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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

Washington DC

2010.10.2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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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와이번스가 4연승 파죽의 기세로 코리안 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그래서 이정훈 성수의 두 번째 이야기를 다음 회로 미루고 오늘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김성근 감독의 이야기를 해 보겠다.

그는 모두가 알다시피 재일교포 출신 감독이다. 1942년 생으로 일본 교토에서 출생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전거로 우유배달을 하면서 다리 힘을 기르기 위해 엉덩이를 안장에 닿지 않게 하면서 페달을 밟으면서 체력을 키웠고, 공사장에 버려진 벽돌 조각을 던지면서 피칭연습을 하면서 투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한국야구와의 인연은 재일동포 학생 모국 방문 경기 때 어머니 나라를 처음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1962년 기업은행 창단 멤버로 한국에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이 때부터 6년 간 좌완 투수로 활약하다가 27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은퇴를 한 후 마산상고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기업은행 감독으로 다시 실업 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 뒤로 충암고, 신일고 감독을 지내다가 1982년 프로야구가 창설 되면서 OB베어스 투수코치로 프로야구에 몸을 담게 된다.

그 해 OB가 우승을 하는데 투수코치로서 한 몫을 하게 된다. 불사조 박철순이 있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개 은행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게 되면 은행에 남아 은행원으로 근무를 하는 게 당시 상례였는데 그는 서툰 한국말 때문에 창구에서 고객을 접수하는데 문제가 있어 그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독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을 하게 된다.

그 당시 그의 별명은 쪽발이였다. 그 정도로 우리말이 서툴렀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발음이 서툰 부분이 있는데 그 때는 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멸시를 받으며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국 최고의 야구감독이 되는 것뿐이라고 결심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기에 이른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상대 팀이라 해도 찾아가 묻고, 그 듣고 보고 배운 것을 꼼꼼히 수첩에 기록하는 습관을 길러 나갔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김성근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데이터 야구이다. 그의 뒷주머니에는 항상 두툼한 수첩이 꽂혀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자기 팀 선수들에 대한 기록 뿐 아니라 상대 팀 선수들의 장단점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를 군거로 작전을 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김영덕 감독의 뒤를 이어 84년부터 88년까지OB 베어스의 사령탑을 맡게 된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 벌써 39년! 내일모레면 70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지금 한국프로야구에서 현장에서 뛰는 최고령자이다. 그러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SK 와이번스를 세 차례나 한국야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는 SK에서 우승 감독이 되기 전에는 항상 성적이 나쁜 팀에서 주로 찾는 감독이었다. 일종의 저니 맨 감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휘하는 팀마다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었다. 태평양 돌핀스 감독 때도 그랬고 쌍방울, SK도 최하위 팀을 한번도 아니고 3번씩이나 정상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야구의 신’이라는 말을 줄여 만든 ‘야신(野神)’이라는 별명이다. 재미있게도 이 별명은 한국시리즈를 9번씩이나 제패했던 김응룡 감독이 지어 주었다는 점이다. 한국시리즈에서 혼이 났던 김응룡 감독이 얼마나 혼이 났으면 이런 별명을 지어주었겠는가 말이다! 야구인들 사이에서 그를 평할 때는 “야구밖에 모르는 사람”, “야구에 미친 사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 결과는 1000승 이라는 대기록 달성이다. 이 기록은 김응룡 감독이 세운 1476승 버금가는 기록이다. 이 기록이 더욱 값진 이유가 있다. 김성근 감독은 한 쪽 신장이 없다. 야구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얻은 암(癌) 때문이었다.

그는 시합 전날에는 밤을 새 가면서 전력을 분석한다. 그리고 시합 중에는 화장실에 가지를 않기 때문에 신장에 탈이 났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집념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루에 펑고(한국에서는 노크라고 한다-야수들에게 공을 쳐는 것)를 1000개 이상 치면서 암과 싸워 나갔다. 결국은 암을 극복하고 오늘의 영광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 것도 10년 이상을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말이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였던 것이고 한편의 드라마였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그의 야구를 쉽게 폄하한다. 스몰 야구를 한다. 쪽발이식 야구를 한다. 그러나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준 그의 전략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무색하게 하고도 남는 멋진 승부를 팬들에게 보여 주었다. 한국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 됐다는 삼성을 네 번 연속 침몰 시키면서 말이다. 그의 불굴의 인생 역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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