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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신앙도 효율적이어야?

한때 인기를 끌었던 '교회 성장학'이 쇠퇴해 가고 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교회 성장학'은 선교학을 사회학적인 측면서 접근한 것으로 도날드 맥가브란의 영향력이 만든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수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하면서 교회 성장은 하나님에 대한 '성실성'(faithfulness to God)의 표현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교회 성장학'은 20세기 후반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강하게 주도하였고 그 결과 세계 도처에 수많은 대형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했던 '교회 성장학'은 양적으로 성장하는 이론과 방법을 제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동시에 심각한 문제점도 있었다. 가장 심각한 역기능은 교회 지도자들이 양적인 성장을 위해 심지어 세속적 경영 마인드와 비즈니스 감각으로 교회를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머무르면 '영적인 것'조차 '효율성'의 관점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프로그램도 반드시 효율적이어야 하고 그 결과 가시적인 성장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필요를 효율적으로 만족시킬 것인가"를 묻게 되고 교인들은 교회가 의도적으로 마련한 효율적인 종교적 서비스를 제공받는 소비자로 전락되는 것이다. 심지어 '선교'라는 거룩한 행위도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사역이 아니라 교회의 등록된 회원을 효과적으로 늘리는 방법을 다루는 사역이 된다. 또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인들의 욕구를 절대화 하여 복음 메시지조차 개인적 성취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게 될 것이다. 또 다른 교회 성장학의 역기능은 같은 지역 내의 교회들이 서로 경쟁자 혹은 심지어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이 무너져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살벌한 경쟁 논리로 인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이웃 교회들 간에 치열하게 진행될 수 있다. 그 결과 같은 지역 내에 세워진 교회들이 예수 안에서 한 형제 한 자매라는 하나 됨의 연합 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대립 국면으로 들어간다. 최근 교회가 대형화되어가는 현실 뒤에는 작은 교회의 엄청난 희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가 대형화되는 이유는 작은 교회로부터 큰 교회로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작은 나라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작은 것에 대한 뭔지 모르는 열등감이 있다. 그래서 대형 백화점 대형 아파트 대형 교회 등 언제나 큰 것을 선호한다. 젊은이들이 취직할 때도 꼭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한다. 그러나 큰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작으면서도 알차고 충실한 경우가 많다. 신약 교회는 가정 중심으로 모이는 아주 작은 교회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도 한 장소에 수 천 명이 모이는 어떤 대형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지역 여러 곳에 흩어져 모이는 작은 교회의 연합을 의미한다. 작은 교회가 오히려 아름답고 성서적인 교회일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2010.05.04. 15:46

[변화] 다이아몬드 고난

완성된 다음에는 비문이 그 집에 대 이야기해준다고 한다. 극작가 버나드 쑈는 "우물쭈물 살더니 내 이럴줄 알았다"라고 썼다. 안타까운 비문도 있다. "Here lies Atheist All dressed up and no where to go" (여기 무신론자가 잠들다. 옷은 잘 차려입었으나 정작 갈곳은 없다). 개그우먼 김미화는 "나는 남을 웃기는 게 너무 좋다. 내가 죽은 뒤 묘비에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쓰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평탄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런 삶을 기록하기위해 낭비된 지면은 없다. 오히려 무수한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관광에서는 '스토리텔링'이 매우 중요하다. 관광 명소를 방문할 때는 건물이 멋져서가 아니라 '역사의 흔적'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찮가지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만지신 흔적이 있는 인생이 가치있는 인생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흔적을 삶에 남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지난 11월 탈렌트 이광기가 신종플루로 아들을 잃었다. 그는 굉장한 실의에 빠져있다가 아들을 위해 들었던 보험금을 가지고 월드 비전을 찾았다. 그리고 아들이 그렸던 그림으로 T-shirt에 프린트해서 직접 아이티에 가져갔다. 순식간에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 셔츠를 가져갔다. 그는 간증하기를 꿈에서라도 헤어진 아들 '석규'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아이티에서 만났다면서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할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석규'를 잃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더 많은 아들을 얻게된 것이다. 고난이 오면 대번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삐져있는 사람들이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두 번 고통을 받는 것이다. 두 번 고난받게 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원래 탄소 덩어리다. 엄청난 압력을 받아 다이아몬드가 된 것이다. 압력이 없으면 숯덩이로 남는다. 삶속의 고난은 영적인 복이다. 사역자가 고통당하면 성도들이 더 은혜를 받는다. 왜? 사역자가 더욱 영적으로 깊어지기 때문이다. 더 매달리고 더 주님을 찾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고난당하도록 기도하지는 말라!!

2010.05.04. 15:45

[400자 큐티] 어느 여배우의 죽음

어느 여배우가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무대에 선다고 하는 것이 삶의 가장 큰 가치였습니다. 무대가 없는 그녀의 삶이란 무의미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불치병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연기를 그만두고 오래 살 수 있도록 평상적인 생활을 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한동안 그녀는 안정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들 그녀에게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삶에 의미인 무대를 떠나 사는 그 삶이 곧 나에겐 죽음이라고...그러던 어느 날 결국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녀야말로 영원히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조여와도 우리는 그 무대를 포기하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의 연기로 죽을 때 영원히 살 것입니다.

2010.05.04. 15:44

[미션의 향기] 가톨릭 신앙의 역사와 향기

얼마 전 부활대축일도 지나고 모처럼 한가했던 평일에 인근에 있는 미션을 찾았다. 화창한 봄날을 맞아 미션 뜨락에는 장미향이 가득하고 나비와 벌들이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너져내린 옛성당의 바위 틈에서도 이름 모를 풀꽃들이 다소곳이 머리를 내밀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 주었다. 남쪽의 샌디에이고부터 샌프란치스코 북방 솔라노에 이르기까지 캘리포니아주의 태평양 해변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21개의 가톨릭 미션은 1769년부터 1835년 사이에 스페인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각 미션 사이의 거리는 대략 하루 종일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정도로 하였으며 이 미션들은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챨스 3세의 명령에 의해 건설되었기에 650마일에 걸쳐진 이 건축물들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도로를 '왕의 길'이라는 뜻의 '엘 카미노 릴'이라 부른다. 미션의 기본 구조는 대개 비슷하여 성당과 종탑이 있고 선교사들의 숙소와 부엌 각종 공방(工房)이 둘러 있으며 군인들과 일꾼들의 막사 그리고 창고 건물들이 사각형 안뜰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미션이 캘리포니아 땅에 처음으로 가져온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이들 이방인들을 통하여 각종 가축과 과일 채소 곡식 공산품들을 포함하는 오늘날 우리가 소위 '문명'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줄곧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에게 '크리스천'이자 '문명인'이 되기를 강요하였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전통적 삶은 파괴되고 크게 유린될 수밖에 없었다. 미션의 설립과 빠른 확장은 항상 총칼을 든 군인들의 보호와 협조를 받았으며 이들 군인들의 임무는 오로지 식민지 영토를 넓혀 국익을 꾀하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이 땅의 주인이 되고 미션을 점차로 폐쇄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리고 다시 미국땅으로 바뀌는 역사의 뒤안길을 걸으면서 미션들은 쇠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제는 파란만장했던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역사의 유물로 서 있지만 아직도 그곳에 가면 가톨릭의 선교 역사와 캘리포니아만이 품고 있는 신앙의 향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오래된 미사제의와 도구 손때가 묻은 소박한 집기 등은 우리의 마음을 200여년 전으로 자연스레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평일이어서인지 방문객들이 한적한 가운데 아름다운 정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 성당 건물 뒤편에 있는 수도자 묘지에 이르렀다. 방금 지나온 앞뜰과는 달리 이곳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잡초와 이끼로 덮여 있는 곳이다. 200여 년 전 미지의 땅 이곳 신천지의 산과 들을 넘어 양들을 찾아 나섰던 목자로서의 그분들의 삶을 헤아려 보며 그분들이 생전에 살았던 치열했을 삶과 이제는 한 줌의 흙이 되어 남아있음에 마음이 뭉클해 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어야 하는 현세 삶의 무상함과 덧없음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고통과 슬픔을 기억한다면 성당 건물 너머의 밝고 아름다운 앞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평화와 부활의 기쁨 영원한 행복에 비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강하게 와닿았다. 부족하나마 목자의 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도 이 길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움들을 밑거름으로 미래를 향한 희망과 용기를 거기에서 얻고 주님께서 주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그런 사제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성지에서 겸손하게 은총을 구하는 마음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방문을 권고하고 싶습니다.

2010.05.04. 15:43

[지혜의 향기] 불자들이여, 주인의식을 갖자

무슨 일이든 우리가 주인이 돼서 다잡고 하는 것과 종이 되어 시키는 대로 하거나 손님으로 잠시 거드는 것은 그 태도나 열의 책임감과 성취감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난다. 꼭 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리 되도록 밀어붙이는 것과 돼도 그만 안 돼도 그 뿐인 것과의 차이다. 이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 엄청난 결과가 나는데 지금 미주의 한국 불교와 타종교의 현상적인 차이가 아마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의 주인은 사부대중이며 미주한국불교의 주인도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든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다. 그런데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불자들 중엔 이러한 주인의식이 별로 뚜렷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래서는 불교가 제대로 살아날 리 없다. 언젠가 어느 보살님이 이야기하길 자기 주위에는 성당이나 교회에 나가는 이들이 몇몇 있는데 얼마나 잘 해 주는지 스물 네 시간 늘 손과 발이 되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여러 해 동안 절을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아파도 들여다보는 이가 없고 차편이 없어도 태워 주겠다는 불자 하나 없어 섭섭하다는 것이다. 이런 불균형 속에서 그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본격적으로 따라 나가지를 않고 버티고 있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렇게 불자로 계속 남아 있는 것만 해도 부처님이나 스님들께 상당한 빚 갚음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며 웃으신다. 이해가 가는 얘기다. 다 아는 얘기지만 미국에서는 포교는 고사하고 자신만이라도 불자로 남아 있기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찌 보면 상당히 냉혈한이거나 고집불통이어야 가능하다. 때로는 위장술까지 동원해서 짐짓 어딘가로 나가는 교인인 체 해야 위기를 모면할 정도라니! 우리가 다 말 못하는 피해자들이요 무심한 가해자들이다. 바다를 건너와서도 이리 숨을 곳이 없으니 이곳 역시 사바세계 아닌가. 게다가 없어도 좋을 갖가지 고통마저 자질구레하게 구색을 갖추고 있을 줄이야! 그런데 이러한 괴로움 가운데 상당수가 실은 우리 불자들이 주인노릇은 안 해 보고 손님 대접만 바란 자업자득일 수 있다. 아까 말한 그 보살님도 남에게서 도움 받은 얘기만 하지 자기가 주인으로 나서서 베푼 기억은 별로 없으시다. 늘 손님으로 얻어먹는 사람으로 자신을 치부하니 입맛은 까다롭고 눈썰미는 날카로울 수 있어도 상황을 고쳐 나가거나 바꿀 힘은 없다. 아예 그럴 생각조차 못한다. 뭐든지 주인이 된다는 것은 엄두가 안 나는 일이고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으니까. 그런데 주인이 되는 일은 뜻밖에도 간단하다. 무슨 일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자기가 바라는 대로 첫걸음을 떼며 자신이 먼저 행동에 들어가면 된다. 일례로 절에 가면 아이들 놀데도 마땅찮고 놀이 기구도 없어서 자꾸 다른 데하고 비교가 될 것이다. 당장 스님과 상의해서 좁은 터라도 비집어 자리를 마련해서 조촐하게 꾸미면 된다. 필요한 것은 사거나 어디 가서 아쉬운 대로 얻어 오고. 마음이 문제지 꼭 하겠다면 이 정도 일들을 왜 못하겠나! 혼자서 안 되면 도움을 구하거나 동아리를 짜면 일이 수월해진다. 한글 교실도 그렇다. 요새 한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남의 아이든 내 아이든 한 둘이라도 앉혀 놓고 나 자신이 훈장 노릇을 시작하는 것이다. 배워서 남 주는 게 보시다. 더 잘 하는 사람 나타나면 넘겨주고. 먹는 것도 타는 것도 마찬가지. 나 자신이 음식을 해서 베풀고 내 차로 남들을 태워 줄 생각부터 내면 된다. 우리가 안 될 핑계를 찾자면 끝이 없다. 되는 일부터 하면 된다. 그러면 동조자가 나타날 것이고 부처님의 은근한 가피가 주위를 둘러쌀 것이며 불교가 하는 얘기에도 차차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것이다.

2010.05.04. 15:39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반야심경' 짚으며 복빌던 중국 불자

얼마 전 중국 항저우(杭州)의 영은사로 출장을 갔습니다. 규모도 꽤 큰 사찰이었죠. 법당 뒤 계단에는 '반야심경'의 전문이 약간 높은 돌벽에 새겨져 있더군요. 그런데 거기서 중국 사람들이 '폴짝폴짝' 뜀뛰기를 하고 있었죠. 팔을 높이 쳐들고 뛰면서 글자를 한 자씩 손바닥으로 '탁!' '탁!' 치더군요. '도대체 뭘 하는 거지?' 궁금해서 가까이 갔죠. 알고 보니 흥미로운 풍경이더군요. '반야심경'은 불교 경전 중 가장 짧은 경전이죠. 모두 270자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교의 핵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이죠. "불교의 팔만사천경이 모두 이 270자에 담겨 있다"고 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중국 불자들이 손바닥으로 치고 있는 글자는 참 뜻밖이더군요. 거기에는 '일관성'도 있었죠. 모두가 '得'(얻을 득) '多'(많을 다) '生'(살 생) '識'(알 식) 자 등을 짚더군요. 팔이 닿는 아래쪽의 글자 위에는 손을 올린 채 아예기도도 하더군요. 기도의 내용은 짐작이 갔죠. 돈을 벌고 그것도 많이 벌고 오래 살고 많이 배워서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어린 아이를 무동 태운 채 그런 글자를 짚게 하더군요. 사실 이런 기도를 한다고 탓할 수만은 없겠죠. 그건 인간의 바람이니까요. 그런데 '반야심경'의 글귀를 짚으며 이런 기도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반야심경'이 기복을 위한 '부적'은 아니니까요. 신실한 불자라면 화를 낼만도 하죠. 그런데 안타까운 건 '농락당한 반야심경'이 아니더군요. '형상을 통해 본질을 보고 본질을 통해 형상을 보라(색즉시공 공즉시색)'는 '반야심경'의 메시지 앞에서 기복으로 점철된 강고한 '나'를 꺼내는 그들의 마음이야말로 안타깝기 짝이 없더군요. 지난해 이맘 때 고우 스님(전 각화사 태백선원장)을 찾아갔죠. 그리고 물었습니다. "불교는 불(불상).법(경전).승(승려) 삼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어디에 부처가 있습니까?" 고우 스님은 이렇게 답했죠. "부처는 '불'에도 없고 '법'에도 없고 '승'에도 없습니다. 부처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의 자리에선 당연한 답이지만 중생의 입장에선 파격적인 대답이죠. 이걸 기독교식 문법으로 풀면 이런 물음이 됩니다. "십자가와 성경 그리고 성직자. 과연 어디에 예수가 있습니까?" 답은 또 이렇게 되죠. "예수는 십자가에도 없고 성경에도 없고 성직자에도 없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어떤가요. 이젠 그 '파격'이 피부에 감겨오나요. 결국 '마음'이죠. 예수가 살 곳도 부처가 살 곳도 결국 '마음'이죠. 그래서 '반야심경'을 짚으며 욕망을 키우는 중국 불자들의 마음이 더욱 안쓰럽더군요. 왜냐고요? 집착으로 점철된 '나의 마음'에선 부처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죠. 욕망으로 범벅된 '에고의 마음'으로는 예수의 마음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5장8절)" 잠시라도 아주 잠시라도 에고의 마음이 '텅' 비워질 때 '예수'를 만나고 '부처'를 만나게 되죠. 그게 바로 기독교의 '영성 체험'이고 불교의 '불성 체험'이죠. 그러니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2010.05.04. 15:36

[변화] 성경과 생산성

나는 요즘 새로 구입한 스마트폰으로 성경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스마트폰은 전화기라기 보다 작은 컴퓨터다. 인터넷도 GPS도 성경도… 안되는 것이 없다. 각종 '엡'(Application)으로 이것 저것 시도하다보면 금새 시간이 지나간다. 어디를 가든 세상을 한 손안에 쥐고 사는 느낌이다. 요 작은 녀석이 나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인간의 JQ의 집약체인 컴퓨터는 최근 유행했던 영화 '써로게이트'나 '아바타'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혼을 로봇에 넣었다 빼냈다하는 것 마저 상상케 하고있다. 금방 죽어야만 했던 사람도 컴퓨터 덕에 10년은 더 살 수 있게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컴퓨터 자판기는 여전히 영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A'자를 제일 작고 약한 새끼손가락으로 찍어야만 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작년 12월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중국 '우광 고속철'이 담배 한 개비 때문에 개통 1주일도 안 돼 운행이 중지되었다. 이날 사고는 한 승객의 흡연으로 경보장치가 울리면서 발생했다. 경보장치가 울리자 열차는 원인을 찾기 위해 무려 2시간 30분간 운행을 멈췄는데 이는 광둥성 광저우를 출발해 1100㎞ 떨어진 종점역인 후베이성 우한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중국 신화통신은 비꼬았다. 인간의 지혜는 늘 뒷북이다. 자동차가 수만 번 전복하고 충돌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서야 만들어진 것이 안전벨트고 에어백이다. 인간의 JQ는 오히려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준다. 성경은 인간의 이상적인 활동과 휴식을 6일 활동과 하루 휴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7일 만에 쉬던 것을 10일 만에 쉬게 했다가 국가적으로 40%의 손실을 보았다. 또한 구소련의 레닌도 8일 만에 쉬게 하여 노동생산성을 높이려고 했다.가 국가 전체의 생산지수가 30%나 떨어지자 이번에는 할수없이 5일만 일하고 6일 만에 쉬도록 했다. 그래도 효과가 없자 결국 성경대로 돌아갔다. 역사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활동주기가 가장 효과적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장수하는 민족인 유태인들은 장수 비결을 철저한 안식일 준수라고 주저 않고 말한다.

2010.04.27. 15:48

[400자 큐티] 죽음에 대한 사색 (2)

만일 우리에게 죽음이 없다면 현재의 모든 윤리나 철학 또는 법까지도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관이 달라지고 말 것입니다. 어차피 죽지 않는다면 열심히 일하며 살 필요도 없어질 것입니다. 살다보면 언젠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올 때가 있을테니까. 남녀간의 성윤리도 존재할 이유를 잃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살다보면 수없이 많은 사람과 결혼도 하게 될 것이고 아니 굳이 결혼이라는 틀에 얽매일 필요도 없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만 역시 그것은 상상일 뿐입니다. 육신을 가진 존재가 죽지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진정한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자살은 죽음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만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10.04.27. 15:48

[생활 속에서] 약점 많은 자여! 그 분을 보라

요즘 이상하게 'vulnerability'라는 단어가 자주 떠오른다. 이는 사전적으로 보면 '상처받기 쉬움' '약점이 노출됨'이라는 의미의 단어다. 약점이 노출되기 시작하면 비난이 따른다. 손가락질을 받아야 한다. "넌 자격이 없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누가 자격이 있을까? 그 어느 누가 목사 신부 승려 정치인 기자 교사 변호사 의사가 될 자격이 있는가? 물론 이런 직업을 갖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가 있지만 과연 이들은 그 일을 할 '진정한 자격'이 있을까? 이 세상에 자격이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 다만 그 일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그 일을 열심히 해나가야 할 숙명에 놓여졌을 뿐이다. 그들의 마음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정말로 자격있는 자 단 한 명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너무나 다행히 보통 사람에게는 투심력이 없다. 간음한 여자가 바리새인들에 의해 붙잡혀 왔을 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지라"고 했다. 돌을 던지는 자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등을 돌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은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것일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 비하면 양반이었던 것일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신은 수많은 죄를 지었으면서도 최근 죄지은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 냉정하고 냉혹한 사회다. 죄인들끼리 서로 손가락질을 해댄다. 그렇기에 우리는 '약점이 노출됨'을 싫어한다. 약점이 노출되는 순간 쉽게 상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약점이 많을 수록 '커버업'은 더욱 철저해진다.아니면 역반응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폭로전에 나선다. 기독교인이 읽는 성경은 '약점이 노출됨'을 권고하는 책처럼 보인다. 수많은 범죄와 그에 대한 징벌과 용서가 가감없이 노출된 책이 성경이다. 어떤 이는 이런 책을 어떻게 '성스러운 경전(성경)'이라고 할 수 있냐고 무시한다. 이런 부분은 삭제하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어김 없이 포함시켰다. 다윗이 자신의 장수의 아내인 밧세바를 탐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뺏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베드로가 의리없이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한 내용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가 십자가 처형 대신에 멋지게 세상의 왕으로 군림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성경은 '약점이 노출됨'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인 것이다. 왜 그럴까? 약함에 강함이 있기 때문이다. 빈 자리에 물이 차는 것처럼 약점이 많고 약함이 머무는 곳에 강한 물결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강한 곳에 강함이 들어갈 수 없다. 요즘 많은 이가 다양한 이유로 약함에 빠져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의 약점이 노출되고 있다. 상처 받을 일이 더 늘어났다. 무시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놀라운 위로가 저 하늘 위에서 내려온다. 약점과 단점이 노출된 이들이여 강하신 그분을 바라보자!

2010.04.27. 15:46

[사목의 향기] 백마디 위로의 말보다 미소가 큰 위로

미소 김효근 신부(성프란치스코 성당) 미소는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서도 많은것을 이루어 냅니다. 미소는 받는 사람의 마음을 풍족하게 해 주지만 주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미소는 번개처럼 짧은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기억은 영원히 남기도 합니다. 미소없이 살아갈 수 있을만큼 부자도 없고,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할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미소는 가정에서 행복을 꽃피게하고 직장에서 호의를 베풀게하며 친구사이에는 우정의 징표가 됩니다. 미소는 지친사람에게는 안식이며, 낙담한 사람에게는 격려이며 슬픈사람에게는 희망의 빛입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자연의 묘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소는 돈으로 살수도 구경할할수도 없으며 빌리거나 훔칠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소는 대가없이 줄때만 빛을 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한미소를 지어보세요 누군가에게 또 그 미소를 전해주세요. 그 미소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여져 사람의 마음을 풍족하게 해 줄거랍니다. 작은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작은사랑의 시작입니다. 할수 있다면 영원히 미소짓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글중에서- 나는 이 글이 마음에 들어 스크랩을 해두고는 가끔 읽어보곤 한다. 실로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때에는 열마디 말보다 한번의 작은미소가 요긴하게 쓸일때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때가 있다. 특히 삶에 지친 신자들에게는 사실 열마디 백마디의 위로의 말보다 얼굴에 잔잔히 머무는 미소가 큰위로가 될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미소는 수천개의 언어를 담을수도 있거니와 위로하고 싶긴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정어린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보았던 '베를린 천사의 시(詩)'라는 영화를 이곳에서 DVD로 다시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천사'라는 존재를 보다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것 같다. 세상의 태초부터 계속 천사의 일을 해오고 있는 천사들의 모습이 베를린의 한 천사들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천사들은 오직 어린아이에게만 그모습이 보이는데 비행기안에서 전철안에서 천사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조용히 미소를 보낸다. 그러면 아이들은 조용히 그 미소에 응답하여 환한 웃음을 짓는다. '무언(無言)'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온갖 언어가 함축되어 있는듯 했다. 천사는 전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읽으면서 그들의 고통과 삶의 애환등을 알게 된다. 그곳에는 노동자 주부 회사원 아가씨 총각 가난한 사람들이 타고 있다. 그들 가운데 삶에 지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실망과 좌절에 쌓여있는 한 청년의 곁을 지나가던 그 천사는 살며시 그 옆에 앉아서는 다정하게 그 청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에 가만히 자신의 고개를 기댄다. 그러자 그 청년의 생각은 갑자기 희망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렇게 희망적으로 생각을 바꾸는것에 적잖은 놀람을 표현한다. 천사는 작고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청년을 떠나 다른곳을 향해 걸어간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 천사의 잔잔한 미소가 강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영화를 보고난 지금까지도 그 미소가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보면 미소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가끔 LA시내의 한복판을 걷다보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대부분 비장한 결심을 한 사람들 처럼 굳은 얼굴이거나 무표정한 얼굴이다.간혼 연인처럼 부부처럼 보이는 그들의 얼굴에서 행복한 미소를 발견한다. 그래도 엄마손을 다정스럽게 잡고가는 어린아이의 미소는 그 자체로 순수하고 아름답다. 언제부터인가 성전앞마당을 돌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일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묵주기도를 하다가 성모상를 보노라면 성모님의 미소가 보인다. 눈의 착시인지 모르지만 그 미소는 괜시리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아마 그 미소는 성모님의 마음을 표현하는듯 하다. 맑고 순수한 사랑의 마음이라고 할까?

2010.04.27. 15:4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해

Q: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해서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아버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식물인간 상태로 뇌사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쯤 지났을 때 차도는 전혀 없고 환자의 고통이 너무 심하니 보조기구를 빼자고 했고 형제들은 반대했습니다. 결국에는 두세 달 더 형제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제가 주장해서 보조기구를 뺐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아버님에게 불효를 한 것은 아닌지 마음이 좀 무겁고 안락사나 존엄사에 대해 불자로서 어떤 관점을 가져야 지혜로운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안락사니 존엄사니 이런 생각하지 말고 태어났으면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죽으면 됩니다. 자살하면 안 됩니다. 또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도 안 됩니다. 또 죽을 때가 되어서 죽는 사람을 억지로 살리려고 지나친 약물 치료를 해서도 안 됩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도 반생명적인 행위이지만 일정한 신체의 명이 다해서 죽어가는 것을 억지로 살리려고 하는 것도 반생명적인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준다든지 병이 든 사람을 치료해 준다든지 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에 속하지만 늙거나 병이 깊어서 더 이상 치료 효과가 없는데도 잠깐 동안 약이나 기술을 써서 억지로 의식도 없는 사람을 붙들어놓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집착이지 그 사람의 생명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무덤에 가서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것이나 화장한 유골을 두고 섬기는 것 같은 행위는 모두 산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처럼 이미 뇌사했는데도 산소호흡기 꽂아놓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산 사람들의 집착입니다. 내 부모가 아니라 남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일이니까 그건 생명하고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내 부모라서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키는 것은 우리 마음의 문제이지 생명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첫째는 그 생명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생명이 끝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자식이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겠지요. 그건 내가 수행을 해서 집착을 놓도록 해야 합니다. 가는 사람에게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해줘야 합니다. 그걸 내가 못 놓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장례에 많은 돈을 쓰고 그 이후에도 이미 돌아가신 분과 관련해서 돈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을 돌려 보십시오. 단 1달러 10달러만 있어도 죽지 않고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약간의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생명들이 그 돈이 없어서 무수히 죽어가고 있는데 그것은 방치하고 내 어머니라는 한 가지 이유로 내 아버지라는 한 가지 이유로 엄청난 의료비를 써가면서 목숨을 몇 개월 유지시키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깊이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질문하신 분이 결정하신 행동은 불법에서 볼 때는 더 빨리 결정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오늘 뇌사하시면 가족들 마음을 위로해 주는 시간으로 며칠 기다렸다가 편히 보내드리는 게 좋습니다. 효의 차원에서 봐도 돌아가신 부모 무덤가에 가서 3년씩 지키고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을 잘 돌보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래도 자식 입장에서 부모님이 마음이 걸린다면 한 달 더 유지시키는 데 드는 비용만큼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시를 하는 게 좋습니다. 그것이 불법의 이치에 맞는 일입니다.

2010.04.27. 15:36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화두는? 목구멍의 밤송이 돼야

'화두'라는 게 뭘까요.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일화 속에서 쟁쟁한 선사들이 내뱉었던 '한 마디'만 화두일까요. '무(無)'자라든지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똥막대기'라든지 하는 말들만 화두일까요. 지난 주에 만났던 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죠. "화두는 목구멍에 걸린 밤송이가 돼야 한다. 삼키지도 못하고 꺼내지도 못한 채 '퍽!'하고 내 목에 걸려야 한다. 그래서 지금 당장 꺼내지 않고선 지금 당장 풀어내지 않고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야 한다." 그게 바로 '화두'라고 하더군요. '내 속의 절절함'이 없다면 '무'자를 들든 '마삼근'을 들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죠. 일전에 만났던 어느 처사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출가해서 10년간 화두를 들었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습니다. 결국 내 몸에 병만 생겼죠. 그래서 환속했습니다." 결국 그분은 '간화선'을 접었습니다. "너무도 비논리적"이라는 게 이유였죠. 그리고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수행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짭짤한 재미'를 보더군요. 지난주에는 한 외국인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스리랑카와 인도를 오가며 10년간 위파사나 수행을 하다가 한국의 선불교를 택한 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한국 선불교는 비논리적이라서 좋습니다. 논리를 통해선 결코 고통을 여읠 수가 없거든요. 남방불교는 끊임없이 '삶은 고통'이라고 되뇌는데 한국 선불교는 '삼라만상이 완전하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게 좋다"고 했습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A의 독이 B에겐 약이 되고 B의 독이 A에겐 약이 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화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봅니다. '화두'란 무엇인가요. 과연 당나라 송나라 때의 선문답 일화에 등장하는 몇 마디만이 '화두'인가요. 역사 속에서 선사들에 의해 검증됐다는 이유로 무조건 '화두'가 되는 건가요. 저는 달리 봅니다. '지금 여기'에서 생생하게 숨 쉬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라고 봅니다. '퍽!'하고 내 가슴에 박히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라고 봅니다. 내 안에서 '꿈틀꿈틀' 살아있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나'를 비움의 절벽으로 몰아가지 못하면 '화두'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화두'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깨달음을 향한 모든 절절한 물음을 '화두'라고 봅니다. 그게 '간화선'이든 '위파사나'든 아니면 '제3의 방법'이든 무슨 차이가 있나요. 그 모든 수행법의 종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부처의 자리'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팔만사천 경전의 의미를 한코에 꿴다면 말입니다. 중요한 건 사람에 따라 체질에 따라 좋아하는 '메뉴'가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21세기에는 수행법도 '골라 먹는 뷔페식'이 돼야한다고 봅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삶이 다르듯 비워야 할 삶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양한 메뉴를 준비해야죠. 채식을 하는 이에게 육식만 또 육식을 하는 이에게 채식만 강요해선 곤란합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메뉴도 갖추고 선택권도 줘야죠. '내가 걸었던 길과 다른 길'도 인정을 해야죠. 결국 구도의 종점에선 모든 길을 여의게 될 테니까요.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는 입적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말했죠. "왜 이리 슬피 우느냐. 너희가 내 가는 곳을 안다면 이렇게 슬피 울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죠. 간화선이든 위파사나든 그 종점을 안다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내겐 어떤 게 쉽고 빠르고 확연한가. 그걸 택하면 그만이죠.

2010.04.27. 15:33

[생활 속에서] 못을 빼도 상처는 남는다

성경에서 가장 두려운 말씀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은 그동안 뭔가 잘 못 심은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두려움이 되는 말씀인가?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심어야 하는 것 중에 가장 주의해서 심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일 수 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늘 누군가의 마음에 언어의 씨를 심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폭력은 언어의 폭력이다. 언어는 상대방의 마음에 평생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함부로 말을 한 그 사람이나 뒤끝이 없지 그 말을 들은 사람은 평생 상처로 남을 수 있다. 마치 못을 박은 다음에는 그것을 빼도 상처가 남는 것과 같다. 세상은 가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만 잘한다"고 한다. 또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물에 빠지면 입만 뜰 것이라"면서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같이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어떤 면에서 말이라도 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언어는 생산성이 있다. 곡식을 갈아 떡을 만들고 철을 녹여 칼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언어가 전달될 때 뭔가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단지 공중에 사라지는 소리의 파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마음에 전달된 언어는 뭔가를 생산하고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중요한 도구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때 지금 나의 언어는 무엇을 생산해 내고 있는지 물으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내가 쓰는 말이 곧 나의 현재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내가 쓰는 언어는 나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다. 내가 선한 말을 자주 쓰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덕스러운 말을 사용하면 덕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반대로 내가 악한 말을 하면 악한 사람이 되고 추한 말을 하면 결국 추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언어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사람을 고용할 때나 학교에서 학생을 뽑을 때 인터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 성품 미래의 가능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누에라는 곤충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명주실로 지은 집에서 산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 자신의 존재의 집을 평생 짓는 것이다.

2010.04.20. 15:20

[400자 큐티] 죽음에 대한 사색(1)

'죽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한번쯤 깊이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믿고 영생에 대하여는 자주 말하고 생각하지만 왠지 죽음에 대하여는 깊이 사색하는 일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영생이라는 개념도 의미를 가질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의 때를 맞이하는 숙명적인 과정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하여 성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분명한 사색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자살은 죽음에 대한 진솔한 사색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2010.04.20. 15:20

[변화] 구별과 분리

거룩이라는 말의 뜻은 구별됨이다. 세상과 구별되는 것을 '거룩하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거룩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상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 인정을 받을까?를 고민한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햇볕을 쪼이면서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아주 지독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이슬람인 들은 하루에 네 번씩은 어디에 있던지 성전을 향해 기도한다. 전설적 펀드매니저인 피터 린치는 '복리의 힘을 믿어라'라는 투자 금언을 남겼다. 원금에 이자를 붙여 다시 원금화하고 여기에 이자를 또 붙이는 복리는 두 얼굴의 곱셈이다. 저축하는 사람에겐 복을 주는 복리요 빚을 못 갚는 사람에겐 고통을 주는 폭리이다. 아인슈타인이 '가장 강력한 힘은 핵폭탄이 아니라 복리'이고 '복리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 했다. 이슬람교는 여전히 이자(리바)를 엄격히 금지한다. 이슬람인들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돈을 다루는 것에서부터 철저히 자신들을 세상과 구별한다. 유대교에는 식사와 관련해 카쉬룻(Kashrut)이란 율법이 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코셔(Kosher) 그렇지 못한 것은 트라이프(Traif)다.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는 '코셔'다. 어류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하고 육류는 되새김질을 하며 발굽이 갈라져야 한다. 소.양.염소.사슴은 먹기에 '합당'하다. 돼지는 '부정한 음식'이다. 인류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먹거리에서부터 그들을 세상과 구별시키셨다.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도 회당을 짓고 거기서 그들의 정체성을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성경은 한 세대를 40년으로 본다. 70년 만에 귀환할 때 무수히 많은 23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아버지의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분리됨을 원치 않으신다. 구별됨을 요구하신다. 나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있는가?

2010.04.20. 15:17

[사목의 향기] '존재하는 선교'의 의미

수도원 창문을 열며 봄 내음이 가득한 대지를 바라본다. 어느덧 이곳 프란치스코 한인성당에 부임해 온 지 1년이 되어간다. 처음 교포사목 소임을 받았을 때는 왠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같은 한국 사람들이지만 외국땅에서 서로 다른 정서와 문화 속에서 부딪치게 돼 낯선 상황들이 예상되면서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분명 이번에도 새로운 도전과 함께 당신 구원의 뜻을 펼쳐 나갈 것이기에 나를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에 나는 '예'하고 응답드리며 이곳에 왔다. 나는 성당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성모님께 나 자신과 본당공동체를 봉헌하면서 부활을 향한 하루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이곳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기도하는 것'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삶의 지향을 있는 자리에서 '성실하게' 사는 것에 두고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현실에 충실하고 만나는 모든 분들을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특별히 수도사제로서 인생의 중반기를 살고 있는 요즈음 나는 '무엇을 하는 것 doing'에서 부터 '존재하는 것 being'으로 변화해가는 것이야말로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 성숙해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우리들만의 잔치'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복음선포(선교)야말로 교회의 기본사명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 1615)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오 2819) 예수님께서 남기신 지상명령과도 같은 이 말씀은 2000년 교회역사를 통해 전 세계 교회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고 오늘의 나 역시 예수님의 뜻을 이곳 지역공동체에서 실현해 가기 위해 신자분들 한사람 한사람을 봉헌하며 기도하고 봉사하고 사랑하고 있다. 한국에서 본당 사목을 할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수도자들이 이러저러한 일을 하기보다는 기도하는 수도자 우리와 함께하는 수도자로 존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고 그들과 함께하는 수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아마도 그 속뜻은 수도자가 교회의 지도자 가르치는 사람 위에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리라. 짧은 경험이지만 교포사목은 어떤 능력을 펼치거나 일의 성공과 성취를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부서지고 상처입은 사람들 곁에 머물며 마음을 나누는 'being'의 사목이 꼭 필요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국을 떠나 낯선 이국 땅에서 겪어야 했던 교포들의 외로움 인종차별로 인한 상처와 아픔 생각과 말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언어 문제 등등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맘껏 피어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슬프고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처럼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부딪히는 체험들은 상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수 있다. 교포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면서 아픔에 공감하는 넓고 큰마음 사랑이다.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넉넉한 사랑의 품으로 안아 등을 두드려 줄 때 그들은 조금 더 여유있는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 길에 하느님께서 함께 해 오셨다는 믿음과 위안을 얻고 평화를 느낄 것이다. 이 마음으로 나는 현재 이곳 사도직 현장에서 만나는 신자분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싶다. 가르치고 지도하는 선교가 아니라 함께 나누고 섬기며 사랑하는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고 낮추시며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being 하신 것처럼….

2010.04.20. 15:17

[지혜의 향기] 편견없이 세상 바로보기

오늘은 시야를 좀 넓혀 세계사의 한 자락을 더듬어 보자. 지금으로부터 200~300년 전 쯤부터 지금까지의 세계사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서세동점의 시대였다. 서양의 큰 물결이 동양을 덮쳐 많은 지역이 그 그늘에 들어갔다. 그렇게 된 잘못은 동양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있었다. 어쨌든 동양은 숱한 굴욕과 회한 속에서 배울 건 배우고 참을 건 참았으며 견딜 건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사이 많은 서양 사람들이 동양에 와서 눌러 살거나 얼마간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데 서세동점이 마무리가 되어 가는 요즘 거꾸로 동양 사람들도 서양에 많이 오고 간다. 우리가 어찌어찌하여 미국이란 나라로 이민을 와서 이러고 있는 것도 그 끝마무리 물결 한 자락을 탄 것이다. 그런데 근세에 동양을 다녀갔던 이런 서양 사람들이 남긴 글들을 지금 읽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 때 우리도 몰랐던 것들을 제대로 파헤친 것이 많아 무릎을 치게 만든다. 한국도 동양의 한 귀퉁이였으니 예외가 아니다. 그 당시 한국은 여러 면에서 많이 피폐해 있었다. 동방예의지국에 삼천리 금수강산은 듣기 좋자고 한 소리였고 실상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속된 말로 형편 무인지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러한 사바의 고해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서 기껏해야 자기 피붙이나 한 고장 사람들만 챙기는 좁은 윤리의 울타리에 갇힌 채 고단한 삶을 근근이 엮어 가고 있었다. 이 때 서양에서 건너온 많은 성직자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이러한 불쌍한 중생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게 사실이다. 그들을 좁은 윤리 도덕의 울타리 너머로 이끌었으며 자신의 희생도 감수했다. 이러한 숭고한 마음이 행간에서 읽혀질 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해동포가 따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듯이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남긴 전기랄까 여행기의 어떤 대목에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하고 너무나 잘못 알고 터무니없는 설을 풀고 있어서 쓴웃음이 나오는 곳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대개 제법 배웠고 교양도 갖춘 상류의 식자층이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윗길에서 놀던 이들이 이 정도였으니 좀 아랫길의 서양 일반인들은 어땠을까? 동양에 대한 오해나 편견은 못 말릴 정도가 아니었겠나 싶다. 식자우환이라는 말도 있으니 혹시 그 반대일까? 뭘 좀 안다는 이들이 오히려 눈꺼풀에 무엇이 씐 듯 착각이 심할 때도 없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기야 내가 읽어 봐도 그렇다. 특히 오해와 편견이 극심한 부분이 이러한 지식인들이나 상류층 인사들이 기술해 놓은 동양의 정신문화 내지 종교에 관한 사항들이다. 그 가운데 불교나 스님 사찰에 대해 적어 놓은 것을 보면 너무나 까막눈이고 한심해서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싶을 때도 있다. 이는 거꾸로 뒤집어도 마찬가지다. 서양을 처음 보았던 동양 사람들이 남긴 글들에도 상대를 터무니없이 오해하여 낮추보거나 아니면 너무 지나치게 반해서 시쳇말로 뿅 가 버린 것이 많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래 보인다. 참으로 세상을 편견 없이 바로 본다는 것 부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바른 길 가운데 첫 번째인 그 '바로 봄'이 얼마나 만만찮은 일인 지가 새삼 일깨워진다. 그리고 이렇게 뭘 바로 보려면 우선 몸과 마음이 중심부터 잘 잡아야 할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중심 하나 잡는 것이 그리하여 심지 굳고 눈 밝은 참된 선비 참된 수행자 되는 길이 이리 어려운가 보다.

2010.04.20. 15:14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예수의 외국어, 내 안의 모국어

#풍경1 : 기독교의 방언을 아시나요? 때로는 외국어, 때로는 자신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이 입에서 줄줄 나오는 겁니다. 어떤 이는 그걸 ‘성령의 은사’라 하고, 어떤 이는 ‘하늘의 언어’라고 하죠. 또 어떤 기독교인은 방언에 대해 의문과 의심을 제기합니다. 이들은 “초대교회 시절의 성령 은사는 오늘날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죠. 심지어 방언을 부추기는 걸 “이단적이다” 혹은 “영적인 허영”이라며 비난하기도 하죠. 이처럼 방언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오랜 논쟁거리입니다. #풍경2 : 그럼 방언의 본래 뜻은 뭘까요? 신약성경이 처음 기록된 그리스어로는 ‘글롯사(glossa)’입니다. 혀, 사투리, 이방인의 언어, 외국어란 뜻이 담겨 있죠. 해석은 여럿이지만 공통분모가 하나 있죠. 다름 아닌 ‘방언=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란 겁니다. 그게 ‘랄랄랄랄라’ 하는 식이든, 생전 처음 듣는 외국어든, 정말 하늘의 언어든 말이죠. 그래서 ‘현문우답’은 물음을 던집니다. 방언이란 뭘까. 진정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뭘까. 제주도 토박이가 내뱉는 사투리를 들어본 적 있나요? 다들 고개만 갸우뚱하죠. 못 알아들으니까요. 그래서 방언이죠. 기독교의 방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낯선 언어는 뭔가. 낯선 땅에 대한 낯설디 낯선 소리가 대체 뭔가. 그래서 고개만 젓게 되는 소리, 그게 대체 뭔가. 맞습니다. 다름 아닌 ‘예수의 말씀’입니다. 성경 속 예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겐 ‘사투리 중의 사투리’입니다. 암만 들어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죠.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말씀마다, 구절마다 온통 물음표투성이죠. 왜 그럴까요. 아담과 이브의 후예가 사는 방식, 우리가 사는 방식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웃이 내 몸이 되게끔 살지 않죠. 어느 누구도 가난한 마음을 향하지 않죠. 어떤 사람도 자처해서 남의 종이 되지 않죠. 어떤 부모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의 말씀은 ‘이방인의 언어’일 뿐입니다. 그러니 방언이죠. 내 손으로 짚고, 내 눈으로 읽고, 내 귀로 듣고도 그 뜻을 모르니 방언이 되는 겁니다. 듣고 보니 절망적이세요? 그렇진 않습니다. 예수의 방언은 ‘영원한 방언’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 방언이 터져서 모국어가 되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그게 바로 부화의 순간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탁!’하고 깨져서 부화하는 순간이죠. 그때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그걸 위해서 묵상을 하고, 피정을 하고, 기도를 하고, 나눔을 갖는 거죠. 성경에도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이 더 낫다.”(고린도 전서 14장19절) 그러니 따져봐야죠. 진짜 방언이 뭔가. 진짜 하늘의 소리가 뭔가. 예수는 하늘과 하나 되신 분이죠. 그러니 그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하늘의 소리가 나오는 거죠. 그런 하늘의 소리를 모은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문제는 그 책이 우리에겐 ‘사투리 모음집’ ‘방언의 집합체’란 겁니다. 그럼 어찌할까요. 어떡해야 ‘예수의 외국어’가 ‘내 안의 모국어’로 바뀔까요. 그 구체적인 지침서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예수는 세세한 방법론까지 제시를 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이웃을 네 몸으로 여겨라. 하나로 보고, 하나로 생각하고, 하나로 행동하라”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쌓아두지 마라” “불완전한 네 뜻을 무너뜨려라. 그럼 완전한 아버지의 뜻이 드러난다.” 문제 속에 답이 있고, 답 속에 문제가 있죠. ‘예수의 외국어’도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나씩 행할 때 ‘내 안의 모국어’로 바뀌는 싹이 트겠죠.

2010.04.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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