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우리가 주인이 돼서 다잡고 하는 것과 종이 되어 시키는 대로 하거나 손님으로 잠시 거드는 것은 그 태도나 열의 책임감과 성취감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난다. 꼭 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리 되도록 밀어붙이는 것과 돼도 그만 안 돼도 그 뿐인 것과의 차이다. 이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 엄청난 결과가 나는데 지금 미주의 한국 불교와 타종교의 현상적인 차이가 아마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의 주인은 사부대중이며 미주한국불교의 주인도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든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다. 그런데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불자들 중엔 이러한 주인의식이 별로 뚜렷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래서는 불교가 제대로 살아날 리 없다.
언젠가 어느 보살님이 이야기하길 자기 주위에는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는 이들이 몇몇 있는데 얼마나 잘 해 주는지 스물 네 시간 늘 손과 발이 되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여러 해 동안 절을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아파도 들여다보는 이가 없고 차편이 없어도 태워 주겠다는 불자 하나 없어 섭섭하다는 것이다. 이런 불균형 속에서 그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본격적으로 따라 나가지를 않고 버티고 있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렇게 불자로 계속 남아 있는 것만 해도 부처님이나 스님들께 상당한 빚 갚음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며 웃으신다.
이해가 가는 얘기다. 다 아는 얘기지만 미국에서는 포교는 고사하고 자신만이라도 불자로 남아 있기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찌 보면 상당히 냉혈한이거나 고집불통이어야 가능하다. 때로는 위장술까지 동원해서 짐짓 어딘가로 나가는 교인인 체 해야 위기를 모면할 정도라니! 우리가 다 말 못하는 피해자들이요 무심한 가해자들이다. 바다를 건너와서도 이리 숨을 곳이 없으니 이곳 역시 사바세계 아닌가. 게다가 없어도 좋을 갖가지 고통마저 자질구레하게 구색을 갖추고 있을 줄이야! 그런데 이러한 괴로움 가운데 상당수가 실은 우리 불자들이 주인노릇은 안 해 보고 손님 대접만 바란 자업자득일 수 있다.
아까 말한 그 보살님도 남에게서 도움 받은 얘기만 하지 자기가 주인으로 나서서 베푼 기억은 별로 없으시다. 늘 손님으로 얻어먹는 사람으로 자신을 치부하니 입맛은 까다롭고 눈썰미는 날카로울 수 있어도 상황을 고쳐 나가거나 바꿀 힘은 없다. 아예 그럴 생각조차 못한다. 뭐든지 주인이 된다는 것은 엄두가 안 나는 일이고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으니까.
그런데 주인이 되는 일은 뜻밖에도 간단하다. 무슨 일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 첫걸음을 떼며 자신이 먼저 행동에 들어가면 된다. 일례로 절에 가면 아이들 놀데도 마땅찮고 놀이 기구도 없어서 자꾸 다른 데하고 비교가 될 것이다. 당장 스님과 상의해서 좁은 터라도 비집어 자리를 마련해서 조촐하게 꾸미면 된다. 필요한 것은 사거나 어디 가서 아쉬운 대로 얻어 오고. 마음이 문제지 꼭 하겠다면 이 정도 일들을 왜 못하겠나! 혼자서 안 되면 도움을 구하거나 동아리를 짜면 일이 수월해진다.
한글 교실도 그렇다. 요새 한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남의 아이든 내 아이든 한 둘이라도 앉혀 놓고 나 자신이 훈장 노릇을 시작하는 것이다. 배워서 남 주는 게 보시다. 더 잘 하는 사람 나타나면 넘겨주고. 먹는 것도 타는 것도 마찬가지. 나 자신이 음식을 해서 베풀고 내 차로 남들을 태워 줄 생각부터 내면 된다.
우리가 안 될 핑계를 찾자면 끝이 없다. 되는 일부터 하면 된다. 그러면 동조자가 나타날 것이고 부처님의 은근한 가피가 주위를 둘러쌀 것이며 불교가 하는 얘기에도 차차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것이다.
# 100420_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