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남편(허정무 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 옆에 있다. 꿈만 같다. 월드컵이 끝난 뒤 그야말로 남편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할 정도로 분주하다. 어제(7일)만 해도 모교인 영등포공고에 가서 기부금을 전달한 뒤 축구협회 기술위원회에 참석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출타 중이다. 저녁 먹을 시간도 내기 힘들다. 그래도 남편의 얼굴이 밝으니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길거리에 나가면 많은 분이 '수고했다' '정말 축하드린다'는 말들을 해주신다. 그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게 아쉬워서 "아니에요. 성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라고 말하면서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얼마 전 남편은 이명박 대통령의 초대로 청와대에 다녀왔다. "영부인은 아름다우셔?" 하고 물으니 "영부인 피부가 정말 좋으시더라. 자네도 피부 관리 좀 해야겠다"고 한다.
사실 월드컵 기간에 나는 여자로서의 삶을 거의 포기하고 살았다. 밖에 나가면 '때가 어느 땐데' 하는 욕을 먹을 것 같아 백화점 쇼핑은 물론 미용실 한 번 가지 않았다. 집에서도 귀찮다는 핑계로 스킨.로션 바르는 것조차 잊을 때가 많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이제 나도 여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남편은 더 이상 국가대표팀 감독이 아닌 까닭이다.
남편이 대표팀 감독을 그만둔 데는 가족의 만류가 가장 컸다. 사실 남편은 딱히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더 좋은 성적에 대한 미련 같은 게 마음 한쪽에 있었던 것 같다. 그만두면 또다시 야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두려움도 조금은 있었을 게다.
하지만 저녁 식탁에서 두 딸은 "아빠 이제 정말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사위도 나도 같은 입장이었다. 남편이 우리 집에서는 가장인데 할아버지인데. 인터넷 세상에 들어가면 '네가 뭔데'라는 식의 인신공격이 난무해 더 이상 남편이 매스컴에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들도 힘이 다 빠졌다. 어딜 나가든 '허정무의 가족'이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조심스럽다. 이제 그냥 평범한 가족으로 돌아가 살고 싶은 소망이 크다. 대표팀을 그만두기로 한 뒤 남편은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요즘 목표의식이 사라져 허무해하고 있는 나에게도 "자네도 더 내려놓아야겠네"라며 읽기를 권한다. 비워야 채워질 수 있다고 한다. 남편은 다음 계획을 세우기 전에 마음부터 싹 비울 모양이다. 앞으로 남편이 무엇을 할지 정한 건 아직 없는 것 같다. 예전부터 '꿈나무 육성'이라는 꿈이 있었으니 이제부터 차근차근 그런 일을 진행할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에 관한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니 그저 내 추측일 뿐이다. 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그만뒀던 향수 사업을 다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허무함을 벗어나려면 뭔가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다.
9일은 초복이다. 그간 고생한 남편을 위해 일단 맛있는 삼계탕부터 끓여줘야겠다. 18일이면 우리 부부 결혼 30주년이다. 딸들은 여행 가라고 성화지만 남편이 지금처럼 바쁘면 여행은 무리일 것 같다. 대신 남편한테 맛있는 저녁을 사달라고 해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월드컵 기간 온 국민이 하나가 돼 응원해주신 은혜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보답할 기회를 찾을 것이다.
# 남아공 월드컵_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