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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최초의 '100승 투수' 김시진

한국 야구대표팀이 중국 광저우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 게임에서 승리의 소식을 계속 전해 주고 있다. 이미 한국 대표팀은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낙점(落點)된 상태이다. 오늘은 대표팀 투수 코치를 맡고 있는 김시진 투수 코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얼마 전 화제가 된 이야기는 기아 투수인 양현종에게 빠른 슬라이더 던지는 법을 전수해주었고 대표팀 막내 김명성에게도 특별 과외를 해 준 사실이다. 모두가 팀으로 돌아가면 적으로 만나 배운 것을 써 먹을 수 있는데 아낌없이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존경스럽다. 김시진 감독은 현재 팀 살림이 어려운 만년 하위 팀인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을 맡아 성공적으로 팀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다른 감독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만약 김 감독이 아니었더라면 넥센 히어로즈는 벌써 공중분해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많은 야구인이나 팬들도 이러한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 히어로즈가 지금까지 버텨온 배경에는 모든 선수들이 김시진 감독의 리더십과 이러한 인품에 감동되어, 연봉이 반 이상 삭감을 당하는 프로 선수로서는 굴욕적이고 열악한 조건에서도 히어로즈에 남아서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김 감독을 덕장(德將)이라고 말하며 그의 겸손함이 그의 ‘치명적 매력’이라고 그를 평한다. 김시진 감독은 야구 명문 대구상고에서 이만수와 배터리를 이루면서 화려하게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 당시 최동원, 김용남과 함께 고교투수 트로이카로 활약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또한 국가대표 에이스로 최동원과 함께 한국야구가 세계대회에서 정상에 서는데 한몫을 하게 됐다. 김시진은 83년 경리단에서 제대하고 연고지인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그 당시 김시진의 제구력은 빙그레의 이상군이 나오기 전까지 타의 추종을 마다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선동렬이 나오기 전까지 ‘슬라이더의 달인’으로 통했었다. 고교, 대학, 프로에서 12년 넘게 함께 배터리를 이루었던 이만수 SK 수석 코치의 말이다. 그러면서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야구 처음으로 100승 투수가 되는 영광을 맛보게 됐다. 아울러 지금도 깨지지 않는 20승 투수로 전성기를 누렸던 한국 최고의 투수 3인방으로 꼽히는 선수였다. 상종가를 달리던 그가 무리한 등판으로 어깨를 혹사하는 바람에 전성기를 오래 끌고 가지는 못했다. 그 당시 마구잡이식 등판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이다. 최동원과는 동갑내기로 두 사람간의 우정도 남다르다. 한때 서로가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되는 굴욕적인 사건이 터지는데 바로 ‘선수회 설립’을 최동원과 앞장서다가 두 사람 모두 구단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유니폼을 맞바꿔 입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이후 롯데에서 3년간 선수 생활을 더 한 후에 태평양에서 지도자의 길을 건기 시작해서 후신인 현대 유니콘스에서 투수코치로 일하면서 팀을 4번 한국시리즈 우승 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그가 지도자로서 얼마나 훌륭한 길을 걸어 왔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제자들이었던 정민태, 정명원, 조웅천, 최창호 선수들이 찾아와 통곡을 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김시진 감독의 ‘치명적 매력’이다.

2010.11.18. 17:54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이해창·이병훈 "우린 선후배"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 윤석민(KIA) 투수가 국가대표로 처녀 출전하는 후배 임태훈(두산)에게 “태훈아, 형이 금메달 따줄게”라고 말하면서 각별한 후배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 동안 우여곡절로 대회 직전에 엔트리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 자리에 윤석민이 대신 뽑혀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면서 병역면제 혜택을 받았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윤석민은 이번 대회를 통해 후배인 임태훈을 위해 열심히 뛰어 금메달을 따 그도 또한 병역면제 혜택을 받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참으로 애틋한 동료애와 후배 사랑이 담긴 이야기이다. 이런 야구선수들의 선후배 관계는 다른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선후배 관계는 출신 학교를 떠나서도 이어진다. 물론 같은 학교 동문이라면 더욱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학교 전통을 바탕으로 고락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렇다. 사진에서 보는 이해창(전 MBC프로야구선수)과 이병훈(현 프로야구해설위원)은 15년 차이가 나는 선후배간이다. 한 마디로 이해창 선수가 아저씨뻘 되는 나이이다. 비록 나이 차이는 엄청나게 나고 세대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 대 선배이고 자신이 존경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이병훈에게 있어서는 이해창이 자신의 선수상(選手像)인 것이다. 이러한 선배가 있으므로 그 선배같이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운동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더욱 빠르게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의 후배를 직접 지도해 주거나 가르치지는 않지만, 이것이 훌륭한 선배가 후배에게 전해주는 간접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존경하는 선배를 만나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고 힘이 솟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고등학교 선수가 자신이 갈망하는 프로야구 세계에서 스타플레이어로 활약하는 선배를 만났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이후 이병훈 선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쳐 이병훈이 졸업 후에 프로야구 LG 팀에서 활약하도록 하는 활력소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재일동포 선수들이 장훈 선수와 가네다(김정일-일본 귀화 선수)를 보고 훌륭한 야구 선수가 되었듯이 훌륭한 선배를 보고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워 현재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거의 다라고 생각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본다. 박철순, 최동원, 선동렬 투수를 보고 투수의 꿈을 김우열, 이만수, 장효조를 보고 타자의 꿈을 키운 선수들이 올림픽을 제패하고 WBC에서 준우승을 거두는 선수들로 성장한 것이다. 이제 아시안 게임이 얼마 안 남았다. 우리 대표 선수들이 잘 싸우도록 우리 모두 응원을 하자.

2010.11.04. 19:15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22게임 연속 안타의 주인공' 이정훈 (2)

이정훈의 별명은 ‘악바리’이다. 나는 이 별명에 대해 좋은 면도 있지만 반대로 나쁜 면도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긍정적인 면은 운동선수라면 시합할 때는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해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하지만 부상을 무릅쓰면서까지 경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프로와 아마추어(Amateur)와의 차이인 것이다. 프로는 운동이 직업인 사람이다. 쉽게 말해 운동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고 가족들을 부양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하나의 분리된 개인 회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개념으로 볼 때 선수 개인의 부상은 회사가 경영난에 빠져 어려워지거나 부도로 인해 파산하는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한 순간 멋진 플레이를 팬들에게 보여 주려 하다가 혹은 자신의 기록이나 승부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한 플레이를 하다가 부상을 당해 그라운드에 다시 서서 좋은 플레이를 팬들에게 보여 주지 못한다면 요즈음 소위 말하는 반짝 뜨고 사라지는 스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정훈도 비슷한 실수로 인해 자신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킨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1989년 방위소집을 마치고 스프링 캠프에 참여하지 못한 상황에서 급하게 몸을 만들려고 개인연습을 지나치게 많이 하다가 탈이 났다. 직선 타구를 받다가 허리가 삐끗했다. 그러면 일단 연습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고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는 것이 순서인데 오히려 오기를 부려 타격 연습을 무리할 정도로 더한 결과 그 이튿날 응급실로 실려 가는 신세가 되 버렸다. 척추인대가 손상되었던 것이다. 운동은커녕 누워서 안정을 취하면서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배팅 연습에 지압까지 받았으니 척추가 온전했겠는가 말이다. 한 달간 입원해서 용변을 받아내는 치명적인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면서 자신의 몸을 혹사 시켰다. 그 뒤로도 그는 계속 허슬(Hustle)플레이를 시도하다가 어깨를 다치면서 시즌을 접으면서 타율왕의 자리도 함께 팀 동료인 고원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고 연습 도중 후배 정민철에게 달리기 시범을 보이다가 발목 인대가 끊어지고, 깁스를 한 채로 스윙 연습을 하루에 수천 번씩 하다가 오른쪽 손목 인대마저 끊어지는 불행을 겪게 되면서 장효조를 뛰어 넘을 ‘미래의 전설’이라는 타이틀을 악바리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손에 다 쥐었다가 놓치게 된다. 물론 그 당시 한국프로야구 실정이나 한국 의료 수준이 지금처럼 높은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으로 아까운 선수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선수생활을 일찌감치 마감해야 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흔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수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본다. 프로선수 자신의 몸이 기업체나 마찬가지인데 기업 경영에 무리수를 둔 결과 회사 문을 일찍 닫게 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이것이 선진야구와 고급 야구를 하는 미국과 일본에 비교되는 한국야구의 과거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를 교훈 삼아 제 2, 제 3의 이정훈이 안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0.10.28. 18:25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

SK 와이번스가 4연승 파죽의 기세로 코리안 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그래서 이정훈 성수의 두 번째 이야기를 다음 회로 미루고 오늘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김성근 감독의 이야기를 해 보겠다. 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재일교포 출신 감독이다. 1942년 생으로 일본 교토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전거로 우유배달을 하면서 다리 힘을 기르기 위해 엉덩이를 안장에 닿지 않게 하면서 페달을 밟으면서 체력을 키웠고, 공사장에 버려진 벽돌 조각을 던지면서 피칭연습을 하면서 투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한국야구와의 인연은 재일동포 학생 모국 방문 경기 때 어머니 나라를 처음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1962년 기업은행 창단 멤버로 한국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이 때부터 6년 간 좌완 투수로 활약하다가 27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은퇴를 한 후 마산상고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기업은행 감독으로 다시 실업 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 뒤로 충암고, 신일고 감독을 지내다가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 되면서 OB베어스 투수코치로 프로야구에 몸을 담게 된다. 그 해 OB가 우승을 하는데 투수코치로서 한 몫을 하게 된다. 불사조 박철순이 있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개 은행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게 되면 은행에 남아 은행원으로 근무를 하는 게 당시 상례였는데 그는 서툰 한국말 때문에 창구에서 고객을 접수하는데 문제가 있어 그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독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을 하게 된다. 그 당시 그의 별명은 쪽발이였다. 그 정도로 우리말이 서툴렀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발음이 서툰 부분이 있는데 그 때는 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멸시를 받으며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국 최고의 야구감독이 되는 것뿐이라고 결심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기에 이른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상대 팀이라 해도 찾아가 묻고, 그 듣고 보고 배운 것을 꼼꼼히 수첩에 기록하는 습관을 길러 나갔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김성근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데이터 야구이다. 그의 뒷주머니에는 항상 두툼한 수첩이 꽂혀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자기 팀 선수들에 대한 기록 뿐 아니라 상대 팀 선수들의 장단점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를 군거로 작전을 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84년부터 88년까지OB 베어스의 사령탑을 맡게 된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 벌써 39년! 내일모레면 70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지금 한국프로야구에서 현장에서 뛰는 최고령자이다. 그러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SK 와이번스를 세 차례나 한국야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는 SK에서 우승 감독이 되기 전에는 항상 성적이 나쁜 팀에서 주로 찾는 감독이었다. 일종의 저니 맨 감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휘하는 팀마다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었다. 태평양 돌핀스 감독 때도 그랬고 쌍방울, SK도 최하위 팀을 한번도 아니고 3번씩이나 정상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야구의 신’이라는 말을 줄여 만든 ‘야신(野神)’이라는 별명이다. 재미있게도 이 별명은 한국시리즈를 9번씩이나 제패했던 김응룡 감독이 지어 주었다는 점이다. 한국시리즈에서 혼이 났던 김응룡 감독이 얼마나 혼이 났으면 이런 별명을 지어주었겠는가 말이다! 야구인들 사이에서 그를 평할 때는 “야구밖에 모르는 사람”, “야구에 미친 사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 결과는 1000승 이라는 대기록 달성이다. 이 기록은 김응룡 감독이 세운 1476승 버금가는 기록이다. 이 기록이 더욱 값진 이유가 있다. 김성근 감독은 한 쪽 신장이 없다. 야구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얻은 암(癌) 때문이었다. 그는 시합 전날에는 밤을 새 가면서 전력을 분석한다. 그리고 시합 중에는 화장실에 가지를 않기 때문에 신장에 탈이 났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집념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루에 펑고(한국에서는 노크라고 한다-야수들에게 공을 쳐는 것)를 1000개 이상 치면서 암과 싸워 나갔다. 결국은 암을 극복하고 오늘의 영광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 것도 10년 이상을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말이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였던 것이고 한편의 드라마였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그의 야구를 쉽게 폄하한다. 스몰 야구를 한다. 쪽발이식 야구를 한다. 그러나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준 그의 전략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무색하게 하고도 남는 멋진 승부를 팬들에게 보여 주었다. 한국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 됐다는 삼성을 네 번 연속 침몰 시키면서 말이다. 그의 불굴의 인생 역정과 함께.

2010.10.21. 17:3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22게임 연속 안타의 주인공 이정훈

빙그레 이글스에 ‘땅꼬마’ 4형제가 있었다. 제일 큰형이 김종수이고 둘째가 이광길, 셋째가 김성갑 그리고 막내가 이정훈이다. 네 사람 모두 키가 작고 악바리지만 그 중에서도 막내 이정훈 선수가 가장 돋보였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야구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남달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이면 육상, 축구면 축구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발달했었다. 이런 이정훈이 야구를 택하게 된 것은 대학 때까지 야구를 했던 작은 아버지의 권유에서였다. 그는 경상중학교를 거쳐 대구상고로 진학을 하게 된다. 그 당시는 대구상고가 경북고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다행히 고교 2학년 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4강에 들면서 체육특기자 자격을 얻어 평상시 존경하던 강병철 감독이 이끄는 동아대로 진학을 하게 된다. 이정훈의 말에 의하면 첫째는 강감독의 잘 생긴 외모에 반했고 두 번째는 “학교 간판은 보지 말고 내 니를 키워 줄 테니 동아대로 오라”는 말에 고려대, 한양대, 건국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물리치고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그러던 강병철 감독과의 인연도 잠시였다. 그가 롯데 코치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동아대는 대학야구 최강팀이었고 강병철 감독은 국가대표 감독이었고 투수 박동수, 오명록, 김한조, 김진욱에 이어 김상훈, 이동환 그리고 조성옥까지 초호화 멤버로 구성된 팀이었다. 동아대 전성기였던 때이다. 이 때 이정훈은 중견수로 활약하기를 바랐는데 후임으로 온 어우홍 감독이 우익수를 맡으라는 지시에 화가 나서 항명을 하다가 일년을 허송세월로 보내게 된다. 이 항명 사태는 대표팀 선발에까지 영향을 끼쳐 대표팀 유니폼을 입어보지 못하고 1987년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입문하게 된다. 본래 그의 연고팀은 삼성 라이온스이었지만 삼성이 그를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프로선수로 뛰게 된다. 그는 프로로 데뷔하자마자 펄펄 날랐다. 첫해에 124안타를 치면서 신인최다안타 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22경기 연속 안타라는 신기록을 수립했던 것이다. 당연히 학창 시절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강기웅과 유중일을 제치고 신인왕이 돼 2인자라는 그늘에서 당당히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장종훈, 전대영, 이강돈, 강정길, 고원부와 함께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도화선 역할을 하는 타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정훈은 연습벌레로도 소문나 있다.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았던 필자도 천부적인 자질도 자질이지만 악바리라는 별명이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니구나 라고 느낄 정도 피나는 노력을 하는 친구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결국은 이 무리한 연습이 그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켰지만 말이다. 그는 방위복무 중에도 96게임을 소화했는데 그때도 3할대 타율을 유지할 정도로 훌륭한 선수였다. 그 같은 악착같은 성격이 91, 92년 연속 타격왕이 되는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자기 몸을 돌 볼 줄 모르는 성격이 오히려 자신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이럴 때 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도를 지나치면 해가 오게 마련이다. 그가 자신을 몸을 혹사시키지 않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팬들에게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었을 텐데 라는 진한 아쉬움을 남기는 선수였다.

2010.10.14. 17:25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학(鶴) 다리' 신경식

스포츠에서 키가 커서 득(得)을 보는 경기는 농구이다. 그 외 다른 스포츠에서는 적당히 큰 선수가 대개 유리하게 마련이다. 야구는 키가 크다고 좋은 운동만은 아니다. 키가 커서 좋은 포지션은 투수와 외야수들이다. 반면에 내야수들은 적당한 키만 갖고 있으면 수비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내야수 가운데 키가 크면 유리한 포지션이 1루수이다. 왜냐하면 내야수들의 송구가 나쁠 경우 공을 잡아낼 수 있는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내야수가 볼을 원 바운드로 던지거나 높게 던질 경우 1루수가 키가 크면 쉽게 잡아낼 수가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장점을 가장 잘 살린 1루수가 바로 OB 베어스에서 활약하던 신경식 선수이다. 그는 롯데 자이언트 3루수였던 김용희보다 2㎝가 작은 188㎝였지만 유난히 다리가 길었다. 그 긴 다리를 여자 체조 선수처럼 그라운드에 닿을 정도로 벌려 공을 잡아내기 때문에 학(鶴)다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 긴 다리 때문에 내야수들이 덕을 많이 보았다. 다리를 길게 뻗쳐서 공을 잡기 때문에 다른 1루수가 수비를 할 경우 주자(走者)가 세이프가 될 상황인데 간발의 차이로 타자를 아웃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리 찢기 수비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면 우연한 기회에 다리가 미끌어지면서 공을 받았는데 아프지 않아서 그 뒤부터 계속해서 그런 자세로 공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방망이가 잘 안 맞는 날이면 일부로 더 그랬다. 그 덕분에 수비 에러가 가장 많은 유격수 유지훤이 제일 덕을 본 선수이다. 그 당시 신경식과 라이벌이었던 1루수는 롯데 자이언트에 김용철 선수가 있었는데 아이들끼리 모이면 누가 더 잘하네 하면서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는 게 어린이들의 즐거움이었다. OB 베어스를 좋아하는 아이는 신경식의 학다리 수비가 더 멋있다고 자랑을 하면 다른 아이는 김용철이 타격이 더 좋기 때문에 김용철이 더 잘한다고 서로 우기던 기억이 난다. 신경식은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올림픽 국가대표팀 김경문 감독의 후배가 된다. 이 두 사람은 1982년 같은 해 OB 베어스에 입단해 프로야구 원년 우승의 기쁨을 같이하는 선후배 사이다. 지금은 감독과 코치로 한솥밥을 먹고 있는 처지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면 순진한 소년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는 주자를 아웃시킨 다음에 투수에게 공을 건네 줄 때는 공을 꼭 유니폼에 닦거나 아니면 두 손으로 정성껏 닦아 주는 투수에 대한 배려(配慮)를 잊지 않는 선수였다. 아마 팀이 승리하자면 투수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끝까지 게임을 잘 이끌어 나가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그렇게 정성껏 닦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진솔한 모습이 그가 83년 올스타 투표에서 89.9역대 최고 득표율로 베스트 10에 뽑히는 영광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선수는 운동만 잘한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선수 생활이 끝나고 은퇴 후에도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기억 속에 두고두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 못지않게 스포츠맨십과 인성(人性)이 좋아야 선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시대에 신경식이 투수에게 나타냈던 따뜻한 행동은 우리의 마음도 따뜻하게 하는 추억이 된다.

2010.09.30. 17:05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야구 선수의 분신 배트 (2)

현재 프로선수들이 사용하는 방망이는 지난 110여 년 간 사용해온 북미산인 물푸레나무와 일본 북해도산 백목으로 주로 만듭니다. 요즘에는 단풍나무를 깎아서 만든 배트가 선수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 약간 무겁지만 물푸레나무로 만들 배트보다 탄력이 더 좋아 대형 타자들이 즐겨 사용한다. 그 좋은 예는 프로 야구 최다 홈런을 기록한 베리 본즈의 방망이가 바로 단풍나무로 만든 배트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배트가 일반 선수들의 배트보다 짧게 보인다. 그렇다. 배트의 길이는 줄였지만 대신 무게가 일반 배트와 비슷하기 때문에 타이밍을 맞추기가 쉬우면서 공을 멀리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이다. 이토록 야구 배트는 타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몸의 일부처럼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방망이로 인한 사건도 종종 일어난다. 2005년 6월 3일 메이저리그 야구경기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홈런타자로 명성이 드높았던 시카고 컵스의 새미 소사 선수가 1회 타석에서 배트를 부러뜨렸던 것이다. 프로야구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부러진 배트에서 코르크가 나왔기 때문에 새미 소사는 부정배트 사용 이유로 즉각 퇴장 명령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부정배트는 일반 나무배트의 끝에 2.5cm 직경 구멍을 뚫어 15~25 cm 정도 파낸 후 그 공간에 나무보다 가벼운 물질(코르크, 스티로폼 또는 탄성고무)을 삽입하고 끝을 나무로 마감하여 만든다. 겉모양은 일반배트와 똑같기 때문에 구분을 할 수 없지만 850~900g 하는 일반배트보다 50g 이상 가벼워질 수 있다. 운동역학적으로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선수들이 부정 배트의 유혹에 빠져든다. 첫째는 같은 생김새에 비해 가볍게 느껴져 스윙 스피드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반발력을 크게 증가시켜 같은 힘으로 스윙을 했을 때보다 더 비거리(飛距離)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슷한 사건이 70년대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있었다. 홈런왕 왕정치가 사용했던 배트가 부정 배트였다는 것이다. 얘기인 즉슨 왕정치를 위해 제작된 배트가 특수하게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두꺼운 대패 밥처럼 얇게 저민 나무를 천여 장 정도를 한 장 한 장씩 접착제로 붙여 압축을 시킨 다음 배트 모양으로 깎아내고 그 위에 수지를 입혀서 만든 특수 배트라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배트는 가벼울 뿐 아니라 탄성이 높아져 공을 더 멀리 보낼 수 있어 홈런을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때 왕정치의 홈런을 놓고 논란이 많았었다. 이러한 부정행위는 어느 스포츠보다도 신사도(紳士道)를 중시하는 야구에서 팬들을 분노케 하는 예민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면 왜 이렇게 자신의 야구 생명을 위협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정 배트의 유혹에 빠지는 것일까? 이유는 프로야구는 장기 레이스를 하기 때문에 일년에 150 게임 이상 치르게 되면 시즌 후반이나 무더운 여름에는 체력이 떨어지게 되므로 자신의 스윙 속도를 계속 유지하고 성적을 고수하려면 배트의 무게를 줄여야 하는데 무게를 줄이면 아무래도 타구의 거리가 짧아질 수밖에 없기에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합법적인 대책이 하나가 있는데 방망이의 끝 부분을 반원(Cup)으로 파내는 방법이다. 어쨌거나 부정행위는 없어져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양심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팬과 자신을 좋아하면서 야구의 꿈을 키워나가는 어린이들에게도 실망을 안겨주는 행위인 것이다. 프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팬들에게 돈을 받고 서비스를 하는 게 임무다. 자신이 받는 대가를 좋은 페어플레이(Fair play)를 통해 팬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프로인 것이다.

2010.09.16. 17:15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야구 선수의 분신 야구 배트 (1)

야구 글러브와 더불어 바늘에 실 가듯 붙어 다니는 것이 야구공과 배트이다. 이번에는 야구 배트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지금 60대를 눈앞에 둔 야구팬이나 60대 중반인 팬들은 어렸을 적에 동네에서 야구 시합을 할 때면 두꺼운 시멘트 부대 종이를 접어 글로브를 만들고 굵은 나무를 깎아서 방망이로 쓰던가 아니면 어머니 몰래 다듬이 방망이를 가지고 나와 놀다가 어머니한테 들켜 혼이 나던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이 때 쓰던 공은 물론 말랑말랑한 고무공이었다. 그 당시 야구 글러브를 가지고 있으면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시절이다. 거기다가 야구 배트까지 가지고 있다면 대우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글러브 한 번 빌려 써보려면 온갖 아양을 떨거나 사탕이나 딱지, 유리구슬을 주던가 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야구 배트를 전문으로 만드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들이 쓰던 것을 고물상에서 사서 써야만 했었다. 이름도 홍키 빠따(本球-혼큐Bat), 일본말인데 본 경기에서 쓰는 배트라는 뜻이다. 서울에서는 홍키, 부산 지역에서는 혼큐라고 일본 발음 그대로 썼었다. 왜 혼큐를 홍키라고 발음했는지는 아직도 못 푼 숙제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는 이 말이 영어인줄만 알았었다. 왜냐하면 글러브며 야구공, 배트가 전부 미제(美製-Made in U.S.A)였기 때문이다. 자연히 경식(硬式)야구공은 홍키 공이라고 불리었고 대단히 비쌀 뿐 아니라 고등학교 선수 이상 실업 팀 선수들만 사용하는 줄로만 믿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힘 좋고 체격 좋은 미군들이 쓰던 장비들이라, 당시는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이라 어린이들이 쓰기에는 힘에 겨울 수밖에 없고 값비싼 물건들이라 갖고만 싶었던 장비였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값이 보다 싼 소프트볼 배트를 구해다가 길이를 자기 키에 맞춰 톱으로 밑 부분을 잘라 내어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다가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 해서 킹(King)이라는 상표의 배트와 영등포 어딘가에서 깎아 만든 양(Yang)이라는 배트가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내공업식으로 만들던 제품이라 모양만 야구배트이지 쉽게 부러지기가 일쑤였다. 그렇다고 비싸게 산 배트를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철물점에 가서 제일 작은 못을 사다가 조심스럽게 박아서 써야만 했다. 나무 배트는 결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구입할 때 나뭇결이 고르고 작은 옹이라도 있는 것은 고르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배팅을 할 때는 상표가 위로 가도록 해서 쳐야만 배트가 부러지는 것을 방지 할 수 있다. 지금은 프로선수들이 사용하는 배트가 맞춤형이지만 옛날에는 배트의 길이만 정확할 뿐 무게는 별로 신경을 써서 만들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에게 맞는 무게의 배트를 만들려면 녹로(??) 공장에 가서 배트 끝을 컵 모양으로 깎아 내어 배트의 무게를 가볍게 해서 자신에게 맞춰 쓰곤 했었다. 이 이야기가 60년 대 한국 야구 배트의 초창기 역사이다.

2010.09.09. 16:29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선수들의 분신 글러브 (3)

세상일들이 전문화되고 세분화 되다보니 야구계도 그런 영향을 받아 투수도 전문화되어 선발 투수, 중간 계투, 마무리 투수로 분업화되고 타자도 지명타자제가 도입 되더니 이제는 왼손 전문 타자, 오른손 전문 타자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이 전문화 바람이 야구 글러브에도 불기 시작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이 바람은 투수전용(全用) 글러브, 내야수 전용 글러브, 외야수 전용 글러브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사용하던 글러브는 포수와 1루수 미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천후(All Round) 글러브였었다. 그래서 야수들의 글러브 모양을 보면 선수들의 포지션을 구분을 할 수가 있다. 내야수 글러브는 글러브의 손가락 길이가 투수용이나 외야수용 보다 짧고 크기도 작은 편이다. 반대로 외야수용은 손가락 길이가 상당히 길다. 그리고 투수용 글러브는 중간 정도 길이다. 이것은 상업적인 목적보다는 선수들의 기량(技倆)을 향상시키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만들어졌다고 본다. 내야수는 수비할 때 민첩하게 글러브를 다루어야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글러브가 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글러브의 길이가 길다면 그만큼 무게가 무거워지고 동시에 타구를 잡는데 시간적인 손해를 보게 되고 송구할 때 공을 글러브에서 빼내는 시간도 길어진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간발(間髮)의 차이로 주자를 아웃시켜야 하는 상황에 더 빠르게 대처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외야수는 한 치라도 더 가까이서 공을 잡아내야 하기 때문에 글러브의 손가락 길이가 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아슬아슬하게 넘어갈 홈런 성 타구도 잡아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투수는 수비 보다는 공을 던질 때 투구 밸런스를 잡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적당한 크기에 적당한 무게가 필요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투수의 글러브는 공을 잡기 위한 것도 있지만 자신의 투구 폼의 중심을 잡는 일종의 저울의 추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왜냐하면 투수는 공을 던질 때 팔의 힘만 가지고 던지는 것이 아니라 원심력(遠心力)을 이용해서 던지기 때문에 공을 던지는 팔과 글러브를 낀 손이 몸의 균형을 잘 유지해 주어야만 공의 속도 조절과 변화구를 원하는 방향으로 던질 수가 있기 때문에 투수에게 있어서 글러브의 역할은 매우 큰 것이다. 심지어 투수들마다 공을 던질 때 글러브 낀 집게손가락의 변화가 다르기 때문에 상대 타자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죽을 덧대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왜냐하면 집게손가락의 변화를 보고 투구내용을 알아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선수들이 사용하는 글러브가 그저 공을 안전하게 받아내고 손바닥의 고통만 줄이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팬들이 모르는 사실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글러브도 단순히 공을 잡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패션화 되고 기능화 되어 팬들에게 보는 즐거움도 함께 준다는 점도 알고 게임을 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2010.08.26. 17:34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야구 장비글러브 (2)

오늘도 글러브 이야기를 계속해 보고자 한다. 지난 회에서 60년대 야구 글러브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언급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국내에 야구 글러브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이 없었다. 만들어 졌다 해도 품질이 나빠서 선수들이 사용하기에는 무리였다. 가죽 처리도 그렇고 제작 기술적인 문제도 부족해서 자연히 선수들에게 외면을 당했었다. 그래서 미군부대를 통해 나오는 미제 글러브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하더라도 미제 글러브는 고가품에 속했기 때문에 새 것 보다는 미군들이 사용하던 글러브를 바셀린과 양초(Canddle)로 길들여서 써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새 글러브를 사는 날에는 선배들의 손에 의해 청계천 중고 스포츠용품점으로 다시 흘러 나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독자이거나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무슨 뜻인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면 그 이튿날 잃어버린 글러브를 찾으러 청계천을 온통 뒤지고 다녀야 하는 아픔도 있었다. 어떻게 찾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모르게 눈에 안 뜨이는 곳에 이름이나 표시를 해둔다. 그러면 얼마 후에 글러브 이름과 모양을 말하면 찾을 수가 있게 된다. 이유는 장물이기 때문에 주인도 어쩔 수 없이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러브가 귀하던 시절 운동을 하던 필자가 칼 립켄 월드시리즈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글러브의 가격을 물어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선수들이 지닌 글러브 가격이 하나에 사오십 만원 씩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글러브가 대개의 경우 한 개 이상씩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 미국에서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사용하는 글러브가 제일 비싼 것이 350달러에서 최고 500달러 정도인 것에 비한다면 어린 선수들이 얼마나 고가의 장비를 사용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인솔자의 말을 들어 보니 요즈음 한국의 사회적 풍토가 아이를 하나만 낳아 기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제일 좋은 것으로 해주려는 부모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80년대 프로 야구 선수들도 엄두를 못 내던 장비들을 초중학교 선수들이 쓰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프로선수들도 국내 기술로 만들어 지는 외국 브랜드의 제품 보다는 직접 원정 경기나 외국 전지훈련에 나가서나 구입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한국 선수들이 선호하는 제품은 미즈노, 사사키, 제트 등 대부분 일본 제품이다. 체격이나 사이즈가 한국 선수들에게 잘맞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을 잘 아는 약삭빠른 일본 야구 선수들이 광고 협찬으로 받은 장비나 글로브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전지훈련을 같이 치르는 한국 선수들에게 시중 가격보다 싸게 파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한국 선수들이 이러한 것들을 구입하는 이유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장비들은 대개가 최상품으로 꼽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한국 글러브들도 몇 십 만원을 호가 하는 제품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맞춤형 글러브가 바로 그것이다. 명필이 붓이 나빠 글을 못 쓰랴 라는 속담은 이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붓은 좋은데 글을 잘 못쓰는 것은 왜일까? 그 이유는 선수 자신이 제일 잘 아는 대목일 것이다.

2010.08.19. 18:42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선수들의 분신 야구장비① 글러브

옛 날에는 목수나 미장공 같은 기술자들에게 연장을 빌려 달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내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자기가 쓰는 연장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일 것이다. 이 점은 야구선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선수들에게 있어 재산 목록 1호를 대라고 물으면 그들이 하는 대답은 대부분 자신의 분신(分身)처럼 여기는 글로브와 배트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왜냐하면 좋은 글로브와 배트는 선수들의 플레이와 성적에 많은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무엇 보다 가족이나 자신의 생업(生業)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엮어나가 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로 글로브(Glove)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 보겠다. 야구공은 골프 공 못지않게 단단하다. 투수가 던진 공은 타자가 쓰는 헬멧이 깨질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다. 물론 처음 사용하던 야구공이 그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겠지만 맨손으로 받기에는 너무나 단단했다. 그러니 자연히 공을 받을 때 손바닥의 고통과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두껍고 내구성이 강한 글로브가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 사용했던 글로브는 단순히 손바닥의 고통을 줄이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야구공이 더욱 단단해 지고 볼을 던지는 선수들의 스피드와 볼의 세기가 강해지기 시작하자 사이즈는 보다 더 커지면서 손바닥의 고통을 줄여 주는 디자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엄지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디자인이 창안(創案)되면서 오늘 날과 같은 글로브의 형태로 모양새를 갖추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야구가 프로화 되고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유니폼의 모양이 변하듯이 글로브에도 패션화 물결이 일게 된다. 그러한 작업에 가장 선두에 나선 나라가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점이 재미있다. 미국 사람들은 비교적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그들 특유의 카이젠(改善) 문화의 후예(後裔)답게 글로브의 모양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글로브에 색깔을 넣는 획기적인 디자인을 창출해 내기까지 하여 세계 글로브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프로야구 선수들을 동원한 마케팅 전략까지 세워 야구의 종주국인 미국 시장까지 점령하다시피 되었다. 어느 정도까지 세밀하게 글로브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는가 그 일례를 들어보면 유명 선수들의 이름을 글로브에 수(繡)를 새겨 주므로 그 선수만의 글로브가 되도록 만들어 준다. 그것도 일본 최고의 명인이 수작업(Hand Made)을 통해 직접 제작한 것을 말이다. 정말로 야구인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간직하고 싶은 명품인 것이다. 지금은 보기 힘들어 졌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미국 스포츠용품 매장에서 미국 브랜드인 Rawlings나 Wilson 글로브 중에 일본에서 제작된 제품이 판매 되었는데 만듬새나 품질이 미국제품 보다 훨씬 월등함을 느꼈다. 옛날에 우리가 야구하던 시절에는 미8군에서 흘러 나온 미제 글로브를 청계천 중고 운동구점을 통해 사서쓰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그것도 황송해서 바셀린을 발라 길들이고 달아 구멍이 날 때 까지 쓰던 기억이 난다.

2010.08.12. 16:53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해태 제국의 '군주' 김응룡 감독

‘양키 제국의 제왕’, ‘메이저리그의 큰손’으로 군림하면서 숫한 일화를 남겼던 스타인 브레너가 얼마 전 죽었다. 그는 선박산업으로 번 돈을 적자와 성적부진으로 빛을 잃어가던 뉴욕 양키즈(New York Yankees)를 CBS 방송국으로부터 사들인 후 저돌적인 비즈니스로 양키즈 신화를 다시 일으킨 인물이었다. 그는 양키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라면 과감한 투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주변의 만류나 손가락질을 받는 한이 있어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선수라면 거액의 연봉을 지불하면서까지 데려왔다. 그 좋은 예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고 있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메이저리그 최고의 연봉을 주면서 끌어왔다. 그리고 ‘사이 영’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로저 클레멘스도 팀의 우승을 위해 거금을 주고 데려 왔다. 그는 35년간 양키즈를 소유하면서 양키즈를 월드시리즈 정상에 여러 번 오르게 했다. 주위의 말 그대로 돈의 힘으로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끌어 안았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박건배 사장이 구단주였고 가장 가난한 구단이라고 불리었던 해태 타이거즈는 적은 돈을 들이면서도 한국 시리즈 우승을 무려 9번이나 차지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선동렬, 한대화, 김봉연, 김일권, 김성한, 김종모, 이순철 등 쟁쟁한 선수들이 활약한 결과도 있겠지만 이들을 뒤에서 조정한 배후인 ‘코끼리’ 김응룡 감독의 탁월한 통솔력(統率力)이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구단의 형편상 다른 팀들 보다 적은 연봉을 감수하면서 우승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은 김 감독의 불도저 같은 지휘 능력이라고 본다. 해태 타이거즈는 김 감독이 부임하기 전에는 만년 하위에서 맴도는 팀이었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인 김동엽 감독이 팀을 맡았을 때 성적이었다. 둘 다 불같은 성격이지만 김응룡 감독은 선수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대단하기 때문에 아무리 개성이 강하고 기질이 강한 해태 선수들이라 해도 감히 그 앞에서는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김 감독의 리더십 때문에 해태가 비록 동료 선수들에 비할 때 금전적인 대우나 구단의 지원이 부족하였지만 모두 하나가 되어 아홉 차례나 한국프로야구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팀의 성적이 그 나마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라이벌 회사인 롯데제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힘이기도 했던 것이다. 능력 면으로 보면 해태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선수들이 많은 팀이다. 자기가 제일 잘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팀워크에 문제가 많아서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최하위를 면치 못했다. 야구는 팀 운동이기 때문에 어느 한 선수가 잘해서 되는 운동이 아니다. 이들의 개인 플레이를 다잡은 사람이 바로 김응룡 감독이었던 것이다. 그가 화가 나면 주변에 있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선수가 실수를 하거나 심판의 판정에 불만이 있으면 덕 아웃에 있는 의자를 부수는 습관이 있어 잘못하면 애꿎은 부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은 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판정이 마음에 안 들면 심판을 배로 밀어붙여 관중들을 즐겁게 하는 유머(Humor)도 아는 감독이었다. 팀에는 우승을 안겨서 즐겁게 해주고 가끔씩 엉뚱한 행동으로 웃음을 주어 즐겁게 하는 감독, 그가 바로 김응룡 감독이다.

2010.08.05. 16:3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투수의 분업화

20세기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기계 산업은 점차 분업화(分業化)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업화 작업은 1970년말을 계기로 지명타자(Designated Hitter)제도가 도입되면서 야구선수들에게도 분업화 시대가 열린다. 게임을 더욱 재미있고 박진감 있게 진행하고 투수를 투구에만 전념케 해 투수의 선수생명을 보호하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바람직한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도 아메리칸 리그에서만 시행하는 경기방식이지 내셔널 리그에서는 야구의 정통성에 어긋난다고 해서 투수들도 타석에 들어선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퍼시픽 리그에서만 시행하고 센트럴 리그에서는 같은 이유로 시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투수도 선발투수, 중간계투, 구원투수 혹은 마무리 투수 등으로 세분화하여 분업화 시켰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선발투수는 끝까지 완투(完投)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만약에 선발투수가 무너지면 야수(野手-Fielder) 중에 한 명이 마운드에 올라와서 던지곤 하였다. 구원투수라는 개념보다는 게임을 포기하고 9회까지 버텨나가 보자는 개념에서였다. 이때는 주로 투수로 활약하다가 야수로 전향한 선수가 등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좋은 예가 김재박 선수이다. 김재박은 영남대학 시절만 해도 투수로서도 활약이 대단했던 선수였다. 아마 김재박 선수가 유격수로 뛴 것은 알아도 투수로 활약한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팬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리 궁둥이로 잘 알려진 김성한 선수도 한 때는 투수로 활약 하던 선수였다. 그래서 선동렬이 무너지고 다른 투수들까지 무너질 때는 3루수(Third Baseman)인 김성한이 마운드에 오르는 일도 가끔씩 있었다. MBC 청룡에서 김재박과 내야수로 같이 활약하던 이광은 선수도 배재고 당시 하기룡 투수와 함께 투수로도 뛰었던 경력을 가진 선수이다. 요즈음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추신수 선수도 본래는 포지션이 투수였다. 그래서 그가 외야에서 빨랫줄 같은 송구로 홈으로 뛰어 드는 주자를 아웃시키는 빼어난 플레이를 보여주는 이유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박노준도 투수 출신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사실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야구계는 투수출신 타자들이 맹활약을 하던 시기였다. 경북고 신화(神話)의 장을 열었던 임신근 선수도 빼어난 실력을 갖춘 투수였었다.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김정수 선수도 신일고 시절 타격뿐 아니라 투수로도 이름을 떨쳤던 선수였었고 MBC 청룡에서도 잠시나마 투수로 마운드를 밟았던 선수이다. 대개 이들이 타자로 전향하는 이유는 고교시절 너무 어깨를 혹사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자주 게임에 출전하다 보니 상대 타자에게 투구 내용이나 구질이 많이 노출되어 위력(威力)을 잃었기 때문에 대학이나 실업야구에서 왕년(往年)의 실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이다. 그러면 왜 투수 출신 타자들이 대부분 타자로 성공을 하는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우선 그들은 선구안(選球眼)이 좋고 투수의 심리나 구질(球質)을 다른 선수들 보다 더 잘 파악 할 수 있고 상대 투수의 투구의 장단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들으면 30여 년 전 일이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고 요즈음 선수들이나 팬들은 어리둥절할 이야기로 여기겠지만 한국프로야구는 이러한 열악한 배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래서 나는 선배들이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수 층도 얇았을 뿐만 아니라 구장이나 조명시설도 취약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훌륭한 기록들을 만들어 내고 어떤 기록들은 아직도 갱신이 안 된,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야구역사로 살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틀이 박찬호, 김병헌, 추신수 등의 메이저 리거(Major Leaguer)들을 낳은 밑거름이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2010.07.22. 16:11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야구선수들의 재미난 별명 (2)

고전에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좋은 이름을 남기려는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훌륭한 음악가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훌륭한 화가로, 운동을 잘하는 사람은 훌륭한 선수로 사람들에게 좋은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은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을 닮고 싶어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르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말하는 애칭이고 별명이다. 야구선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그 선수의 특징이나 버릇, 생김새를 보고 별명을 지어준다. 그러나 대개는 약간 비하하는 듯한 별명을 많이 지어 주는 게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얼굴이 검으면 ‘깜치’ 혹은 ‘깜상’, 이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뿌리’라는 미국 드라마가 히트 치던 시절에는 ‘쿤타킨테’로 바꾸어 부르게 된다. 지금 LG 트윈즈 감독인 박종훈 감독의 현역시절 별명이 바로 ‘쿤타킨테’였다. 키가 작으면 ‘땅강아지’, 그보다 조금 진한 표현으로는 ‘땅개’, 반대로 키가 크면 ‘꺽다리’ ‘껑추’.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을 띤 별명으로는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많았던 ‘베트콩’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바로 MBC 청룡에서 2루수를 보던 김인식 선수의 별명이다. 그런가 하면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친구들에게 붙여지는 별명으로 눈이 나빠 안경을 쓴 선수에게는 이름 대신 그냥 ‘안경’이라고 불렀다. 최동원 선수의 별명 중 하나도 ‘안경’, 좀 비싼 안경 ‘금테 안경’이었다. 왼손잡이는 ‘짝잽이’ 혹은 ‘짝배기’, 줄여서 ‘짝배’ 라고 불렀다. 우리가 잘 아는 베이브 루스의 본명은 따로 있다. 조지 허먼 루스 주니어(Jr. George Herman Ruth)가 그의 본명이다. 이렇듯 어떤 경우에는 본명보다 애칭이 더 유명해져 마치 본명인양 오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꼭 별명이나 애칭이 그 사람을 낮춰서 붙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 선수가 보여준 플레이나 기록이, 그 사람의 됨됨이가 애칭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면 삼성 라이온스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하던 정현발 선수의 경우는 그의 성격이 너무 좋아서 동료들로부터 ‘군자(君子)’라고 불리었다. 이 별명은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깃들어진 별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평소 외야수는 장갑(Glove)과 신발(Spike)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할 정도로 성격이 소탈하고 꾸밈이 없어 운동선수로서는 드물게 선후배들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바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수의 활동 상황이 그를 부르는 애칭으로 쓰이는 때도 있다. 불굴의 투지로 재기에 성공한 박철순 투수에게는 ‘불사조(Phoenix)’, 장종훈 선수에게는 ‘연습생 신화(神話)’ ‘기록의 사나이’라는 명예로운 애칭으로 그 선수의 공을 치하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도 죽어서 좋은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2010.07.15. 16:19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야구 선수들의 재미난 별명

우리 조상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아명을 지어 불렀는데 나면서부터 가정에서 불려지는 이름으로, 대개는 고유어로 짓는데 천한 이름일수록 역신(疫神)의 시기를 받지 않아 오래 산다는 천명장수의 믿음에서 천박하게 짓는 것이 보통이다. ‘쇠똥이’ ‘개똥이’가 보통이고 튼튼하게 자라라는 바람에서 ‘바우’라 부르고 (실제로 청룡팀에 김바위 선수가 있었음), 늦게 얻으면 ‘끝봉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명은 곧 애칭이기 때문에 가족뿐아니라 이웃까지 부담없이 불려지게 마련이지만, 홍역을 치를 나이를 지나면 이름이 족보에 오르고 (옛날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까닭에 일정 나이가 되지 않으면 족보나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서당에 다니게 되면서 정식 이름을 얻게 된다. 그에 더해 외모나 집안 환경에 따라 이름을 지어 부르는데 키가 크면 ‘장다리’ ‘꺽다리’ 키가 작으면 ‘꺼꾸리’ 머리가 크면 ‘대갈장군’ 그리고 집안에 아들이 귀하면 ‘귀남이’ ‘귀동이’ 여자들에게는 ‘막음이’ ‘끝순이’ 등 아픔이 담긴 이름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이 별명을 지어주는데 그 별명은 평생 따라 다니기도 한다. 야구 선수들에게도 다양한 별명이 있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것이 많아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친구들이 붙여주는 별명은 좀 원색적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이름 보다는 선수들끼리는 별명이 더 널리 쓰인다. 처음에는 친구와 지인들 사이에 애칭처럼 불려지지만 일단 팬들에게 회자되면 이름보다 더욱 유명해진다. 70년대 실업야구 시절에도 김응용 삼성 사장은 큰 덩치 때문에 ‘코끼리’ 혹은 ‘백곰’, 강병철 전 SK 감독은 속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짱꼴라’라고 불렸다. 후에는 킬(Kill)병철 (투수를 혹사시켜 투수들의 선수 수명을 단축 시켰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불리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해 언론에 노출이 본격화되면서 스타들의 별명이 다채로워졌다. 프로 초창기 별명은 주로 생김새와 스타일에 관련된 표현들이 많았다. 장명부는 능글맞다고 해서 ‘너구리’ 이만수는 생김새가 그 당시 유행하던 헐크를 닮았고 소리를 잘 질러서 ‘헐크’, 신경식은 내야수들이 던지는 공을 타조같이 긴 다리를 그라운드에 닿도록 벌리면서 받아내서 ‘학(鶴) 다리’ ‘타조’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선동렬은 얼굴에 여드름이 너무 심해서 ‘멍게’라는 별명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해창은 팬들은 ‘쌕쌕이’라고 부르지만 동료들은 허풍이 세다 해서 ‘해풍’이라고 부른다. 그 밖에 김봉연은 ‘촌놈’ 아니면 ‘탈모 왕’ (스윙이 커서 헬멧이 자주 벗겨짐) 그리고 김성한은 특유한 타격 폼 때문에 ‘오리궁둥이’, 김일권은 ‘대도’ (2루 베이스를 너무 많이 훔쳐서) 그런가 하면 이름의 발음이나 성(姓) 때문에 생긴 별명도 있다. 예를 들면 지금 기아 타이거즈 감독인 조범현은 ‘조뱀’(Snake), ‘닭대가리’ 혹은 ‘닭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계형철 투수코치는 성이 계수나무 계(桂) 자인데 친구들이 닭 계(鷄)로 바꾸어 부르면서 갖게 된 별명이다. 아무튼 오래 전 불려졌던 이름들이고 때로는 잊혀져 가는 이름들이지만 모두가 한국프로야구를 중흥시켰던 인물들이고 한 시대를 통해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고마운 선수들이었다.

2010.07.08. 16:28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눈물의 만루 홈런' 이선희

경북고 시절 황규봉 투수와 함께 야구부 창단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실업야구에서 노히트 노런 2번,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대륙간 컵) 대회에서 강호 미국을 꺾고 세계대회 첫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MVP와 함께 최다승과 구원투수상을 한꺼번에 받는 등 3관왕을 차지한 투수, 그런가 하면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MBC 청룡 이종도에게 역전 만루 홈런을 맞고 마운드에서 쓰디 쓴 패배의 눈물을 흘렸던 주인공. 그가 바로 이선희다.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에서 만루 홈런을 쳤던 이종도와 OB 베어스의 김유동은 영웅이 되었지만 이선희는 그 뒤로 만루 홈런의 아픈 추억을 그리며 선수 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일생일대의 큰 사건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그는 고교야구 최고의 철완(鐵腕)으로 불리던 남우식의 뒤를 이어 황규봉과 함께 우백호 좌청룡 투수로 활약하면서 경북고 신화를 이어나간 장본인이자 아마야구 최고의 왼손잡이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스타플레이어였다.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단 1패도 허용하지 않아 일본 킬러로 불리었다. 짝잽이(왼손잡이 투수를 야구선수들은 이렇게 부른다) 투수가 귀하던 당시로서는 그의 출현은 야구계의 커다란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여세를 몰아 1982년 프로야구 데뷔해서 첫해 15승 7패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역시 이선희’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개막전과 한국 시리즈에서의 결정적인 만루 홈런의 충격 때문일까. 이듬해 5승 13패, 2승 4패로 실력이 급전직하 하게 되고 결국 MBC 청룡의 이해창 선수와 트레이드가 된다. 당시 MBC 청룡은 유종겸 투수로만 버텨온 터라 왼손 투수가 절실했고, 삼성 라이온스는 빠른 발과 센스 있는 1번 타자가 필요했던 터라 이해창을 데려 오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재일교포 김일륭의 영입으로 팀내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에 이선희의 트레이드는 서로가 밑지지 않는 장사였다고 평했었다. 그리고 그의 투구 폼을 보면 정통파 투수의 투구 폼은 아니다. 약간 사이드 암(Side Arm)에 가까운 투구 자세로 볼을 던지는데 그런 특이한 폼으로 타자들을 공략했기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그의 투구 자세를 보면 공을 던진 후에 투수는 끝까지 공을 주시하고 타자를 봐야 하는데 고개가 먼저 숙여진다. 마치 좋게 말하면 칠 테면 쳐보라고 배짱으로 던진다고 볼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던지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투구 폼이 그의 성적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혹자는 이선희가 아마야구에서 너무 혹사당해서 선수생명이 짧아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프로야구 초장기만 하더라도 아마야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유능한 투수들이 감독들의 무리한 등판 요구에 못 이겨 일찍 마운드를 떠나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특히 감독들의 팀 성적에 연연한 선수 선발이 문제였던 것이다. 하루 빨리 한국야구도 선진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한국 사람들에게 아주 적합한 종목이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체격 조건도 일본보다 우세하고 기술적인 자질 면도 제대로 갈고 닦으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길러 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면들을 해마다 칼 립켄 세계야구대회를 취재하면서 느끼는 바이다. 좋은 투수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여러 선수들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선희를 가까이 해본 사람이라면 그가 고된 훈련을 하는 모습 이외에는 화를 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지녔던 이웃집 아저씨같이 주위사람들에게 푸근함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게 운동만 잘하는 게 아니라 품성도 좋은 제 2, 제 3의 이선희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2010.07.01. 16:3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3할 타자가 갖는 의미

야구에서 3할(30%)대 타자라 함은 대단한 타자로 인정받는다는 증표이다. 이를 두고 ‘3할의 예술’이라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세 번 타석에 들어서서 한 개의 안타를 치면 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라고 쉽게 들 생각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한 번이라도 동전을 넣고 공을 때리는 동네 야구연습장에서 공을 쳐본 경험이 있다면 공을 정확히 쳐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것이다. 투수가 던지는 공은 홈 플레이트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빠른 볼의 경우는 0.4초가 안 걸리고 느려도 0.5초 안이면 포수 글로브로 빨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타자는 그 시간 내에 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타격을 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잘 훈련된 야수들은 타자가 친 공을 잡으려고 온 힘을 기울여 수비를 하기 때문에 안타를 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 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타자가 치는 공의 타구 방향은 대부분 야수들이 수비하는 위치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안타를 만들려면 빈 공간을 찾거나 아니면 아주 멀리 담장 밖으로 쳐내는 방법이 최우선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3할을 친다는 것은 피나는 훈련과 천부적인 재능과 동물적인 감각을 필요로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프로에서는 기록원들이 각 팀의 타자들의 타구 방향을 세밀히 통계를 내어 감독에게 제출하고 감독은 그것을 토대로 상대 타자들의 타구에 대한 수비위치를 정하기 때문에 철통같은 방어선을 뚫고 안타를 친다는 것이 녹녹하지가 않다. 보통 2할5푼이면 괜찮다고 보고 수비만 잘하면 쫓겨나지는 않는다. 특히 수비부담이 큰 포수나 유격수는 2할5푼만 유지해도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포수들이 장타자가 많은 관계로 아무리 투수 리드를 잘해도 장타력이 없다면 자리보전하기가 쉽지가 않다. 예를 들자면 이만수, 박해종, 이종도 선수 등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프로야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할대(청룡4할1푼2리)를 기록한 백인천 감독도 포수 출신이다. 국가 대표 감독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게 한 김경문 두산 감독도 역시 포수 출신이다. 그러나 3할 대를 친 선수는 많지 않다. 그 정도로 타율을 3할대로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이고 선수로서는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올드 스타로 장효조(롯데 3할2푼9리) 선수, 그리고 재일동포 고원부(빙그레 3할2푼7리) 선수가 생각난다. 최근에 와서 돋보이는 선수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활약하는 추신수 선수가 떠오른다. 3개 중 하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살아가는데 반만 성공했다 해도 잘한 것으로 여기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 보자.

2010.06.24. 17:46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군대보다 엄격한 '선후배' 관계

흔히들 선배(先輩)는 하늘같다고들 말한다. 그 중에서도 아마 야구계의 선후배 관계가 가장 엄격하리라 생각 된다. 그것도 나이 많은 선배가 아니라 바로 일 년 위 선배가 가장 무섭다고들 생각 한다. 기합도 일 년 선배에게 제일 많이 받곤 했다. 이러한 선후배 관계는 평생을 같이 하게 된다. 학창시절에는 무서운 선배이지만 일단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후배들의 장래를 챙겨주는 몫까지 하는 게 선배들이다. 특히 야구계는 선후배간의 우애(友愛)가 깊어 감독자리나 코치자리가 나게 되면 솔선해서 직장을 마련해 주는 끈끈한 정을 베풀어 주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평소에 선배들이 무섭긴 하지만 선배들을 깎듯하게 대하고 진심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모습은 시합 중에도 나타나게 된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선배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플레이를 하게 된다. 특히 시합이 안 풀리는 상황이나 슬럼프에 빠진 선배에게는 더욱 배려를 하게 된다. 물론 프로 선수들은 상대 팀을 물리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러나 선배 선수에 대한 예우(禮遇)는 해가면서 시합을 풀어 나간다. 일례를 들면 많은 점수차로 상대팀을 이기고 있을 경우 번트 사인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번트까지 대면서 득점을 하지 않으므로 상대 팀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묵계(默契)가 있다. 만약 그 상황에서 번트 사인을 낼 경우 팬들 뿐 아니라 그 감독은 야구계에서 소인배(小人輩)로 몰리면서 비난은 물론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왕따’를 당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치졸(稚拙)한 작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시합 도중 심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시합 중 오심(誤審)이나 애매한 판정이 났을 경우 격한 감정이 앞서 선배인 심판에게 큰소리를 치며 심하게 항의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합이 끝나게 되면 개인적으로 사과를 하게 마련이다. 반대로 후배가 되는 심판이 오심을 했을 경우 시합이 끝나고 나서 선배 선수에게 전화로라도 사과를 하는 것이 오래도록 내려오는 야구계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미국 프로야구에서 이따금 보게 되는 주먹이 오가는 불상사는 없는 것이다. 그냥 그라운드로 뛰어나가는 정도이다. 이러한 선후배간의 돈독함이 수적으로나 질적인 면에서 일본이나 미국프로야구에 다소 뒤지지만 세계정상에 설 수 있도록 이끌어온 밑거름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 야구인들이 갖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이러한 관습은 계속 이어 나가기를 바라고 싶다.

2010.06.17. 17:36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원조 '잠수함 투수' 한희민 (2)

한희민 그는 자신의 특이한 투구 폼처럼 기이한 삶을 살아 왔다. 대만 프로야구 쥔꿔 베어스의 생활을 접고 귀국한 후에 동료 선수들 같이 후배를 지도하는 일이 아니라 대전시 외곽에다 평소에 좋아했던 난초(蘭草)를 기르면서 세월을 보냈다. 계룡산(鷄龍山) 자락을 시작으로 전국 명산에서 난초를 심을 괴목(槐木)을 찾아다니고 자기가 지은 온실에서 생활하며 한국 자생란(自生蘭)을 재배하는데 심취하게 된다. 그리고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찾아오면 술잔을 주고받으며 선수시절 이야기로 하루해를 보내곤 했다. 외모도 기인 같이 수염을 기른 데다 꽁지머리를 해서 마치 산에서 도를 닦는 도사 같이 하고 다녔다. 그가 만든 온실 겸 살림집이 되어 버린 화원 한 구석에는 선수시절 자신이 받은 트로피만이 그가 한 때 마운드를 주름잡던 핵잠수함(潛水艦)이었음을 말해줄 뿐이다. 한희민의 기행(奇行)은 빙그레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의 승용차에 확성장치를 해놓고 위험 운전이나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차량을 보게 되면 교통경찰(警察) 흉내를 내면서 자칭 시민 경찰 노릇을 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다가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겨하는 그는 몇 년 전부터 광주 근처에 살면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이제는 가정을 꾸려 예쁜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의 한국프로 경력은 80승 51패로 엄청난 기록은 아니지만 언더 핸드 투수의 짧은 선수 수명으로 볼 때 결코 실패한 케이스는 아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선수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막강 타선의 해태나 다른 팀에서 뛰었다면 훨씬 더 훌륭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라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얼마 전 김성한 감독이 기아 타이거즈를 이끌 당시 잠시 투수코치로 스카우트 되어 잠시 동안 이나마 후배 양성의 길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를 사랑하던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희민 같은 잠수함 투수가 많이 나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야구경기의 묘미는 폭발적인 타격에도 있지만 경기의 전반적인 역할을 하는 좋은 투수들의 투구가 팬들의 관심을 갖게 한다. 희귀성이 있는 잠수함 투수들의 출현은 야구팬들을 눈을 더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광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면서 인테리어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집도 스스로 지어보겠다는 소박한 꿈도 가지고 있다. 항상 구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오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과거를 회상하게 마련이다. 아마 프로야구 올드 팬들은 지금도 지난 날 초창기 프로야구 스타플레이어들의 화려한 경기장면들을 추억해보리라 생각된다. 한희민도 그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2010.06.10. 18:47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원조 '잠수함 투수' 한희민 (1)

잠수함(Submarine)은 모두가 알다시피 일반 배와는 다르게 대부분 물 밑으로 다니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언더 핸드 투수를 부를 때 ‘옆구리 투수’ 혹은 ‘잠수함 투수’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한희민 선수는 청주에 있는 세광고와 성균관대를 나온 잠수함 투수였고, 현역시절 등 번호는 13번을 달고 뛰었다. 그의 별명은 외모 때문에 ET라고 불렸다. 싱커와 슬라이더가 주 무기였던 투수이다. 빙그레 이글스 창단시절부터 이상군 선수와 함께 빙그레 마운드의 쌍두마차였다. 해태에서 활약했던 장채근 포수와는 성대시절 배터리였다. 그래서 한희민의 구질이나 좋아하는 코스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의 공을 잘 쳤었다. 삐쩍 마른 체구 아래쪽에서 큰 반원을 그리며 솟구치던 그의 공은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 발톱과도 같이 타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매우 보기 드문 투구 폼으로 싱커를 주무기로 승수를 쌓아가면서 빙그레 창단멤버인 동료 이상군과 함께 무적의 원투 펀치를 형성했다. 창단 첫해 꼴찌였던 빙그레는 그가 활약한 일곱 시즌 동안 무려 네 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며 단시간에 강팀의 반열에 올랐었다. 아마 그 때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었다면 김병현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뒀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곡예에 가까운 그의 투구 폼은 많은 팬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한희민은 비운의 투수였다. 팀 멤버였던 장종훈, 송진우, 이정훈, 이강돈, 유승안, 한용덕, 강석천 등이 함께한 빙그레는 해태와 롯데와의 한국시리즈 경기에서 매번 좋은 경기를 펼쳤으면서도 쓰디 쓴 잔을 들이켜야만 하는 아픔이 있었다. 결국 그는 단 한 번도 우승 샴페인을 터뜨려보지 못하고 삼성과 대만 프로야구를 전전하다가 변변한 은퇴식도 치르지 못하고 마운드를 떠나야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가서 야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늦은 출발이었지만 세광고에 진학하면서 김승성 감독을 만나 그의 야구 인생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게 됐다. 김 감독의 제안으로 시작한 언더 핸드 피칭에 힘입어 2학년 때 대구에서 열리는 대붕기 대회에서 우승하고 3학년에 올라가서는 다른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고 성균관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그때만 해도 체력이 딸려서 마운드에서 홈 플레이트까지 공이 못 온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체격 조건이 좋아지면서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예와 함께 83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병역 혜택 까지 받게 된다. 그때부터 승승장구하면서 야구판에 한희민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졸업 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톡톡히 발휘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한희민이라는 잠수함에 같이 타보도록 하자.

2010.05.2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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