨(사진)씨는 현재 ‘미니에폴리스ㆍ세인트폴 매거진’에서 수석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해군에 있을 때 1950년대 초반 한국에서 근무를 했다. 그 인연으로 1973년에 미네소타로 나를 입양했다”고 말했다. 잭슨씨는 미네소타주 한인 입양아들을 한 명씩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비롯됐다. 6년여의 걸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발간(2010년)된 사진집의 제목은 ‘HERE(여기에)’다. 그는 “친구가 사진집의 제목을 ‘THERE(거기에)’로 제안했는데 내가 나고 자란 이곳의 의미를 담아 제목을 ‘HERE’로 달았다”며 “이곳의 입양아를 담아내기엔 책 한 권으로 부족하다. 계속해서 ‘HERE’ 시리즈, 입양아들을 위한 기록을 남기는 일을 기회가 되는대로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잭슨씨는 본업 외에 미네소타주 한인 사회와 입양 가족들을 위한 계간지(Korean Quarterlyㆍ1997년 창간) 편집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지금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한국’에 대한 의미를 물었다. 그는 “내가 돌아갈 수 있고, 나 자신에 대해 아직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잭슨씨는 “한국은 나에게 고향, 조국…동시에 먼 나라,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부분이 많은 문화 등 여러 의미가 떠오른다”며 “그런데 이상할 만큼 상당히 친숙하다. 그 느낌은 역시 내 아이들에게 피를 통해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입양아 돕는 건 내 평생의 일” 미네소타대 쥬디스 에컬리 교수 쥬디스 에컬리(사진)는 미네소타대학 의과대학 부교수다. 소아과 전문의로서 현재 입양 아동 의학 클리닉 디렉터로도 활동중이다. 당시 에컬리 교수의 양아버지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것이 계기가 돼 에컬리를 입양하게 됐다. 그가 생후 5개월 때 일이다. 에컬리 교수는 ‘어머니’가 되고 나서 생모를 좀 더 이해하게 됐다. 그는 “내 딸이 태어나고 몇 달 후 양어머니가 ‘엄마가 되니까 생모 생각이 더 나느냐’고 묻더라”며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 당시 생모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머니가 나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거라고 생각한다.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컬리 교수는 학창 시절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 특히 고등학교 당시 ‘입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나 존슨 박사를 멘토로 만난 게 계기였다. 이후 입양 의학(adoption medicine)을 통해 미네소타주의 또 다른 입양 아동들을 돕는 길을 걷고자 결심했다. 그는 “위탁 양육 아이, 입양아는 물론 어린 시절 부정적 경험 등을 가진 아이, 가족 등을 만나 소아과 의사, 전문 치료사, 심리학자 등이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며 “입양 의학은 소아과 분야에서 작은 부분에 해당하지만 이것은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20.06.24. 20:49

썸네일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아십니까?

한국전 이후 미네소타 대학은 한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서울대에 8년간 교육 원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미네소타 대학 간호대학원 캐서린 덴스포드 학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간호대 관계자들이 서울대에서 온 이귀향 교수에게 간호사 유니폼을 전달하고 있다. 이 교수는 6개월간 이곳에서 간호교육 및 행정을 연구했다. 1957년 2월 한국으로 돌아가 서울대 간호학과 승격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미네소타대는 기록보관소 1번 박스, 7번 폴더에 보관된 이 사진을 본지에 특별히 공개했다. [미네소타 대학 제공]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20.06.23. 20:19

미네소타대학, 전쟁 후 '한국 재건' 이끌었다

미네소타주와 한국의 인연은 '열매’를 맺었다. 미니애폴리스 다운타운에서 서쪽으로 20여 마일 떨어진 차스카 지역에는 미네소타대학교 농과대학 부속 식물원(MLA)이 있다. 그곳에 핀 라일락(lilac)의 공식 이름은 ‘미스 김(Miss Kim)’이다. 미네소타에서 태양광 회사 EVS를 운영하는 김권식 대표(서울대 61학번)는 “한국 전쟁 후 미네소타대학 농대 교수들이 한국에 나가 가르치고 돌아오면서 가져왔다. 이곳에는 한국 식물들이 아주 많다”며 "1950년대 진행됐던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흔적 중 하나”라고 말했다. 휴전 협정 체결 뒤 1년여 만이었다. 미네소타주는 ‘한국(Korea)’과 다시 한번 인연으로 묶인다. 미네소타대학교 기록 보관소에 따르면 당시 미국 정부 산하 국제협력국(ICA)은 미네소타대학과 3년간 계약을 맺었다. 1954년 9월28일이었다. 미네소타대학은 한국 전쟁 후 원조 계획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에 ▶의과 대학 ▶농과 대학 ▶공과 대학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학문과 기술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한다. 일명,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다. 미네소타대학 기록보관소 담당 캐서린 모켄은 “미네소타대학은 첫 계약 당시 연간 75만 달러를 이 프로젝트에 투입했다. 현재 가치로 보면 매해 710만 달러 가량”이라며 “한국에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알고 있지만 원래 이곳에서는 ‘코리안 프로젝트’ 또는 ‘한국 협력 프로젝트(Korean Cooperative Project)’로 불렸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모든 게 황폐화됐다. 원조와 재건이 절실했다. 궁극의 방향은 자립과 발전으로 가야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네소타대학은 서울대학교의 교수, 조교 등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짧게는 3개월, 길게는 4년 간 연수의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미네소타대학이 교육과 숙식을 포함, 모든 비용을 전액 부담했다. 미네소타대학 필립 듀다스 도서관 정보 담당은 “서울대학교에서 이곳으로 오기만 한 게 아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에서는 59명의 교직원을 한국으로 파견했다”며 “전략 개발, 교육 행정 등 각 분야의 체계 정비, 자문, 지원 등을 위해 한국에도 인력을 보냈다. 이후 당초 계약 분야 외에 수의학, 공공 행정학, 예술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로 교류가 확대됐다”고 말했다. 실제 미네소타대학 기록 보관소에는 1957년 1~2월 사이 와이즈먼 미술관(당시 미네소타대 미술관)에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회화, 수묵화, 도자기 등의 작품이 전시됐다는 자료도 남아있다. 캐서린 모켄 기록보관 담당은 “그와 반대로 ‘미네소타 투 코리아(Minnesota to Korea)'라는 주제로 이곳의 작품이 서울대학교에 전시되기도 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의 작품은 경상도, 전라도 등 각 지방에서 순회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만큼 한국과의 교류는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8년간 이어졌다. 1961년까지 총 226명의 서울대 교직원이 미네소타대학을 다녀갔다. 그 중 15명이 박사 학위, 68명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연은 프로젝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미네소타주에 서울대 출신이 아직도 많은 이유다. GES컨설팅 지형범(서울대 77학번) 대표는 “우리 학번에서도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동기가 꽤 있다”고 말했다. 지 대표는 “프로젝트 당시 미네소타대에서 교육받은 이들 대부분이 미국에 남지 않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들은 이후 학문적, 기술적으로 크게 기여했고 한국 발전의 보이지 않는 토대가 됐다”며 "그들이 바로 ‘이름없는 영웅(unsung hero)’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미네소타대학 역시 지난달 15일 미네소타 프로젝트 관련 자료에 대한 디지털화 작업을 최종 마무리했다. 사진, 편지, 서류 등 수년에 걸친 변환 작업이었다. 도움은 씨앗이다. 먼 훗날 가치를 맺는다. 한국의 ‘오늘'이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열매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20.06.23. 19:39

썸네일

"어쩌면 마지막…우린 기억되고 싶다"

기억은 희미하다. 상흔은 선명하다. 그 지점에서 꽃이 폈다. 대가를 치른 자유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미네소타주를 찾아갔다. 미네소타는 인구 대비 6·25 한국전쟁 참전군인 비율이 가장 높은 주다. 그 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곳곳에 묻어난다. 그 흔적과 의미를 시리즈로 게재한다. 적적하다. 잔디의 푸르름이 무색하다. 그곳에 우두커니 선 보병 동상의 뒷모습은 쓸쓸함을 짊어졌다. 코로나19가 ‘6월’을 삼켜서다. 아니 70년 전 한국 전쟁의 기억마저 지우고 있다. 지난 18일 오전 8시,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의 참전 용사 기념공원을 찾아갔다. 김병문 박사(76)는 지난 2004년부터 이 지역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를 초대해 감사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함께 모이지 못한다. 김 박사는 “한국전은 ‘잊힌 전쟁’으로 불린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한국전 관련 70주년 행사들이 전부 취소된 상태”라며 “어쩌면 70주년은 그들(참전용사)에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재향군인회(VA)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한국 전쟁 당시 미네소타주에서만 11만4000명의 군인이 차출됐다. 1950년 당시 주 전체 인구(298만 명)의 약 4%다. 미네소타는 인구 대비 참전군인 비율이 가장 높은 주 중 하나다. 혹한이 미네소타와 한국을 인연으로 이은 탓이다. 미네소타주에서 활동하는 변우진 변호사는 “미국에서 겨울이 가장 추운 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 미네소타”라며 “한국전 당시 개마고원, 압록강 지역의 겨울은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갔다. 혹한 때문에 추위에 익숙한 병사들이 필요해서 미네소타주 출신의 병사가 대거 차출된 것”이라고 전했다. 혹한의 전쟁은 치열하고 절박했다. 미네소타주에서는 육해공군 외에도 방위군(national guard)까지 동원됐다. 미네소타대학에서 은퇴한 잭 존슨 박사(미네소타 군사 박물관 초대 큐레이터)는 “1950년 11월부터 중국의 개입으로 상황이 반전되자 다급했던 미국에서는 전역이 취소되는가 하면 징병이 강화돼 예비군까지 동원됐다”며 “특별히 미네소타에서는 ‘바이킹’으로 불리던 47사단 주 방위군 소속 9000명이 그해 겨울 급히 한국전 차출 명령을 받고 각 부대에 배치돼 싸웠다”고 말했다. 당시 징집된 젊은 병사들은 대개 18~21세였다. 그때의 한국(Korea)은 지금과 엄연히 다르다. 이름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 그들은 생명을 걸어야 했다. 동상 주변은 8개의 화강암 비석이 두르고 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봤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미네소타주 출신 병사들(758명)의 이름이다. 비석에 공백은 많다. 그건 여전히 채워져야 함을 뜻한다. 목숨의 행방은 K·I·A(Killed in Action·전사자)와 M·I·A(Missing in Action·실종자)로 나뉜다. 생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메워야 하는 공란이다. 김 박사는 비석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한동안 침묵했다.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자유를 얻었는데…그 소중함을 오늘날 우리는 잊고 산다. 그들도 잊히고…”라고 울먹였다. 김 박사는 “(미네소타 참전용사 감사 행사에) 이제는 전년도에 참석했던 분이 이듬해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왜 싸웠나’ 자괴감이‘한국 발전’ 보며 보람으로 90세 전후 참전용사들 재작년 한국 방문하기도 70년이 흘렀다. 생존한 참전용사들은 대부분 90세 전후가 됐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촉박하다. 지난 3주 사이 이 지역에서만 제럴드 맷슨(91·5월31일), 로버트 에드워드(88·6월3일), 스텐리젠슨(92·6월9일) 등 3명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세상을 떠났다. 미네소타의 장진호전투협회 중서부 지부도 지난 1월 문을 닫았다. 이곳에 사는 펫 핀(88) 씨는 한국전 당시 해병대 1사단 소속이었다. 최대 혈전이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다. 조심스레 기억을 물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떨렸다. 핀씨는 “한국으로 갈 때가 18살이었다. 당시 원산에 상륙했다. 장진호 전투 때 살아 돌아온 동료는 몇 안 된다. 정말 추웠다. 피로하고 너무나 무서웠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70년 가까이 전쟁의 멍에를 지고 살았다. 비로소 짐을 벗은 건 한국을 방문(2018년)했을 때다. 그는 “한국전쟁, 그리고 우리는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핀씨는 “그때 전장에서 ‘왜 여기(한국)까지 와서 싸워야 하는가’라는 고민과 갈등이 심했다. 돌아와서도 끔찍했던 순간을 잊으려고 노력했다”며 “이후 세월이 흘러 한국을 둘러보며 전장에서 던진 질문에 답을 찾았다. ‘이게 내가 싸운 결과였구나’라는 확신을 그때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혹한 속에 틔운 싹은 오늘의 꽃으로 폈다. 잊으면 안 되는 가치다. -------------------------------------------------------------------------------- 참전 7사단 사단가는 한때 ‘아리랑’ 참전 노병들 한국 사랑 각별 지도상 ‘동해’ 홍보도 앞장 미네소타주 참전용사들의 한국을 향한 마음은 전쟁 후에도 각별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당시 미국 7보병사단은 사단가를 한때‘아리랑’으로 지정(1956년 5월26일)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계속해서 아리랑을 흥얼거려 사단장에 의해 내려진 공식 명령(General Order No 63)이었다. 7사단 소속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제리렐리핀스키(89)씨는 “뉴스에서 나오는 한국 소식은 지금도 다 접하고 있다. 정말로 대단한 나라”라며 “여기서 우리들은 지역 초중고등학교에 가서 한국전 경험에 대해 말해주고 그 의미와 한국이 발전한 모습을 학생들에게 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미네소타주에서 ‘동해(East Sea)’를 적극 홍보한 것도 참전용사들이다. 세인트폴의 참전 용사 기념 공원 입구 바닥에는 한국 지도가 새겨져 있다. 1998년 참전용사 동상 제작 당시 미네소타주 정부가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하자 참전용사들이 분개했다. 한국전 참전용사협회는 즉각 주 정부와 협의 후 석공을 고용, 그 부분에 ‘동해’를 새겨넣었다. 미네소타는 여름이 잠시다. 가을엔 유독 낙엽이 많고, 겨울이 되면 눈이 바닥을 완전히 가린다. 공원 바닥 곳곳에 새겨진 한국전의 각종 기록을 식별하기 어려워진다. 때문에 참전용사들은 사시사철 역사의 기록을 볼 수 있도록 따로 표지판까지 세웠다. 취재를 도운 김병문 박사는 한국 전쟁 당시 8살이었다. 이후 가난으로 인해 학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미군(제임스 반하겐 공군 하사)의 도움으로 학비 보조를 받아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때문에 김 박사 역시 자비로 참전용사들을 돕고 있다. 김 박사는 “참전용사의 후손들을 위해 장학금을 매년 제공(1인당 500달러·총 20명)하고 있다”며 “아버지로부터 ‘한국전’ 이야기를 듣고 이후 아이들을 입양한 참전용사의 자제도 많다”고 말했다.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20.06.22. 20:34

썸네일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