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고 시절 황규봉 투수와 함께 야구부 창단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실업야구에서 노히트 노런 2번,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대륙간 컵) 대회에서 강호 미국을 꺾고 세계대회 첫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MVP와 함께 최다승과 구원투수상을 한꺼번에 받는 등 3관왕을 차지한 투수, 그런가 하면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MBC 청룡 이종도에게 역전 만루 홈런을 맞고 마운드에서 쓰디 쓴 패배의 눈물을 흘렸던 주인공. 그가 바로 이선희다.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에서 만루 홈런을 쳤던 이종도와 OB 베어스의 김유동은 영웅이 되었지만 이선희는 그 뒤로 만루 홈런의 아픈 추억을 그리며 선수 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일생일대의 큰 사건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그는 고교야구 최고의 철완(鐵腕)으로 불리던 남우식의 뒤를 이어 황규봉과 함께 우백호 좌청룡 투수로 활약하면서 경북고 신화를 이어나간 장본인이자 아마야구 최고의 왼손잡이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스타플레이어였다.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단 1패도 허용하지 않아 일본 킬러로 불리었다.
짝잽이(왼손잡이 투수를 야구선수들은 이렇게 부른다) 투수가 귀하던 당시로서는 그의 출현은 야구계의 커다란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여세를 몰아 1982년 프로야구 데뷔해서 첫해 15승 7패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역시 이선희’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개막전과 한국 시리즈에서의 결정적인 만루 홈런의 충격 때문일까. 이듬해 5승 13패, 2승 4패로 실력이 급전직하 하게 되고 결국 MBC 청룡의 이해창 선수와 트레이드가 된다. 당시 MBC 청룡은 유종겸 투수로만 버텨온 터라 왼손 투수가 절실했고, 삼성 라이온스는 빠른 발과 센스 있는 1번 타자가 필요했던 터라 이해창을 데려 오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재일교포 김일륭의 영입으로 팀내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에 이선희의 트레이드는 서로가 밑지지 않는 장사였다고 평했었다.
그리고 그의 투구 폼을 보면 정통파 투수의 투구 폼은 아니다. 약간 사이드 암(Side Arm)에 가까운 투구 자세로 볼을 던지는데 그런 특이한 폼으로 타자들을 공략했기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그의 투구 자세를 보면 공을 던진 후에 투수는 끝까지 공을 주시하고 타자를 봐야 하는데 고개가 먼저 숙여진다.
마치 좋게 말하면 칠 테면 쳐보라고 배짱으로 던진다고 볼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던지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투구 폼이 그의 성적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혹자는 이선희가 아마야구에서 너무 혹사당해서 선수생명이 짧아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프로야구 초장기만 하더라도 아마야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유능한 투수들이 감독들의 무리한 등판 요구에 못 이겨 일찍 마운드를 떠나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특히 감독들의 팀 성적에 연연한 선수 선발이 문제였던 것이다. 하루 빨리 한국야구도 선진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한국 사람들에게 아주 적합한 종목이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체격 조건도 일본보다 우세하고 기술적인 자질 면도 제대로 갈고 닦으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길러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면들을 해마다 칼 립켄 세계야구대회를 취재하면서 느끼는 바이다. 좋은 투수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여러 선수들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선희를 가까이 해본 사람이라면 그가 고된 훈련을 하는 모습 이외에는 화를 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지녔던 이웃집 아저씨같이 주위사람들에게 푸근함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운동만 잘하는 게 아니라 품성도 좋은 제 2, 제 3의 이선희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