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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투수의 분업화

Washington DC

2010.07.2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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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기계 산업은 점차 분업화(分業化)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업화 작업은 1970년말을 계기로 지명타자(Designated Hitter)제도가 도입되면서 야구선수들에게도 분업화 시대가 열린다.

게임을 더욱 재미있고 박진감 있게 진행하고 투수를 투구에만 전념케 해 투수의 선수생명을 보호하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바람직한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도 아메리칸 리그에서만 시행하는 경기방식이지 내셔널 리그에서는 야구의 정통성에 어긋난다고 해서 투수들도 타석에 들어선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퍼시픽 리그에서만 시행하고 센트럴 리그에서는 같은 이유로 시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투수도 선발투수, 중간계투, 구원투수 혹은 마무리 투수 등으로 세분화하여 분업화 시켰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선발투수는 끝까지 완투(完投)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만약에 선발투수가 무너지면 야수(野手-Fielder) 중에 한 명이 마운드에 올라와서 던지곤 하였다.

구원투수라는 개념보다는 게임을 포기하고 9회까지 버텨나가 보자는 개념에서였다.

이때는 주로 투수로 활약하다가 야수로 전향한 선수가 등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좋은 예가 김재박 선수이다.

김재박은 영남대학 시절만 해도 투수로서도 활약이 대단했던 선수였다.

아마 김재박 선수가 유격수로 뛴 것은 알아도 투수로 활약한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팬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리 궁둥이로 잘 알려진 김성한 선수도 한 때는 투수로 활약 하던 선수였다.

그래서 선동렬이 무너지고 다른 투수들까지 무너질 때는 3루수(Third Baseman)인 김성한이 마운드에 오르는 일도 가끔씩 있었다.

MBC 청룡에서 김재박과 내야수로 같이 활약하던 이광은 선수도 배재고 당시 하기룡 투수와 함께 투수로도 뛰었던 경력을 가진 선수이다.

요즈음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추신수 선수도 본래는 포지션이 투수였다.

그래서 그가 외야에서 빨랫줄 같은 송구로 홈으로 뛰어 드는 주자를 아웃시키는 빼어난 플레이를 보여주는 이유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박노준도 투수 출신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사실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야구계는 투수출신 타자들이 맹활약을 하던 시기였다.

경북고 신화(神話)의 장을 열었던 임신근 선수도 빼어난 실력을 갖춘 투수였었다.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난 김정수 선수도 신일고 시절 타격뿐 아니라 투수로도 이름을 떨쳤던 선수였었고 MBC 청룡에서도 잠시나마 투수로 마운드를 밟았던 선수이다.

대개 이들이 타자로 전향하는 이유는 고교시절 너무 어깨를 혹사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자주 게임에 출전하다 보니 상대 타자에게 투구 내용이나 구질이 많이 노출되어 위력(威力)을 잃었기 때문에 대학이나 실업야구에서 왕년(往年)의 실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서이다.

그러면 왜 투수 출신 타자들이 대부분 타자로 성공을 하는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우선 그들은 선구안(選球眼)이 좋고 투수의 심리나 구질(球質)을 다른 선수들 보다 더 잘 파악 할 수 있고 상대 투수의 투구의 장단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들으면 30여 년 전 일이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고 요즈음 선수들이나 팬들은 어리둥절할 이야기로 여기겠지만 한국프로야구는 이러한 열악한 배경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래서 나는 선배들이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수 층도 얇았을 뿐만 아니라 구장이나 조명시설도 취약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훌륭한 기록들을 만들어 내고 어떤 기록들은 아직도 갱신이 안 된,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야구역사로 살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틀이 박찬호, 김병헌, 추신수 등의 메이저 리거(Major Leaguer)들을 낳은 밑거름이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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