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첫날 맥아더는 전화도 안받아 처음엔 소련의 양동작전으로 파악 발발 나흘 후 맥아더 전투준비 지시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전면공격을 펼친 6월 25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이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곳은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였다.
전화를 받은 부관은 그러나 맥아더를 바꿔주지 않았다. "지금 취침 중이시니 나중에 보고드리겠다"며 막무가내였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장군이 주무시는 동안 우리 백성들 모두 죽게 됐다"고 울음을 터트렸지만 부관은 여전히 냉랭했다. 그래서 한국전쟁 발발 소식은 트루먼 대통령이 먼저 알게 됐다.
당시 맥아더의 관저는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무장헌병 1개중대가 겹겹이 둘러싸 그물 경비를 펼쳤다. 이 시간 외부인 방문은 물론 전화통화까지 금지한 것. 거의 종교의식(ritual) 수준이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미주리주 인디펜던트의 고향집에 있었던 트루먼은 즉각 워싱턴으로 와 안보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트루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발족시켜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는 등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펴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봉쇄망'이 뚫려 당황해했다.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한반도 사태로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안보회의는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군부는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양동작전으로 파악했다. 미국을 한반도로 유인한 다음 이 틈을 타 유럽을 집어삼키려는 것으로 믿었다. '유럽 마인드'가 강했던 군 지도부는 한반도 포기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반면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도미노 현상에 의한 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 개입을 적극 주장했다. 절충안을 제시해 가닥을 잡은 것은 트루먼. 지상군은 투입하지 않되 한국정부가 요청할 경우에 한해 해ㆍ공군만 지원하기로 결론을 냈다.
그러나 워싱턴의 이같은 결정은 맥아더의 동의가 필요했다. 대통령은 군통수권자였지만 그 당시 맥아더의 인지도와 명성은 트루먼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당시 상황은 리처드 닉슨의 정치회고록 'The Real War'에 생생하게 기술돼 있다. "미국은 트루먼 소련은 스탈린 아시아는 맥아더가 각각 통치하고 있었다." 2차대전 후 이 셋이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합참의장인 오마 브래들리가 맥아더에게 워싱턴의 결정사항을 알렸지만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전쟁에서 승리외엔 대안이 없다"는 말과 함께 오히려 핀잔만 들었을 뿐이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선포 대신 유엔을 통해 전쟁을 치르기로 결심 안보리에 상정해 무력제재를 승인받는다.
맥아더는 어떻게 군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게 호통을 칠 수 있었을까. 트루먼은 2차대전이 끝나자 비대해진 군부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국방부와 합참 CIA가 공식기구로 발족한 것도 그 즈음이다. 조직개편으로 합참의장은 군령권과 군정권(인사)을 한손에 거머쥔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게 됐다.
그러나 미군의 지휘체계는 맥아더란 수퍼 거물을 만나면서 무력해진다. 합참의장은 맥아더가 육사교장시절 제자였고 계급도 대장에 불과했다. 더구나 맥아더는 현역 유일의 5성장군이자 나이도 70이 넘은 군 최고원로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합참은 맥아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대통령과 맥아더가 '직거래'를 하게 돼 한국전쟁이 더욱 혼선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트루먼은 왜 맥아더를 그때까지 현직에 뒀을까 의문이 생긴다.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맥아더가 공화당 후보로 대권에 나서면 트루먼이 이길 승산이 없어 6년동안이나 귀국을 막았다는 것이다.
합참의장과의 통화에서 맥아더는 그래도 여운은 남겨뒀다. 한국을 직접방문해 전황을 살펴보겠다고 말해준 것. 맥아더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한강다리가 폭파되기 직전이다.
전용기를 타고 수원공항에 내린 맥아더는 한국군 지휘부로부터 간략한 보고를 들었다. 그때 지프차 한대가 맥아더의 눈에 띄었다. 서울로 가보겠다며 성큼 올라탄 것. 경호병력도 없이 단신 적지를 가겠다는 것이어서 수행원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결국 비서실장이 카빈 소총에 실탄을 장전 경호원으로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당초 스케줄은 공항에서 보고를 받은 후 곧바로 귀국하게 돼 있었다.
이 지프차가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을 줄이야…. 맥아더는 노량진 언덕에서 쌍안경으로 불타고 있는 서울 도심과 피란민들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한강다리를 말없이 지켜봤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한국군에 즉각 실탄과 무기를 공급하고 전투준비가 된 대대규모 병력을 우선 차출해 보내라고 명령을 내린다. 참모들이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줬지만 맥아더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마닐라 대학살(Manila Massacre)' 얘기를 꺼냈다. 태평양전쟁 끝무렵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10만명이 넘는 필리핀 양민들을 하룻밤새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한강다리의 피란민들을 보면서 맥아더는 마닐라의 끔찍한 장면이 떠올라 한국국민들을 구해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한국전쟁 개입은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일찌감치 태평양 시대의 도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 사태에 대만의 장개석군을 끌어들여 중국대륙을 되찾겠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 일본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며칠 후 몰래 대만을 방문해 장개석과 밀담을 나눴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트루먼과 불화를 빚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의 초기 국면은 워싱턴의 입김이 거의 배제된 채 '맥아더의 맥아더에 의한 맥아더의 영광을 위한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