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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6.25 숨겨진 역사를 벗긴다 4] 원자폭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관련한 기록들을 추적하다 보면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아버지 앨 고어 시니어 의원이다. 민주당 중진이었던 고어는 처음으로 원폭 투하를 주장한 인물로 나온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미군병사들이 숱하게 죽어가자 트루먼을 강하게 압박했다. 민주당 쪽에서 먼저 원폭사용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해 11월 초 트루먼은 긴급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중공군이 즉각 철수하지 않으면 미국이 보유한 가공할 무기를 총동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 기자들의 원폭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트루먼은 '예스'라고 분명히 밝혔다. 국제사회에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다.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다음날 급히 워싱턴으로 달려와 거칠게 항의했다. 트루먼이 마지못해 원폭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영국총리의 문서화 요구는 거절했다. 귀국 길에 프랑스에 들른 애틀리는 미국의 원폭투하를 기정사실화해 또 한번 충격을 줬다. 트루먼의 기자회견이 있은지 보름 후 쯤 맥아더는 백악관으로 비밀공문을 보낸다. 원폭투하 예상지점 20여 군데를 명시하고는 폭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한 것. 맥아더를 불신한 트루먼은 이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그러나 원폭은 이미 괌 기지에 도착 대통령의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라도 조립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불신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원폭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자 맥아더는 연합군최고사령관의 이름으로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양민학살 행위…. 무모한 짓"이라며 대통령을 마치 전범인 양 몰아세웠다. 당장 항명 또는 반역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될 상황이었으나 정치적 기반이 약한 트루먼은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5년 후 또 원폭을 둘러싸고 대립한 것이다. 맥아더는 정말 원폭을 사용하려 했을까. 측근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천만에'다. 당시 미국이 보유한 원폭은 500여 개 소련은 20여 개에 불과했다. 맥아더는 원폭 투하권을 넘겨받으면 스탈린과 모택동을 협박 중공군의 철수를 유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원폭투하 논의가 탄력을 받게 된 것은 8군사령관 워커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불과 이틀 앞두고 교통사고로 순직한 것이다. 2차대전 때 조지 패튼이 '연합군 장군 중 가장 용감한 xxx(the fightingest son of bitch)'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던 워커. 어찌 보면 패튼과 워커는 맥아더를 가운데 두고 비슷한 운명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패튼은 원래 맥아더가 참모총장시절(1930~35) 아이젠하워와 함께 그의 충직한 부관이었다. 독일이 패망하자 예전의 보스를 도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며 태평양 전출을 자원했지만 웬일인지 거부당했다. 패튼이 귀국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워커도 그의 뒤를 따른 것이다. 그 무렵 트루먼은 중국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ㆍ중 국경지역 폭격금지를 명령했다. 맥아더는 손과 발이 묶인 채 전쟁을 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빠졌다. 급기야 맥아더는 공화당의 한 중진의원에게 개인서신을 보냈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유럽을 대신해 전쟁을 치르고 있다. 만일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트루먼은 전쟁터에서 숨진 우리 병사들을 살해한 인물로 단죄돼야 한다." 1951년 4월 맥아더는 결국 보직해임되고 귀국길에 오른다. 미국을 떠난지 15년만이다. 도쿄 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연도엔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 일본의 민주화와 경제부흥에 기여한 미국인 '쇼군'을 배웅했다. 전쟁은 이후 휴전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다시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갈라진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맥아더. 그는 과연 사라졌을까. 1950년대 말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자 의회는 맥아더 특별법을 만들어 그를 '6성장군(General of the Armies)'으로 진급시키려 했다. 이미 야인으로 돌아간 트루먼도 "우리는 서로 견해가 달랐을 뿐 맥아더는 건국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영웅"이라며 지지의사를 밝혔다. 맥아더는 그러나 "8순노인에게 별이 무슨 소용이냐"며 정중히 사양해 그의 승진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맥아더는 타계하기 몇개월 전 측근에게 "트루먼은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며 이 말을 꼭 기록으로 남기라고 지시했다. 맥아더는 1964년 4월 8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숨진 날 미국 정부는 1주일간의 국장을 선포했다.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국가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해 준 것이다. 한국에선 6ㆍ25 때 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 총리가 조문사절단장으로 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전쟁이 일어난지 벌써 60년이 흘렀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핵공포가 버섯구름처럼 떠다니고 있다. 휴전도 따지고 보면 트루먼의 뒤를 이은 아이젠하워가 원폭 투하 위협으로 어렵사리 성사된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북한이 핵무기를 제조 협박을 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25는 미국의 인종통합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한국전쟁은 흑과 백이 같은 막사를 쓰며 하나가 돼 치른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돼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민권투쟁이 성공한 것도 한국전 참전 백인들의 도움이 컸다. 이들이 전우애를 발휘해 민권투쟁에 동조 흑백차별 철폐에 앞장 선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6ㆍ25와 맥이 닿는다. 그래서 한반도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 그의 최대 외교 어젠다 일지도 모른다.

2010.06.27. 15:04

[미국과 6·25 숨겨진 역사를 벗긴다-3] 투루먼과 맥아더

맥아더가 인천상륙 카드를 뽑아든 건 8군사령관 워커에 대한 불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초 맥아더는 대전 방어선을 그어주며 1인치도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총공세로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히는 등 전세는 더욱 불리해졌다. 워커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워커가 맥아더의 기대를 저버리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 대구로까지 밀리자 한국전쟁은 또 한번 고비를 맞는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트루먼은 합참에 미군철수작전을 수립하라고 지시한 것. 대통령은 자칫 제2의 '덩커크' 사태(나치 독일군에 포위된 영ㆍ불 연합군 40만명 철수 작전)를 우려해 한반도 포기를 결심했다. 맥아더는 그러나 "전쟁에선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대반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며 인천을 꺼내들었다. 상륙후보지로는 최악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어서 합참은 처음으로 맥아더에 극렬한 반기를 들었다. 그가 합참을 설득한 논리는 엉뚱하게도 18세기 중엽 영국이 프랑스군을 공격한 퀘벡(캐나다) 전투였다. 당시 퀘벡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영국의 제임스 월프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 상륙작전을 감행 퀘벡을 함락시켰다. 맥아더는 월프처럼 인천에 상륙해 적의 허리를 두동강내겠다고 큰소리쳤다. 20세기 첨단산업화시대에 살았지만 맥아더는 18~19세기의 '로맨틱'한 전쟁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이 무모한 작전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천상륙을 저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악연은 1차대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트루먼은 미주리주 방위군 출신의 포병대위. 맥아더는 미군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별을 달았다. 어느날 포병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미군이 독일군에 패하자 격분한 맥아더는 트루먼을 세워놓고 심한 모욕을 줬다. 이때부터 트루먼은 맥아더에 대해 분노와 열등감을 동시에 갖게 됐다. 트루먼의 지시로 각군 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모두 도쿄에 모였다. 상륙을 꼭 한달 앞두고서였다. 맥아더의 수행부관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알렉산더 헤이그(전 국무장관)는 타계하기 얼마 전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날 오전 9시 정각 맥아더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각군 총장들이 일제히 일어나 거수경례를 올렸다. 각 군별로 인천의 위험성을 조목조목 따지며 군산을 후보지로 권유했으나 노장군은 묵묵부답이었다. 얼마 후 맥아더가 담배 파이프에 불을 당겼다. '그 입 다물라'는 제스처였다. '우리는 예정대로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네들은 새 사령관을 맞이할 걸세.' 딱 한마디 하고는 회의장을 나갔다. 맥아더의 단호한 결단에 모두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 충격을 받았다." 인천은 성공한 작전이었지만 이후 맥아더는 결정적인 패착을 두게 된다. 인천에 상륙한 10군단과 8군을 분리해 독자적인 작전을 펴게 한 것. 8군사령관에게 단일 지휘권을 넘겨줘야 했는데도 워커를 믿지 못해 지휘권을 이원화한 것이다. 서울 수복 후 확전(통일)을 주장한 맥아더와 원상회복(북진금지)을 원한 트루먼은 다시 대립을 한다. 그러나 인천의 성공으로 맥아더의 인기는 수직 상승했고 트루먼은 그저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그 무렵 맥아더가 백악관에 보낸 공문엔 그의 '오만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편지에 'I'의 1인칭 대신 자신의 타이틀을 쓴 것. '미합중국 육군 원수(the General of the Army) 맥아더는…' 이런 식이었다. 이에 화가 치민 트루먼도 '미합중국 대통령인 트루먼은…'으로 되받아쳤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둘 사이의 기 싸움에 끼어들 공간이 거의 없어 팔짱을 한 채 그저 지켜봐야 했다. 이때 쯤 맥아더는 '인의 장막'에 둘러쌓인다. 측근들의 '달콤한' 보고에만 귀를 기울여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인 존 무치오의 증언은 쇼킹하다. 업무협의차 1년에 두어번 도쿄를 들렀지만 무치오는 측근들의 방해로 맥아더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처음 대면하게 된 곳은 대구. 공항에 영접을 나갔으나 역시 '별'들이 진을 치고 있어 근접조차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먼발치에서 '장군 장군'하며 소리를 질렀다. 흠칫 놀란 맥아더가 부관에게 묻더니 무치오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자네가 여기 대사인가. 그런데 왜 내가 처음 보는가"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무치오는 이때 맥아더 주변에 '인의 장막'이 쳐져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고 한다. 면담이 끝난 후 무치오는 바로 옆 유엔대표부를 방문해 외교관들을 격려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이 전쟁은 한국군과 미군이 치르는 것일세." 유엔군총사령관직도 겸하고 있었으나 맥아더는 오직 미국과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루먼과 맥아더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그해 10월 15일 웨이크 아일랜드에서였다. 당초 트루먼은 워싱턴에서 전략회의를 갖자고 제안했으나 맥아더가 거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본토와 일본의 중간지점인 웨이크 아일랜드를 회담장소로 결정했다. 극적인 장면은 공항에서 연출됐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트랩을 내려오는 트루먼에 맥아더는 불쑥 악수를 청한 것.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 거수경례를 해야 했는데도 맥아더는 마지못한 듯 그저 손만 내밀었다. 맥아더는 트루먼이 그해 11월 치러지는 선거에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며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중공군의 참전가능성이 대두됐지만 둘 사이의 감정대립으로 전략회의는 별 소득없이 끝나고 말았다.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미국의 리더십 붕괴로 인해 유엔군은 중공군이 참전하자 와해되고 만다. 이어 원폭투하시비에 휘말리는 등 전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용필 논설위원>

2010.06.25. 19:34

[미국과 6·25 숨겨진 역사를 벗긴다-2] 맥아더 장군의 위상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전면공격을 펼친 6월 25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이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곳은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였다. 전화를 받은 부관은 그러나 맥아더를 바꿔주지 않았다. "지금 취침 중이시니 나중에 보고드리겠다"며 막무가내였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장군이 주무시는 동안 우리 백성들 모두 죽게 됐다"고 울음을 터트렸지만 부관은 여전히 냉랭했다. 그래서 한국전쟁 발발 소식은 트루먼 대통령이 먼저 알게 됐다. 당시 맥아더의 관저는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무장헌병 1개중대가 겹겹이 둘러싸 그물 경비를 펼쳤다. 이 시간 외부인 방문은 물론 전화통화까지 금지한 것. 거의 종교의식(ritual) 수준이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미주리주 인디펜던트의 고향집에 있었던 트루먼은 즉각 워싱턴으로 와 안보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트루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발족시켜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는 등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펴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봉쇄망'이 뚫려 당황해했다.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한반도 사태로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안보회의는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군부는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양동작전으로 파악했다. 미국을 한반도로 유인한 다음 이 틈을 타 유럽을 집어삼키려는 것으로 믿었다. '유럽 마인드'가 강했던 군 지도부는 한반도 포기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반면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도미노 현상에 의한 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 개입을 적극 주장했다. 절충안을 제시해 가닥을 잡은 것은 트루먼. 지상군은 투입하지 않되 한국정부가 요청할 경우에 한해 해ㆍ공군만 지원하기로 결론을 냈다. 그러나 워싱턴의 이같은 결정은 맥아더의 동의가 필요했다. 대통령은 군통수권자였지만 그 당시 맥아더의 인지도와 명성은 트루먼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당시 상황은 리처드 닉슨의 정치회고록 'The Real War'에 생생하게 기술돼 있다. "미국은 트루먼 소련은 스탈린 아시아는 맥아더가 각각 통치하고 있었다." 2차대전 후 이 셋이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합참의장인 오마 브래들리가 맥아더에게 워싱턴의 결정사항을 알렸지만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전쟁에서 승리외엔 대안이 없다"는 말과 함께 오히려 핀잔만 들었을 뿐이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선포 대신 유엔을 통해 전쟁을 치르기로 결심 안보리에 상정해 무력제재를 승인받는다. 맥아더는 어떻게 군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게 호통을 칠 수 있었을까. 트루먼은 2차대전이 끝나자 비대해진 군부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국방부와 합참 CIA가 공식기구로 발족한 것도 그 즈음이다. 조직개편으로 합참의장은 군령권과 군정권(인사)을 한손에 거머쥔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게 됐다. 그러나 미군의 지휘체계는 맥아더란 수퍼 거물을 만나면서 무력해진다. 합참의장은 맥아더가 육사교장시절 제자였고 계급도 대장에 불과했다. 더구나 맥아더는 현역 유일의 5성장군이자 나이도 70이 넘은 군 최고원로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합참은 맥아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대통령과 맥아더가 '직거래'를 하게 돼 한국전쟁이 더욱 혼선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트루먼은 왜 맥아더를 그때까지 현직에 뒀을까 의문이 생긴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맥아더가 공화당 후보로 대권에 나서면 트루먼이 이길 승산이 없어 6년동안이나 귀국을 막았다는 것이다. 합참의장과의 통화에서 맥아더는 그래도 여운은 남겨뒀다. 한국을 직접방문해 전황을 살펴보겠다고 말해준 것. 맥아더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한강다리가 폭파되기 직전이다. 전용기를 타고 수원공항에 내린 맥아더는 한국군 지휘부로부터 간략한 보고를 들었다. 그때 지프차 한대가 맥아더의 눈에 띄었다. 서울로 가보겠다며 성큼 올라탄 것. 경호병력도 없이 단신 적지를 가겠다는 것이어서 수행원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결국 비서실장이 카빈 소총에 실탄을 장전 경호원으로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당초 스케줄은 공항에서 보고를 받은 후 곧바로 귀국하게 돼 있었다. 이 지프차가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을 줄이야…. 맥아더는 노량진 언덕에서 쌍안경으로 불타고 있는 서울 도심과 피란민들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한강다리를 말없이 지켜봤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한국군에 즉각 실탄과 무기를 공급하고 전투준비가 된 대대규모 병력을 우선 차출해 보내라고 명령을 내린다. 참모들이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줬지만 맥아더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마닐라 대학살(Manila Massacre)' 얘기를 꺼냈다. 태평양전쟁 끝무렵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10만명이 넘는 필리핀 양민들을 하룻밤새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한강다리의 피란민들을 보면서 맥아더는 마닐라의 끔찍한 장면이 떠올라 한국국민들을 구해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한국전쟁 개입은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일찌감치 태평양 시대의 도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 사태에 대만의 장개석군을 끌어들여 중국대륙을 되찾겠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 일본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며칠 후 몰래 대만을 방문해 장개석과 밀담을 나눴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트루먼과 불화를 빚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의 초기 국면은 워싱턴의 입김이 거의 배제된 채 '맥아더의 맥아더에 의한 맥아더의 영광을 위한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박용필 논설위원

2010.06.24. 20:32

[미국과 6·25 숨겨진 역사를 벗긴다-1] 워커와 맥아더 운명적 만남

동서냉전과 한반도 분단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올해 60주년을 맞는다. 미국에선 흔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불리는 6ㆍ25. 전쟁의 참상을 잊고 싶어서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의 사이에 끼어있어 주목을 받지 못해 이런 말이 생겨났다. 6ㆍ25는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지 않고 치른 첫 '폴리스 액션(police action)'에 해당된다. 국제질서를 해치는 폭력행위를 단죄하는 '경찰'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세계를 경악케한 천안함 피격사건도 6ㆍ25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핵무장도 60년 전 미국이 한때 심각하게 고려했던 원폭투하와 맞물려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일부 한국의 진보학자들은 6ㆍ25를 '맥아더의 개인전쟁'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맥아더를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지목하며 그에게 분단고착의 1차적 책임을 묻고 있다. 그 당시 미국은 어떤 상황이었으며 개전 초기 북한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전쟁 주역들이 남긴 증언과 문서들을 토대로 초기 상황을 시리즈로 재구성해 본다. 1949년 8월의 어느날. 월턴 워커 장군을 태운 군용기가 일본 도쿄 인근의 아추기 미군기지에 내렸다. 마치 이듬해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라도 하듯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대기하고 있던 지프에 올라타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앞 창을 강하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워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내 야망이 그의 널찍한 가슴 한켠에서 꿈틀댔다. 당시 그는 차기 참모총장 0순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군 안팎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해 워커는 미 제8군사령관에 임명됐다. 1~2년의 임기만 무사히 마친다면 그는 워싱턴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를 태운 지프는 도쿄 시내의 8군사령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커는 이내 차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임 신고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있는 다이이치 생명보험보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워커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걸 느끼고는 흠칫 놀랐다. 더글러스 맥아더. 현역 중에선 유일한 5성장군인 그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자 일본 점령군사령관 동북아시아 주둔 미군총사령관이었다. 미국인들 사이에선 구국의 영웅 군인들 사이에선 거의 군신(military god)으로까지 추앙받고 있었다. 워커는 아시아의 절대강자인 맥아더에게 부임신고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워커는 조지 패튼 3군사령관의 직속 부하였다. 패튼 밑에서 전차군단장을 지낸 그도 전쟁영웅이었다. 그런 워커였지만 맥아더 앞에 서자니 가슴이 떨렸던 것이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37년간이나 군생활을 한 워커였으나 왠지 맥아더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맞대면을 한 것이다. 워커는 맥아더의 비서실장 겸 참모장인 리처드 서더랜드 중장의 안내로 맥아더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와 눈을 맞추는 순간 워커는 무의식 중에 눈을 아래로 깔았다.(훗날 그는 주변인사들에게 그때 맥아더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고 털어놨다). 첫 만남에서부터 워커는 주눅이 잔뜩 들어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맥아더가 그자리에서 워커에게 내린 지시사항은 딱 한가지. 8군을 가장 강력한 야전군으로 재편성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장개석은 모택동에게 패해 대만으로 쫓겨와 있었다. 맥아더의 촉각은 온통 중국대륙에 쏠려있었던 것.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건 중국이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사시에 대비해 8군을 미국의 야전군 중 최강의 전투부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워커는 곧바로 8군의 전투력을 점검해봤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일본 점령군 기능을 하고 있어 군기도 엉망이었을 뿐더러 장비마저 대부분 노후된 것들이었다. 정부의 예산삭감조치로 병력도 크게 줄어 10만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2차대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대부분 제대하고 신병들로 채워져 있었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몇달 후 맥아더는 워커를 다시 불러 8군의 전투력을 체크했다. 이 자리에서 워커는 '실수'를 했다. 상황을 솔직하게 그러나 다소 비관적으로 보고해 맥아더의 진노를 산 것. 눈치빠른 비서실장이 얼른 워커를 낚아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맥아더 앞에선) 절대 말 대꾸해서는 안 된다"며 주의를 줬다. 이후 워커는 맥아더로부터 호출명령이 떨어지면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당시 주변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치 사형수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워커의 측근들마저 왜 그가 맥아더 앞에서 기를 못폈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전쟁사가들은 두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는 맥아더의 카리스마가 워커를 짓눌렀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맥아더는 당대 최고의 군전략가이자 아시아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어 '미국의 시저'라고 불렸다. 또 하나는 워커의 체구. 6피트1인치에 이르는 맥아더와는 달리 워커는 5피트5인치의 비교적 단신이었다. 7순의 고령에도 불구 맥아더는 50대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어 요즘말로 '얼짱'이었다. 워커가 외모에서도 심한 열등감을 느낄만도 했다는 것이다. 워커가 맥아더에게 좀 더 당당했던들 아니면 맥아더가 일찍 8군사령관을 교체했더라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 전략가들도 적지 않다. 보스에게 믿음을 주지못한 워커. 부하를 신뢰못한 맥아더. 이러는 사이 비극의 시계는 어느덧 해를 넘겨 6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용필 논설위원>

2010.06.2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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