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Goodbye 명사, Hello 동사!
오래전 미정신과협회 간행,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제4판(DSM-4)에 ‘Wha-byung’이라는 진단명이 출현했다. 우리말 ‘화병(火病)’을 소리 그대로 옮긴 말. 한국문화권에서 발생한다는 주석이 붙는다. 그리고 2013년 ‘DSM-5’에서 화병은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된다. 화병은 정신적 고통(distress)과 육체적 증세가 공존하는 증후군. 가슴이 답답하고, 두통, 소화불량, 불안, 우울 같은 증상이 정신질환을 방불케 하지만 정신병명이 아니라는 소견이다. 원인으로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위계질서를 손꼽는다. 대가족 제도에서 일어나는 고부간의 마찰도 빼놓을 수 없을뿐더러 유교적 형식주의에 얽매이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서 온다는 의견도 분분하다. 어제도 오늘도 한국 정치인이 제꺽하면 상대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경우를 본다. 미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한국드라마에서 분노조절 장애라는 말을 듣는다. 상대의 부화를 엄청나게 갈구어 놓은 후 정신장애자 취급을 하는 수법으로 보인다. 자신이 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아랑곳없이 그가 보이는 반응의 강도만을 측정하는 아마추어 정신감정사들이 화를 내는 당사자에게 정신치료를 강력 추천한다. 분노조절 장애는 정신과의 공식적 진단명이 아니다. ‘DSM-5’에 ‘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 간헐적 폭발 장애, 間歇的 暴發障碍’라는 거창한 병명이 있기는 하지만, ‘Anger Control Disorder’라는 병명은 새벽에 일어나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을 생각한다. 호랑이 가죽도 한 사람의 이름도 오직 붙박이 명사(名詞)로 남을 뿐. 형형한 눈빛으로 울창한 숲을 드나들던 호랑이의 잰 발걸음이며 어느 세상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 한 촌부(村夫)의 눈썹 웃음이 우주 한 공간을 흔들던 동사(動詞)는 영원히 부재한다. 정신과 치료에서는 한 사람의 금단 없는 정서적 동작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당신과 나의 정감은 눈 하나 깜짝 않는 부동의 여권 사진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살펴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이 많이 발견되는 부산스러운 동영상이다. 정신과 의사는 외과나 내과처럼 육체적 병명을 상대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표적으로 삼는다. 환자는 의사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일 뿐. 사람의 감성은 죽는 순간까지 역동적(dynamic) 현상이다. 사람은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를 남기기보다 각자각자 특유의 에너지를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남기는 것이다. 환자가 내게 말한다. “나는 불안 장애가 있습니다, I have anxiety disorder.” - 아, 이분도 불안 장애라는 명사에 매달리는구나. 종양이나 충수염처럼 자기의 병을 의사가 처리해주기를 바라는구나. 걱정거리가 많아 잠이 오지 않는 동적(動的)인 마음에 불면증이라는 붙박이 진단명을 급하게 붙여준 후 수면제를 요구하는 것처럼. 직장에서나 또는 친척 간의 갈등이 불화의 씨앗으로 작동하는 화병을 의사에게 거두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이분에게 명사를 버리고 동사를 검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의사(醫師)에 ‘스승 사’가 들어가듯이 ‘doctor’도 라틴어의 ‘가르치다’라는 뜻에서 유래했음을 상기한다. 이 사람이 “나는 왠지 지금 불안합니다.”라고 현재진행형으로 말할 때쯤 그가 과연 무엇이 어떻게 불안한지를 다이나믹하게 파고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goodbye hello 붙박이 명사 정신과 의사 오래전 미정신과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