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활대축일도 지나고 모처럼 한가했던 평일에 인근에 있는 미션을 찾았다. 화창한 봄날을 맞아 미션 뜨락에는 장미향이 가득하고 나비와 벌들이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너져내린 옛성당의 바위 틈에서도 이름 모를 풀꽃들이 다소곳이 머리를 내밀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 주었다.
남쪽의 샌디에이고부터 샌프란치스코 북방 솔라노에 이르기까지 캘리포니아주의 태평양 해변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21개의 가톨릭 미션은 1769년부터 1835년 사이에 스페인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각 미션 사이의 거리는 대략 하루 종일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정도로 하였으며 이 미션들은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챨스 3세의 명령에 의해 건설되었기에 650마일에 걸쳐진 이 건축물들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도로를 '왕의 길'이라는 뜻의 '엘 카미노 릴'이라 부른다. 미션의 기본 구조는 대개 비슷하여 성당과 종탑이 있고 선교사들의 숙소와 부엌 각종 공방(工房)이 둘러 있으며 군인들과 일꾼들의 막사 그리고 창고 건물들이 사각형 안뜰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미션이 캘리포니아 땅에 처음으로 가져온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이들 이방인들을 통하여 각종 가축과 과일 채소 곡식 공산품들을 포함하는 오늘날 우리가 소위 '문명'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줄곧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에게 '크리스천'이자 '문명인'이 되기를 강요하였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전통적 삶은 파괴되고 크게 유린될 수밖에 없었다. 미션의 설립과 빠른 확장은 항상 총칼을 든 군인들의 보호와 협조를 받았으며 이들 군인들의 임무는 오로지 식민지 영토를 넓혀 국익을 꾀하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이 땅의 주인이 되고 미션을 점차로 폐쇄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리고 다시 미국땅으로 바뀌는 역사의 뒤안길을 걸으면서 미션들은 쇠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제는 파란만장했던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역사의 유물로 서 있지만 아직도 그곳에 가면 가톨릭의 선교 역사와 캘리포니아만이 품고 있는 신앙의 향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오래된 미사제의와 도구 손때가 묻은 소박한 집기 등은 우리의 마음을 200여년 전으로 자연스레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평일이어서인지 방문객들이 한적한 가운데 아름다운 정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 성당 건물 뒤편에 있는 수도자 묘지에 이르렀다. 방금 지나온 앞뜰과는 달리 이곳은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잡초와 이끼로 덮여 있는 곳이다.
200여 년 전 미지의 땅 이곳 신천지의 산과 들을 넘어 양들을 찾아 나섰던 목자로서의 그분들의 삶을 헤아려 보며 그분들이 생전에 살았던 치열했을 삶과 이제는 한 줌의 흙이 되어 남아있음에 마음이 뭉클해 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어야 하는 현세 삶의 무상함과 덧없음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고통과 슬픔을 기억한다면 성당 건물 너머의 밝고 아름다운 앞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평화와 부활의 기쁨 영원한 행복에 비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강하게 와닿았다.
부족하나마 목자의 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도 이 길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움들을 밑거름으로 미래를 향한 희망과 용기를 거기에서 얻고 주님께서 주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그런 사제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성지에서 겸손하게 은총을 구하는 마음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방문을 권고하고 싶습니다.
# 100420_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