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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6·25 숨겨진 역사를 벗긴다-1] 워커와 맥아더 운명적 만남

Los Angeles

2010.06.2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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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앞에서 기죽은 워커 장군
중국 접수한 중공과 전쟁 고려
미 8군 최강 야전군 재편 명령
동서냉전과 한반도 분단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올해 60주년을 맞는다. 미국에선 흔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불리는 6ㆍ25. 전쟁의 참상을 잊고 싶어서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의 사이에 끼어있어 주목을 받지 못해 이런 말이 생겨났다.

6ㆍ25는 미국이 전쟁을 선포하지 않고 치른 첫 '폴리스 액션(police action)'에 해당된다. 국제질서를 해치는 폭력행위를 단죄하는 '경찰'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세계를 경악케한 천안함 피격사건도 6ㆍ25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핵무장도 60년 전 미국이 한때 심각하게 고려했던 원폭투하와 맞물려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일부 한국의 진보학자들은 6ㆍ25를 '맥아더의 개인전쟁'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맥아더를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지목하며 그에게 분단고착의 1차적 책임을 묻고 있다. 그 당시 미국은 어떤 상황이었으며 개전 초기 북한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전쟁 주역들이 남긴 증언과 문서들을 토대로 초기 상황을 시리즈로 재구성해 본다.

1949년 8월의 어느날. 월턴 워커 장군을 태운 군용기가 일본 도쿄 인근의 아추기 미군기지에 내렸다. 마치 이듬해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라도 하듯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대기하고 있던 지프에 올라타자마자 굵은 빗방울이 앞 창을 강하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워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내 야망이 그의 널찍한 가슴 한켠에서 꿈틀댔다. 당시 그는 차기 참모총장 0순위에 올라있을 정도로 군 안팎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해 워커는 미 제8군사령관에 임명됐다. 1~2년의 임기만 무사히 마친다면 그는 워싱턴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를 태운 지프는 도쿄 시내의 8군사령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커는 이내 차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임 신고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있는 다이이치 생명보험보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워커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걸 느끼고는 흠칫 놀랐다.

더글러스 맥아더. 현역 중에선 유일한 5성장군인 그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자 일본 점령군사령관 동북아시아 주둔 미군총사령관이었다. 미국인들 사이에선 구국의 영웅 군인들 사이에선 거의 군신(military god)으로까지 추앙받고 있었다. 워커는 아시아의 절대강자인 맥아더에게 부임신고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워커는 조지 패튼 3군사령관의 직속 부하였다. 패튼 밑에서 전차군단장을 지낸 그도 전쟁영웅이었다. 그런 워커였지만 맥아더 앞에 서자니 가슴이 떨렸던 것이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37년간이나 군생활을 한 워커였으나 왠지 맥아더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맞대면을 한 것이다. 워커는 맥아더의 비서실장 겸 참모장인 리처드 서더랜드 중장의 안내로 맥아더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와 눈을 맞추는 순간 워커는 무의식 중에 눈을 아래로 깔았다.(훗날 그는 주변인사들에게 그때 맥아더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고 털어놨다). 첫 만남에서부터 워커는 주눅이 잔뜩 들어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맥아더가 그자리에서 워커에게 내린 지시사항은 딱 한가지. 8군을 가장 강력한 야전군으로 재편성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장개석은 모택동에게 패해 대만으로 쫓겨와 있었다. 맥아더의 촉각은 온통 중국대륙에 쏠려있었던 것.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건 중국이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사시에 대비해 8군을 미국의 야전군 중 최강의 전투부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워커는 곧바로 8군의 전투력을 점검해봤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일본 점령군 기능을 하고 있어 군기도 엉망이었을 뿐더러 장비마저 대부분 노후된 것들이었다. 정부의 예산삭감조치로 병력도 크게 줄어 10만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2차대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대부분 제대하고 신병들로 채워져 있었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몇달 후 맥아더는 워커를 다시 불러 8군의 전투력을 체크했다. 이 자리에서 워커는 '실수'를 했다. 상황을 솔직하게 그러나 다소 비관적으로 보고해 맥아더의 진노를 산 것. 눈치빠른 비서실장이 얼른 워커를 낚아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맥아더 앞에선) 절대 말 대꾸해서는 안 된다"며 주의를 줬다.

이후 워커는 맥아더로부터 호출명령이 떨어지면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당시 주변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치 사형수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워커의 측근들마저 왜 그가 맥아더 앞에서 기를 못폈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전쟁사가들은 두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는 맥아더의 카리스마가 워커를 짓눌렀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맥아더는 당대 최고의 군전략가이자 아시아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어 '미국의 시저'라고 불렸다. 또 하나는 워커의 체구. 6피트1인치에 이르는 맥아더와는 달리 워커는 5피트5인치의 비교적 단신이었다. 7순의 고령에도 불구 맥아더는 50대의 젊음을 유지하고 있어 요즘말로 '얼짱'이었다. 워커가 외모에서도 심한 열등감을 느낄만도 했다는 것이다.

워커가 맥아더에게 좀 더 당당했던들 아니면 맥아더가 일찍 8군사령관을 교체했더라면 한국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는 전략가들도 적지 않다.

보스에게 믿음을 주지못한 워커. 부하를 신뢰못한 맥아더. 이러는 사이 비극의 시계는 어느덧 해를 넘겨 6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용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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