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에 우크라이나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미국에 온지 15년입니다만, 제 친구중에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아주 어렸을 때 미국에 온 친구와 함께 그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추운 나라의 겨울은 이곳 미국, 그중에서도 남가주 엘에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많은 분위기였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침엽수림의 나무들이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맞이하면서 벌거숭이가 되어, 차디찬 동토의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고자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수도 키에브에서 그 무시무시한 소련의 흑해 함대가 있던 오뎃사로 가는 길을 찾다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좁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불편한 밤 기차. 많은 러시아계 사람들과 찐한 커피, 그리고 밤새 기울일 수 있는 보드카. 키에브를 떠나 이름 모를 도시들을 지나며, 앙상한 가지에 모진 바람을 받아들이는 나무들이 쓰치며, 그리고 전쟁에 시달린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듯이 허망하게 부서진채로 그대로 남겨진 콘크리트 블록으로 쌓여진 구조물들.
갑자기 제 친구가 조용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전에 우리조상 독립군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벌판을 오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 이 추운 겨울날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겟다고 아는 이도 없고 맞는 음식도 없는 이 외국땅에서, 쫒기듯이 이리저리 다니며 밤기차 한켠에 몸을 깊게 묻고 광복의 그날을 기리며 저 나무들처럼 매서운 눈보라를 버텨내고자 했던 그 황량함, 그 스산함, 그 서러움, 그리고 그 무서움."
여행이라는 것이 제 집 떠나면 늘 신비스럽고 흥분되고 기대가 넘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늘 고생이고, 늘 긴장이고, 늘 모험이고, 늘 도전이련만, 그 옛날 "제 집"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이 남의 나라로 떠나 빼았긴 "제 집"을 찾고자, 그리고 찾지 못한다면 돌아갈 "제 집"도 없다는 마음을 안고 살아갈 때는 얼마나 마음이 갈기갈기 찟어졌을까 가슴이 미어 왔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그대로 담아 이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아주 어릴적에 온 이 친구에게, 한국말 보다도 영어를 더 편하게 쓰고 이제는 스스로가 미국인이라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이 친구에게, 과연 조국이란 무엇이고 한국인이란게 무엇이기에 영화로나 겨우 봄직한 그런 광경에서 광복군을 떠 올리고 만주벌판, 시베리아 벌판을 떠올리게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친구는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 어느 구석에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밀려오는 공연한 느낌에,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우리의 핏줄이고 우리의 조국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그 무엇이 자연스럽게 이런 느낌을 가지게 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긴 밤기차에 지나가는 작은 도시들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우리가 아는 그 옛날 독립투사들의 그 이름들, 그 도시들, 그 활약들, 그 나라 사랑함을 서로 주고 받으며 도착지에 도착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아침 6시가 되어 도착한 오뎃사는 과거 고귀한 역사를 가지고, 근대에는 흑해함대의 위용에 따라 다시 꽃피웠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듯 가슴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겨울 새벽 매섭디 매서운 눈보라와 살을 엘 듯한 찬바람이 가득한 오뎃사 기차역에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우리에게 도착할 종착지가 있다는 것, 이 밤 기차에서 내려서 어느 이름모를 도시에서 총을 겨누고 임무를 완수하고자 목숨을 거는 작전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뒹굴다가 어느날 우리 조국에 광복이 오기전에 누군가의 총탄에 쓰러지며 조국의 이름을 절규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긴 밤 동안 기차 안에서 마음으로나마 가득 담고 있었던 광복군의 느낌에서 해방이 된 듯 하였습니다.
아침은 까레이스키가 운영하는 고려식당에서 해장국과 육개장을 앞에두고, 다시금 그 옛날의 추억을 되담듯 한가지씩 한가지씩 밀알을 씹듯 그 느낌을 되세겼습니다. 그리곤 새삼스레 까레이스키들의 역경과 역사, 우리 조국과 주변국의 역사,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우리가 만들고 있는 진행중인 역사들을 다시금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여행이 마쳐지면 돌아갈 "제 집"이 있다는 것, 사는 것은 미국에 살아도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야기 할 수 있는 내 나라가 있다는 것, 이억만리 타국에서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살았었지만, 그리고 살아온 경로가 너무나도 다를 수 있지만 같은 뿌리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공연히 반갑고 안아보고 볼을 비비고 싶은 동족이 있다는 것, 철들기도 전에 고국을 떠나 외국에 살아도 공연히 "광복" 이나 "조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찡해지는 것, 그리고 동토의 먼 이국에서 우리의 음식이랄 수 있는 육계장을 시켜두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맛있게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제 목숨보다 우리 나라를 위해, 밤기차 한켠에 몸을 싣고 만주벌판 시베리아 벌판을 헤메고 다니던 우리의 독립운동 우국지사들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작으나마 우리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현재의 인물들이기를 마음 다지는 기회였습니다.
# 미주한인역사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