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오크 글렌의 가을
얼마 전 TV에서 휴얼 하우저(Huell Howser)가 진행한 ‘캘리포니아의 황금(California’s Gold)’이 재방송됐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방영된 가주의 자연, 문화, 역사 탐방 프로그램이다. 시청하던 남편이 난데없이 사과 농장에 가자고 했다. 사과가 요즘 제철이라며, 거기서 애플 도넛과 애플 사이다, 애플 파이를 먹자고 했다. 말투는 마치 소풍을 앞둔 아이 같았다. 우리는 샌버나디노카운티의 오크 글렌(Oak Glen)에 있는 여러 과수원 중, 프로그램에 소개된 사과 과수원으로 향했다. 10월의 가을은 공기부터 달랐다. 상쾌하고, 깊었다. 커다란 빨간 헛간과 길목마다 세워진 컨트리풍의 허수아비 장식이 한 폭의 풍경처럼 정겨웠다. 그곳엔 사과 향과 여유가 넘쳤다. 사과 농장답게 사과나무가 끝없이 줄을 지어서 있었다. ‘따지 마시오(Do not pick the apples)’라는 팻말 때문인지 바닥에 떨어진 사과도 많았다. 테니스공만 한 빨간 사과들이 오전의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매달려 있었다. 애플 도넛을 사기 위해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데, 뒤에 있던 커플이 말을 걸어왔다. 여자는 자신이 애플 도넛으로 유명한 매사추세츠에서 왔다며, 이곳 도넛 맛이 고향과 비슷해서 매년 찾아온다고 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애플 도넛과 애플 사이다, 애플 파이를 주문했다. 손바닥만 한 도넛은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사과 내음이 향긋했다. 따뜻한 애플 사이다는 처음이지만 어디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끈 건 화려한 옷차림의 젊은이들이었다. 진한 화장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연신 휴대전화로 사진과 영상을 찍는 여자들을 가리키며 딸이 말했다. “저 사람들이 틱톡 인플루언서예요.” 그제야 그들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햇볕은 따뜻했지만, 산자락 아래에 자리한 농장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솜털이 곤두설 만큼 시렸다. 닐 다이아몬드가 부른 명곡 ‘스윗 캐롤라인(Sweet Caroline)’이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중년의 남자가 MR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도 보였다. 흥겨운 컨트리송이 사과나무 사이로 흘러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크래커 배럴(Cracker Barrel)’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엔 없는 식당이다. 그곳 역시 컨트리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전형적인 미국 남부 시골의 정취 속에서 보냈다. 하루의 끝에서 문득 생각했다. 사람 사는 일도 사과처럼 익어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햇살과 바람이 적당히 맞아야 단맛이 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런 조화 속에서 제맛을 내지 않을까. 서두르지 말아라. 익을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여라. 오늘, 오크 글렌이 내게 가르쳐준 가을의 교훈이었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오크 글렌 오크 글렌 컨트리송이 사과나무 oak glen
2025.10.20.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