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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22게임 연속 안타의 주인공 이정훈

Washington DC

2010.10.1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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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이글스에 ‘땅꼬마’ 4형제가 있었다. 제일 큰형이 김종수이고 둘째가 이광길, 셋째가 김성갑 그리고 막내가 이정훈이다. 네 사람 모두 키가 작고 악바리지만 그 중에서도 막내 이정훈 선수가 가장 돋보였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야구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남달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이면 육상, 축구면 축구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발달했었다.

이런 이정훈이 야구를 택하게 된 것은 대학 때까지 야구를 했던 작은 아버지의 권유에서였다. 그는 경상중학교를 거쳐 대구상고로 진학을 하게 된다. 그 당시는 대구상고가 경북고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다행히 고교 2학년 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4강에 들면서 체육특기자 자격을 얻어 평상시 존경하던 강병철 감독이 이끄는 동아대로 진학을 하게 된다. 이정훈의 말에 의하면 첫째는 강감독의 잘 생긴 외모에 반했고 두 번째는 “학교 간판은 보지 말고 내 니를 키워 줄 테니 동아대로 오라”는 말에 고려대, 한양대, 건국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물리치고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그러던 강병철 감독과의 인연도 잠시였다.

그가 롯데 코치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동아대는 대학야구 최강팀이었고 강병철 감독은 국가대표 감독이었고 투수 박동수, 오명록, 김한조, 김진욱에 이어 김상훈, 이동환 그리고 조성옥까지 초호화 멤버로 구성된 팀이었다.

동아대 전성기였던 때이다. 이 때 이정훈은 중견수로 활약하기를 바랐는데 후임으로 온 어우홍 감독이 우익수를 맡으라는 지시에 화가 나서 항명을 하다가 일년을 허송세월로 보내게 된다.

이 항명 사태는 대표팀 선발에까지 영향을 끼쳐 대표팀 유니폼을 입어보지 못하고 1987년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입문하게 된다. 본래 그의 연고팀은 삼성 라이온스이었지만 삼성이 그를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프로선수로 뛰게 된다. 그는 프로로 데뷔하자마자 펄펄 날랐다. 첫해에 124안타를 치면서 신인최다안타 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22경기 연속 안타라는 신기록을 수립했던 것이다.

당연히 학창 시절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강기웅과 유중일을 제치고 신인왕이 돼 2인자라는 그늘에서 당당히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장종훈, 전대영, 이강돈, 강정길, 고원부와 함께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도화선 역할을 하는 타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정훈은 연습벌레로도 소문나 있다.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았던 필자도 천부적인 자질도 자질이지만 악바리라는 별명이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니구나 라고 느낄 정도 피나는 노력을 하는 친구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결국은 이 무리한 연습이 그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켰지만 말이다. 그는 방위복무 중에도 96게임을 소화했는데 그때도 3할대 타율을 유지할 정도로 훌륭한 선수였다.

그 같은 악착같은 성격이 91, 92년 연속 타격왕이 되는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자기 몸을 돌 볼 줄 모르는 성격이 오히려 자신의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이럴 때 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도를 지나치면 해가 오게 마련이다. 그가 자신을 몸을 혹사시키지 않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팬들에게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었을 텐데 라는 진한 아쉬움을 남기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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