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어 전 부통령 아버지 원폭 요구 '패하면 트루먼은 단죄돼야' 맥아더 해임 흑백이 함께 싸운 전쟁, 인종통합에 기여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관련한 기록들을 추적하다 보면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아버지 앨 고어 시니어 의원이다. 민주당 중진이었던 고어는 처음으로 원폭 투하를 주장한 인물로 나온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미군병사들이 숱하게 죽어가자 트루먼을 강하게 압박했다. 민주당 쪽에서 먼저 원폭사용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해 11월 초 트루먼은 긴급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중공군이 즉각 철수하지 않으면 미국이 보유한 가공할 무기를 총동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 기자들의 원폭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트루먼은 '예스'라고 분명히 밝혔다. 국제사회에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다.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다음날 급히 워싱턴으로 달려와 거칠게 항의했다. 트루먼이 마지못해 원폭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영국총리의 문서화 요구는 거절했다. 귀국 길에 프랑스에 들른 애틀리는 미국의 원폭투하를 기정사실화해 또 한번 충격을 줬다.
트루먼의 기자회견이 있은지 보름 후 쯤 맥아더는 백악관으로 비밀공문을 보낸다. 원폭투하 예상지점 20여 군데를 명시하고는 폭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한 것. 맥아더를 불신한 트루먼은 이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그러나 원폭은 이미 괌 기지에 도착 대통령의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라도 조립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불신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원폭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자 맥아더는 연합군최고사령관의 이름으로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양민학살 행위…. 무모한 짓"이라며 대통령을 마치 전범인 양 몰아세웠다. 당장 항명 또는 반역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될 상황이었으나 정치적 기반이 약한 트루먼은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5년 후 또 원폭을 둘러싸고 대립한 것이다.
맥아더는 정말 원폭을 사용하려 했을까. 측근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천만에'다. 당시 미국이 보유한 원폭은 500여 개 소련은 20여 개에 불과했다. 맥아더는 원폭 투하권을 넘겨받으면 스탈린과 모택동을 협박 중공군의 철수를 유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원폭투하 논의가 탄력을 받게 된 것은 8군사령관 워커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불과 이틀 앞두고 교통사고로 순직한 것이다. 2차대전 때 조지 패튼이 '연합군 장군 중 가장 용감한 xxx(the fightingest son of bitch)'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던 워커. 어찌 보면 패튼과 워커는 맥아더를 가운데 두고 비슷한 운명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패튼은 원래 맥아더가 참모총장시절(1930~35) 아이젠하워와 함께 그의 충직한 부관이었다. 독일이 패망하자 예전의 보스를 도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며 태평양 전출을 자원했지만 웬일인지 거부당했다. 패튼이 귀국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워커도 그의 뒤를 따른 것이다.
그 무렵 트루먼은 중국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ㆍ중 국경지역 폭격금지를 명령했다. 맥아더는 손과 발이 묶인 채 전쟁을 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빠졌다. 급기야 맥아더는 공화당의 한 중진의원에게 개인서신을 보냈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유럽을 대신해 전쟁을 치르고 있다. 만일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트루먼은 전쟁터에서 숨진 우리 병사들을 살해한 인물로 단죄돼야 한다."
1951년 4월 맥아더는 결국 보직해임되고 귀국길에 오른다. 미국을 떠난지 15년만이다. 도쿄 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연도엔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 일본의 민주화와 경제부흥에 기여한 미국인 '쇼군'을 배웅했다. 전쟁은 이후 휴전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다시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갈라진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맥아더. 그는 과연 사라졌을까. 1950년대 말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자 의회는 맥아더 특별법을 만들어 그를 '6성장군(General of the Armies)'으로 진급시키려 했다. 이미 야인으로 돌아간 트루먼도 "우리는 서로 견해가 달랐을 뿐 맥아더는 건국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영웅"이라며 지지의사를 밝혔다. 맥아더는 그러나 "8순노인에게 별이 무슨 소용이냐"며 정중히 사양해 그의 승진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맥아더는 타계하기 몇개월 전 측근에게 "트루먼은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며 이 말을 꼭 기록으로 남기라고 지시했다.
맥아더는 1964년 4월 8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숨진 날 미국 정부는 1주일간의 국장을 선포했다.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국가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해 준 것이다. 한국에선 6ㆍ25 때 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 총리가 조문사절단장으로 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전쟁이 일어난지 벌써 60년이 흘렀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핵공포가 버섯구름처럼 떠다니고 있다. 휴전도 따지고 보면 트루먼의 뒤를 이은 아이젠하워가 원폭 투하 위협으로 어렵사리 성사된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북한이 핵무기를 제조 협박을 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25는 미국의 인종통합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은 흑과 백이 같은 막사를 쓰며 하나가 돼 치른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돼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민권투쟁이 성공한 것도 한국전 참전 백인들의 도움이 컸다. 이들이 전우애를 발휘해 민권투쟁에 동조 흑백차별 철폐에 앞장 선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6ㆍ25와 맥이 닿는다. 그래서 한반도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 그의 최대 외교 어젠다 일지도 모른다.
# 미국과 6.25 숨겨진 역사를 벗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