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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PEN…150년 전 술집에서 골프 역사는 시작됐다

"우리동네에도 골프 코스를"
술김에 내뱉은 말은
우승 상금 133만 달러
"THE OPEN"을 만들었다

요즘 한국 직장인들의 술자리에서 골프 얘기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 그때 그 사람들도 골프 얘기로 꽃을 피웠다. 그러다 “우리 동네에도 골프 코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술김에 한 얘기였지만 그들은 실행에 옮겼다.

운도 좋았다. 골프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세인트 앤드루스의 뛰어난 프로인 톰 모리스가 마침 놀고 있던 차였다. 그들은 톰 모리스를 그린 키퍼로 스카우트해서 골프 코스를 만들었다. 프레스트윅 사람들은 매우 만족해했다. 자신들의 코스가 매우 좋고 모리스의 골프 실력도 최고라고 생각했다. 세인트 앤드루스나 머셀버러 같은 명문 골프 코스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느꼈다. 자랑을 하고 싶었다. 붉은 사자 여관 술집에서 또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곳에서 전국의 프로들을 모아 대회를 여는 것이었다. 요즘도 명문을 지향하는 신설 골프장은 홍보용으로 프로대회를 열곤 한다.

대회의 이름은 '제너럴 골프 토너먼트 포 스코틀랜드'였다. 전국의 골프장에 편지를 보냈지만 프로는 8명만 나왔다. 상금이 대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승을 하지 못하면 여비도 대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들이 나온 이유는 다음 날 벌어지는 클럽 챔피언십에서 귀족의 클럽을 들어주면서 캐디피를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회 참가보다는 캐디피가 더 큰 목적이었다.

프레스트윅 사람들이 아쉽게도 우승은 톰 모리스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마추어인 귀족들은 이 경기를 보고 프로의 실력이 대단치 않다고 느꼈다. 한번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듬해 아마추어와 프로의 벽을 헐고 누구나 참가해서 실력을 겨루자며 대회의 문호를 열었다. 그것이 브리티시 오픈이 '열린(open)'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계기다. 이전까지 오픈이란 명칭을 쓰는 대회가 없었기 때문에 오픈은 고유명사다. 누구나 참가해 진정한 챔피언을 가리자는 스포츠의 정신이 녹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오픈 챔피언십은 문호를 연 1961년 시작됐다.

대회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된 인물인 톰 모리스(혹은 올드 톰 모리스)는 오픈 챔피언십에서 4번 우승했다. 그러나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십을 키운 사람은 그의 아들 톰 모리스 주니어(혹은 영 톰 모리스)다. 그는 최초의 골프 천재였다. 1868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첫 우승을 했다. 두 번째 우승하던 1869년엔 1라운드 8번 홀에서 홀인원을 했는데 프로 골프 사상 처음이었다. 1870년 대회 1번 홀에서는 스푼을 3번 쳐서 홀아웃했다. 당시 파 6으로 여겨지던 긴 홀이어서 사실상의 알바트로스다. 역시 그가 처음으로 한 것이다.

그는 10대에 오픈 챔피언십에서 3연속 우승하면서 아이돌 스타가 됐다. 골프 팬들은 톰 모리스 주니어의 샷에 환호했다. 구름 같은 관중이 그를 따랐다. 톰 모리스 주니어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미친 것 같다고 해서 'fanatic'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팬(fan)의 어원이 됐다. 브리티시 오픈은 1 2차 대전 중 경기가 열리지 못했다. 대공황이 일어난 후엔 경비와 시간 문제로 당시 최고였던 미국 선수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내리막길이었다. 영 톰 모리스를 향한 천둥 같은 함성을 다시 깨운 사람은 아널드 파머(미국)다. 파머도 영 톰 모리스처럼 그린 키퍼의 아들이었다.

그는 1960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린 브리티시 오픈에 참가했다. 파머는 그해 첫 메이저대회인 마스터스 마지막 2개 홀에서 잇따라 버디를 잡아내 한 타 차 역전 우승을 했다. US오픈에서는 4라운드를 선두와 7타 차 15위로 시작해 역전 우승한 터였다. 그랜드슬램을 위해 브리티시 오픈 참가를 결정했다. 마침 100주년 기념 대회여서 엄청난 관심이 쏠렸다.

그는 마지막 라운드를 4타 차로 출발해 맹렬히 선두를 추격했으나 결국 1타 차로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나 파머는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반드시 오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갤러리의 큰 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61년과 62년 이 대회에서 연속 우승했다. 브리티시 오픈의 영광도 되살려냈다. 선수로서 파머는 경쟁자들을 완벽히 압도하지 못했다. 전성기도 짧았다. 그러나 인기는 최고였다. 잘생긴 외모와 대중과 비슷한 평범한 배경 이기든 지든 드라마틱한 결과를 만드는 화끈한 경기 스타일 팬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그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50년이 지났다. 올해 150주년 기념 대회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열린다. 특별한 대회여서 관중이 2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날씨에 따라 선수들의 성적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날씨가 좋았던 2000년 오픈에서 타이거 우즈는 19언더파로 우승했다. 링크스에서 라운드하는 사람들은 궂은 날씨를 탓할 때가 많다.

R&A
영국왕립골프협회 사실은 프라이빗 클럽
골프 규칙 심판자 THE OPEN


디 오픈 챔피언십을 개최하고 골프 규칙을 주관하는 R&A는 'Royal and Ancient Golf Club of St Andrews'의 약자다. 흔히 영국왕립골프협회라고 번역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협회가 아니라 프라이빗 클럽이다. 1754년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클럽을 결성했다가 1834년 영국 왕으로부터 Royal & Ancient라는 칭호를 받았다. 가장 오래되고 정통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아서다.

이후 세인트 앤드루스 클럽은 골프 규칙을 만들어서 회원들에게 배포했고 다른 클럽이나 개인이 규칙에 대해 질문을 하면 답도 해줬다. 그래서 1897년 영국 클럽들이 모여 공통된 룰을 만들 때 R&A 규칙을 토대로 했다. 현재 R&A는 골프 규칙과 클럽 디자인 등에 대한 마지막 결정을 할 수 있는 기관이 됐다. 1920년엔 적자에 허덕이던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십 개최권을 가져왔다. TV를 통해 대회가 중계방송되면서 디 오픈 챔피언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2004년엔 골프협회의 기능을 담당하는 'The R&A'가 생겨났다.

CLARET JUG
THE OPEN 우승컵 '와인 디캔터'를 의미
진품은 하나 모조품은 네 개


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십 우승자의 우승컵을 클래릿 저그(Claret Jug)라 한다. 대회 초기엔 우승자에게 은화 5파운드와 은제 버클을 단 빨간색 모로

코산 가죽 벨트(챌린지 벨트)를 줬다. 우승자는 벨트를 1년간 보관만 했고 3회 연속 우승해야만 챌린지 벨트를 가져갈 수 있었다. 대회 창설 10년 만인 1870년 19세의 골프 천재 톰 모리스 주니어가 3회 연속 우승하면서 벨트를 가져갔다. 이듬해에는 챔피언에게 줄 벨트나 우승컵이 없어 대회를 치르지 못했다.

1872년 세인트 앤드루스 클럽 등이 우승컵 제작비를 나눠 내기로 하면서 대회는 재개됐다. 우승컵은 클래릿 저그로 불리는 트로피다. 공식 이름은 골프 챔피언 트로피다. 클래릿이란 프랑스 보르도산 레드와인을 말한다. 주전자 혹은 디캔터를 뜻하는 저그(jug)는 1873년 만들어졌다. 클래릿 저그를 처음 받은 선수는 1873년 챔피언인 톰 키드다. R&A는 1927년부터 클래릿 저그의 진본을 클럽에서 보유하고 모조품을 우승자에게 1년간 빌려줬다. 1927년 우승자인 바비 존스가 마지막으로 진품을 받은 선수다. 당연히 이듬해 우승자인 월터 헤이건은 처음으로 모조품을 받아간 선수가 됐다.

1990년에는 모조품이 하나 더 만들어져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 옆에 세워진 브리티시 골프 박물관에 전시됐다. 2000년과 2003년 해외 전시용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 모조품이 제작됐다. 진짜 클래릿 저그는 R&A 클럽하우스에 챌린지 벨트와 함께 있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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