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지시에 '인천 카드' 꺼낸 맥아더 상륙작전 성공후 지휘권 이원화 '패착' 리더십 실종으로 전쟁은 수렁에 빠져
맥아더가 인천상륙 카드를 뽑아든 건 8군사령관 워커에 대한 불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초 맥아더는 대전 방어선을 그어주며 1인치도 후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총공세로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히는 등 전세는 더욱 불리해졌다. 워커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워커가 맥아더의 기대를 저버리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 대구로까지 밀리자 한국전쟁은 또 한번 고비를 맞는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트루먼은 합참에 미군철수작전을 수립하라고 지시한 것. 대통령은 자칫 제2의 '덩커크' 사태(나치 독일군에 포위된 영ㆍ불 연합군 40만명 철수 작전)를 우려해 한반도 포기를 결심했다.
맥아더는 그러나 "전쟁에선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대반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며 인천을 꺼내들었다. 상륙후보지로는 최악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어서 합참은 처음으로 맥아더에 극렬한 반기를 들었다.
그가 합참을 설득한 논리는 엉뚱하게도 18세기 중엽 영국이 프랑스군을 공격한 퀘벡(캐나다) 전투였다. 당시 퀘벡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영국의 제임스 월프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 상륙작전을 감행 퀘벡을 함락시켰다. 맥아더는 월프처럼 인천에 상륙해 적의 허리를 두동강내겠다고 큰소리쳤다. 20세기 첨단산업화시대에 살았지만 맥아더는 18~19세기의 '로맨틱'한 전쟁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이 무모한 작전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천상륙을 저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트루먼과 맥아더의 악연은 1차대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트루먼은 미주리주 방위군 출신의 포병대위. 맥아더는 미군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별을 달았다.
어느날 포병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미군이 독일군에 패하자 격분한 맥아더는 트루먼을 세워놓고 심한 모욕을 줬다. 이때부터 트루먼은 맥아더에 대해 분노와 열등감을 동시에 갖게 됐다.
트루먼의 지시로 각군 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가 모두 도쿄에 모였다. 상륙을 꼭 한달 앞두고서였다. 맥아더의 수행부관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알렉산더 헤이그(전 국무장관)는 타계하기 얼마 전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날 오전 9시 정각 맥아더가 회의장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각군 총장들이 일제히 일어나 거수경례를 올렸다. 각 군별로 인천의 위험성을 조목조목 따지며 군산을 후보지로 권유했으나 노장군은 묵묵부답이었다.
얼마 후 맥아더가 담배 파이프에 불을 당겼다. '그 입 다물라'는 제스처였다. '우리는 예정대로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네들은 새 사령관을 맞이할 걸세.' 딱 한마디 하고는 회의장을 나갔다. 맥아더의 단호한 결단에 모두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 충격을 받았다."
인천은 성공한 작전이었지만 이후 맥아더는 결정적인 패착을 두게 된다. 인천에 상륙한 10군단과 8군을 분리해 독자적인 작전을 펴게 한 것. 8군사령관에게 단일 지휘권을 넘겨줘야 했는데도 워커를 믿지 못해 지휘권을 이원화한 것이다.
서울 수복 후 확전(통일)을 주장한 맥아더와 원상회복(북진금지)을 원한 트루먼은 다시 대립을 한다. 그러나 인천의 성공으로 맥아더의 인기는 수직 상승했고 트루먼은 그저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그 무렵 맥아더가 백악관에 보낸 공문엔 그의 '오만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편지에 'I'의 1인칭 대신 자신의 타이틀을 쓴 것. '미합중국 육군 원수(the General of the Army) 맥아더는…' 이런 식이었다. 이에 화가 치민 트루먼도 '미합중국 대통령인 트루먼은…'으로 되받아쳤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은 둘 사이의 기 싸움에 끼어들 공간이 거의 없어 팔짱을 한 채 그저 지켜봐야 했다.
이때 쯤 맥아더는 '인의 장막'에 둘러쌓인다. 측근들의 '달콤한' 보고에만 귀를 기울여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인 존 무치오의 증언은 쇼킹하다. 업무협의차 1년에 두어번 도쿄를 들렀지만 무치오는 측근들의 방해로 맥아더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처음 대면하게 된 곳은 대구. 공항에 영접을 나갔으나 역시 '별'들이 진을 치고 있어 근접조차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먼발치에서 '장군 장군'하며 소리를 질렀다. 흠칫 놀란 맥아더가 부관에게 묻더니 무치오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자네가 여기 대사인가. 그런데 왜 내가 처음 보는가"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무치오는 이때 맥아더 주변에 '인의 장막'이 쳐져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고 한다. 면담이 끝난 후 무치오는 바로 옆 유엔대표부를 방문해 외교관들을 격려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이 전쟁은 한국군과 미군이 치르는 것일세." 유엔군총사령관직도 겸하고 있었으나 맥아더는 오직 미국과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루먼과 맥아더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그해 10월 15일 웨이크 아일랜드에서였다. 당초 트루먼은 워싱턴에서 전략회의를 갖자고 제안했으나 맥아더가 거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본토와 일본의 중간지점인 웨이크 아일랜드를 회담장소로 결정했다. 극적인 장면은 공항에서 연출됐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트랩을 내려오는 트루먼에 맥아더는 불쑥 악수를 청한 것.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 거수경례를 해야 했는데도 맥아더는 마지못한 듯 그저 손만 내밀었다.
맥아더는 트루먼이 그해 11월 치러지는 선거에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며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중공군의 참전가능성이 대두됐지만 둘 사이의 감정대립으로 전략회의는 별 소득없이 끝나고 말았다.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미국의 리더십 붕괴로 인해 유엔군은 중공군이 참전하자 와해되고 만다. 이어 원폭투하시비에 휘말리는 등 전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