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님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2학년 정재윤 남자 어린이 입니다. 저는 2살 때 미국에 와서 영어로 공부하지만 부모님과 한국말을 써서 한국어로 책도 읽을 수 있고 편지도 쓸 수 있습니다. 한국 위인전을 읽고 세종대왕님께 편지를 쓰고 싶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과학입니다. 세종대왕님도 과학을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측우기''해시계''물시계'를 만드셨으니까요. 세종대왕님은 정말 훌륭하세요. 궁궐 안에서 편히 쉬실 수 있었는데 아침 저녁 가리지 않고 계속 일 하셨다고 하니까요. '농사직설'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농사를 쉽게 지을 수 있도록 하셨지요. 그래서 풍년이 들어 백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되었잖아요. 많은 훌륭한 일을 하셨는데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이웃나라 중국의 어려운 한자 대신에 우리 글 한글을 만드신 것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한글이 없었다면 공부를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글을 이해하지 못하니 항상 피해를 보고 바보처럼 살아갔을 테니까요. 책을 보니까 우리나라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한글이 자랑스럽고 세종대왕님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님이 우리나라 왕이신 것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어제 컨퍼런스 날이라 엄마 하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저를 많이 칭찬해 주셨어요. 공부도 잘 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다고 해서 엄마가 정말 기뻐하시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저는 나중에 커서 과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세종대왕님과 같이 책도 많이 읽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우리나라 한국의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 편지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종대왕님 사랑해요. 세종대왕님 최고예요. 안녕히 계세요.
2010.10.31. 20:34
독립운동 우국지사님께 지난 겨울에 우크라이나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미국에 온 지 15년입니다만 제 친구 중에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아주 어렸을 때 미국에 온 친구와 함께 그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추운 나라의 겨울은 이곳 미국 그 중에서도 남가주 엘에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많은 분위기였습니다. 수도 키에브에서 그 무시무시한 소련의 흑해 함대가 있던 오뎃사로 가는 길을 찾다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좁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불편한 밤 기차. 많은 러시아계 사람들과 진한 커피 그리고 밤새 기울일 수 있는 보드카. 키에브를 떠나 이름 모를 도시들을 지나며 앙상한 가지에 모진 바람을 받아들이는 나무들이 쓰치며 그리고 전쟁에 시달린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듯이 허망하게 부서진 채로 그대로 남겨진 콘크리트 블록으로 쌓여진 구조물들. 갑자기 제 친구가 조용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전에 우리 조상 독립군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벌판을 오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 추운 겨울날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겟다고 아는 이도 없고 맞는 음식도 없는 이 외국땅에서 쫓기듯이 이리저리 다니며 밤기차 한켠에 몸을 깊게 묻고 광복의 그날을 기리며 저 나무들처럼 매서운 눈보라를 버텨내고자 했던 그 황량함 그 스산함 그 서러움 그리고 그 무서움." 여행이라는 것이 제 집 떠나면 늘 신비스럽고 흥분되고 기대가 넘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늘 고생이고 늘 긴장이고 늘 모험이고 늘 도전이련만 그 옛날 "제 집"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이 남의 나라로 떠나 빼았긴 "제 집"을 찾고자 그리고 찾지 못한다면 돌아갈 "제 집"도 없다는 마음을 안고 살아갈 때는 얼마나 마음이 갈기갈기 찟어졌을까 가슴이 미어 왔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그대로 담아 이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아주 어릴 적에 온 이 친구에게 한국말 보다도 영어를 더 편하게 쓰고 이제는 스스로가 미국인이라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이 친구에게 과연 조국이란 무엇이고 한국인이란게 무엇이기에 영화로나 겨우 봄직한 그런 광경에서 광복군을 떠 올리고 만주벌판 시베리아 벌판을 떠올리게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친구는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 어느 구석에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밀려오는 공연한 느낌에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우리의 핏줄이고 우리의 조국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그 무엇이 자연스럽게 이런 느낌을 가지게 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긴 밤기차에서 지나가는 작은 도시들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우리가 아는 그 옛날 독립투사들의 그 이름들 그 도시들 그 활약들 그 나라 사랑함을 서로 주고 받으며 도착지에 도착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도착할 종착지가 있다는 것 이 밤 기차에서 내려서 어느 이름모를 도시에서 총을 겨누고 임무를 완수하고자 목숨을 거는 작전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뒹굴다가 어느날 우리 조국에 광복이 오기전에 누군가의 총탄에 쓰러지며 조국의 이름을 절규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긴 밤 동안 기차 안에서 마음으로나마 가득 담고 있었던 광복군의 느낌에서 해방이 된 듯 하였습니다. 아침은 까레이스키가 운영하는 고려식당에서 해장국과 육개장을 앞에 두고 다시금 그 옛날의 추억을 되담듯 한가지씩 한가지씩 밀알을 씹듯 그 느낌을 되새겼습니다. 그리곤 새삼스레 까레이스키들의 역경과 역사 우리 조국과 주변국의 역사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우리가 만들고 있는 진행중인 역사들을 다시금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여행이 마쳐지면 돌아갈 "제 집"이 있다는 것 사는 것은 미국에 살아도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야기 할 수 있는 내 나라가 있다는 것 이역만리 타국에서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살았었지만 그리고 살아온 경로가 너무나도 다를 수 있지만 같은 뿌리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공연히 반갑고 안아보고 볼을 비비고 싶은 동족이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제 목숨보다 우리 나라를 위해 밤기차 한켠에 몸을 싣고 만주벌판 시베리아 벌판을 헤메고 다니던 우리의 독립운동 우국지사들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작으나마 우리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현재의 인물들이기를 마음 다지는 기회였습니다.
2010.10.31. 20:33
유관순열사님께 유관순열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지현이라고 하며 미국에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날이 얼마 남지않아서 바쁘지만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 편지를 쓰기 전에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유관순 열사님의 이름과 독립 만세를 부르셨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쓰면서 열사님의 가족 관계 성품 가정적 분위기 등 열사님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열사님이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언니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더욱 더 그러하게 느낀 이유는 열사님도 저처럼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하셨다는 사실이 저로 하여금 열사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열사님처럼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열 네살이 되던 해에 한국과는 문화적으로 다른 미국으로 부모님을 떠나와서 힘든 일도 많았고 외로운 적도 많았습니다. 저는 미국 동부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라는 주에 살고있는데 서울에서 자란 저에게는 굉장히 낯선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언어도 달라서 적응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 제가 성숙해질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내서 그런지 친구들도 많고 리더로서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열사님 열사님의 성격을 알아가면서 저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사님의 당찬 성격은 열사님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어요. 열사님의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된 분이셨더군요. 구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 운동자였기도 하셨구요. 저도 무척이나 활발하고 제 의견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열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겸손해지기만 합니다. 열사님의 용기와 대담함이 한 나라에 영향을 끼친 것을 보며 저도 어느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열사님 아버님께서는 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셨더군요. 이러한 아버지를 보며 자랐을 열사님이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셨으며 열사님 또한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셔서 돈독한 신앙심을 키우는 한편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가지셨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듭니다. 특히 열사님께서는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지낼 나이에 어려운 상황에 놓인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신 열사님을 떠올리니 지금의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답니다. 그리고 요즘 사소한 것에 불만이 많았는데 열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바꿨고 많은 것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1918년 봄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을 당시 열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즐거운 나날이었을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 열사님과 같이 학교에 다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는 아마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을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학교생활 속에서도 열사님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지요.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 자신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많은 저에게 어린나이에도 그런 큰생각을 하신 열사님은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열사님의 나이가 제 나이보다 조금 어린 나이였을 텐데 학교를 다니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 같은 사랑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는지 놀랍고도 존경스럽습니다. 열사님 저는 곧 부모님과 동생을 뵈러 한국에 갑니다. 너무 기다리고 기다려지는 그날에 무엇보다도 열사님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열사님 인생을 공부하며 참 많은 것을 생각했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사님의 용기는 절 아직도 감탄하게 합니다. 멀리 떨어져 살지만 이번 기회를 계기로 삼아서 한국을 더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한국을 지키려고 하셨던 열사님 그 애국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지켜봐 주세요. 앞으로 우리나라 한국에 부끄럽지않은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10.10.31. 20:32
USC 한국학 연구소와 UCLA 한국학 센터가 29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USC 도헤니 도서관에서'미래를 여는 한.일 관계'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제1회 미주한인역사대회'의 일환으로 한국과 일본간의 왜곡된 역사를 청산하고 서로 화합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데이비드 강 USC 한국학 디렉터 강명구 클레몬트 맥케나 칼리지 한국학 파견 교수 사오리 카다다 USC 국제 관계학 교수 마이클 디스 UCLA 일본학 디렉터 등 남가주 각 대학의 한.일 전문가들과 100여명의 일반인들이 참석해 한.일 양국의 역사.경제.문화 등의 분야에 대해 진단하고 예측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한.일 양국관계 회복을 위해서 미국내 한.일 커뮤니티 특히 젊은 2세들의 관계의 중요성이 거론됐다. 데이비드 강 교수는 이날 학술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서로를 향해 너무나 다른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물론 선입견 마저 가지고 있으며 이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며 "그러나 미국내 한인과 일본인 유학생 및 2세.3세들은 서로에 대해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평화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양국의 미래 설계를 위해 이들을 거울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일간의 문화와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간의 문제 해결을 위해 협의체를 두고 가치 체계나 규범 등을 준수하고 조율하도록 하는 다자주의 틀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강명구 교수는 한류를 예로 들며 "한류로 인해 한국의 미디어 산업에 대한 인식은 고취되고 있으나 제조업이나 기간 산업에 대한 한.일 양국간의 무역은 여전히 일본이 우위에 있다"며 "문화.경제.역사 모든 분야에서 서로간의 우월감을 버리고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고 배울 때 양국관계가 건전한 방향으로 개선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준민.황주영 기자
2010.10.29. 21:46
세종대왕님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2학년 정재윤 남자 어린이 입니다. 저는 2살 때 미국에 와서 영어로 공부하지만 부모님과 한국말을 써서 한국어 책도 읽을 수 있고 편지도 쓸 수 있습니다. 한국 위인전을 읽고 세종대왕님께 편지를 쓰고 싶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과학입니다. 세종대왕님도 과학을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측우기''해시계''물시계'를 만드셨으니까요. 세종대왕님은 정말 훌륭하세요. 궁궐 안에서 편히 쉬실 수 있었는데 아침, 저녁 가리지 않고 계속 일 하셨다고 하니까요. '농사직설'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농사를 쉽게 지을 수 있도록 하셨지요. 그래서 풍년이 들어 백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되었잖아요. 많은 훌륭한 일을 하셨는데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이웃나라 중국의 어려운 한자 대신에 우리 글 한글을 만드신 것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한글이 없었다면 공부를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글을 이해하지 못하니 항상 피해를 보고 바보처럼 살아갔을 테니까요. 책을 보니까 우리나라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한글이 자랑스럽고 세종대왕님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종대왕님이 우리나라 왕이신 것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어제 컨퍼런스 날이라 엄마 하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저를 많이 칭찬해 주셨어요. 공부도 잘 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다고 해서 엄마가 정말 기뻐하시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요. 저는 나중에 커서 과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세종대왕님과 같이 책도 ㅁ낳이 읽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우리나라 한국의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 편지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종대왕님 사랑해요. 세종대왕님 최고예요. 안녕히 계세요.
2010.10.29. 17:47
Dear King Sejong, Hello King Sejong, my name is John Niroula and I am a 9th grader who attends Van Nuys Highschool in Los Angeles, California. I am very honored to be able to write a letter to you as I have heard and read many great things about you. Your name is constantly mentioned in Korean history as an important figure. Actually, I knew nothing about you until 3 years ago when I started to attend Saturday-Korean school (I am half Korean and half Nepalise so I wanted to learn my mother's language. At the time I was in 6th grade at the time and could not even read or write the slightest Korean, but now I am able to read and understand very well). There I was able to learn the Korean language, Korean history, and Korean culture. Furthermore, I was able to understand, even without ever having been there, that Korea is an amazing country full of interesting history traditions, through all the stories I read and pictures I saw. While learning about Korean in general, I learned a great deal of information about you as well and came to develop a deep respect for you. You are a truly amazing person. First of all, you were the four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of Korea, which is an important task as if you had not been king, Korea might not be what it is today. Moreover, you are one of the two only kings in all of Korean history to have the term "Great" added to your name (the other being King Gwanggaeto). Also, you were an amazing scholar. You opened a great school, the Jibhuhnjunee, for other scholars to study, and I have heard from my parents as well as my Korean teacher that you were diligent and loved to learn new things, which is similar to me. Lastly (and what I personally think the most important) you were an incredible inventor. Although your greatest invention was, and will forever be the Korean language (Hangul) (or more specifically Hoonminjyunghon, which later became the basis for the modern Korean language). I, personally know how hard it is to make a writing system from scratch. This is because when I was young my friends and I would try to make a secret code so that we could write to each other without others knowing what we wrote; however, we failed at this task, as it was extremely difficult and nearly impossible to make something entirely new and unique, but you were able to. Thanks to you, thousands of Koreans do not need to write with Chinese characters, but have a language of their own that is easy to learn and write. My mother says you must have been a very thoughtful, caring person to have loved the general public enough to gather scholars and create a whole new writing system. Personally, I agree with my mother because I do not think just any king would do so much for "his people" when you could have just lived a luxurious life all to yourself (but that does not sound like you). Although you are most famous for the invention of Korean, you also made a water clock, a sundial, and a rain gauge, and even though I have no idea how you were able to make these inventions, I respect you for your intelligence to do so because I have never invented anything that was or could have been useful to an entire nation in my life. So far, I have never been to Korea, but when I do (and I know I will in the near future) I wish to visit your tomb and statue to learn more about you. Until then, I will work hard in Korean school to learn Korean as it is a very valuable gift you left behind, just for us Koreans. Sincerely, John Niroula
2010.10.29. 17:47
유관순열사님께 유관순열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지현이라고 하며 미국에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날이 얼마 남지않아서 바쁘지만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 편지를 쓰기 전에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유관순열사님의 이름과 독립 만세를 부르셨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쓰면서 열사님의 가족 관계, 성품, 가정적 분위기 등 열사님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열사님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언니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더욱더 그러하게 느낀 이유는 열사님도 저처럼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하셨다는 사실이 저로 하여금 열사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열사님처럼 어린나이에 집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열 네살이 되던해에 미국이라는 한국과는 문화적으로 다른 곳 에 부모님을 떠나와서 힘든일도 많았고 외로운적도 많았습니다. 저는 미국 동부에 있는 펜실베니아라는 주에 살고있는데 서울에서 자란 저에게는 굉장히 낮선 곳이 었습니다. 게다가 언어도 달라서 적응하는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 제가 성숙해질수 있었던 기회였던것 같습니다. 지금은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내서 그런지 친구들도 많고 리더로서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열사님, 열사님의 성격을 알아가면서 저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사님의 당찬 성격은 열사님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어요. 열사님의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된 분이셨더군요. 한말 가산을 털어 향리에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 운동자였기도 하셨구요. 저도 무척이나 활발하고 제 의견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열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겸손해지기만 합니다. 열사님의 용기와 대담함이 어느 한 나라에 영향을 끼친것을 보며 저도 어느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열사님 아버님께서는 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셨더군요. 이러한 아버지를 보며 자랐을 열사님이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 구국의 신념과 방도가 기독교에 있음을 깨닫고 향촌 유지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민중 계몽운동에 노력하고 있었으며 열사님 또한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감리교에 입교하셔서 돈독한 신앙심을 키우는 한편, 부친의 훈도 아래 민족의식을 가지셨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듭니다. 특히 열사님께서는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를 몸소 체험하면서 민족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지낼 나이에 어려운 상황에 놓인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신 열사님을 떠올리니 지금의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답니다. 그리고 요즘 사소한것에 불만이 많았는데 열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바꿨고 많은 것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1918년 봄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교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을 당시 열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매우 즐거운 나날이었을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의 보살핌 속에 선진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금세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 열사님과 같이 학교에 다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는 아마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을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학교생활 속에서도 열사님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지요. "난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듣고 제 자신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많은 저에게 어린나이에도 그런 큰생각을 하신 열사님은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열사님의 나이가 제 나이보다 조금 어린 나이였을 텐데 학교를 다니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 같은 사랑을 어떻게 가질 수 있었는지 놀랍고도 존경스럽습니다. 열사님, 저는 곧 부모님과 동생을 뵈러 한국에 갑니다. 너무 기다리고 기다려지는 그날에 무엇보다도 열사님 생각이 날것같습니다. 이번에 열사님 인생을 공부하며 참 많은 것을 생각했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사님의 용기는 절 아직도 감탄하게 합니다. 멀리 떨어져 살지만 이번 기회를 계기로 삼아서 한국을 더 알리고 다른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칠수있는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한국을 지키려고 하셨던 열사님, 그 애국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지켜봐 주세요. 앞으로 우리나라, 한국에 부끄럽지않은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지현 올림
2010.10.29. 17:46
Dear Dosan Ahn Chang Ho, My name is Anna and I am a freshman at Loyola Marymount University. I am writing to you because I wanted to tell you that I admire and respect you for the hard work you have done to make an improvement in the Korean society, especially in America. When I first read about you, I was in awe because you came to California and worked to advance the lives of the group of Koreans living in San Francisco. I thought it was very daring of you to create a community even though there were only few Koreans. Without abandoning the small Korean population in America, the fact that you diligently worked with the Koreans to help them become strong individuals was astounding. Your duty as a leader who had a strong sense of civic responsibility led me to choose you as a role model in my heart. Currently, I am a fellow for Asian Pacific Student Service at my school. As a leader in the small Asian population at my school, I always look up to you for support for I feel like you have been in a similar situation. My fellows and I work on bringing all the other Asian American students together and hope to make them culturally aware of their own and other Asians' ethnicity. Just as you saw the need for social change, internally and externally for Koreans living in San Francisco and actually made a change through starting the first community organization for Koreans in America, I too want to a difference at my school by making people more aware of the Korean and Asian community in United States. When I read that you and your wife, Helen created the "Cleaner Homes, Hands and Habits" campaign and went to the places Koreans lived and physically cleaned the homes for the people so that they could improve their social image, you have taught me a lifelong lesson. You have taught me that a leader is not a person who acts superior towards others. Instead, a leader is a person who works hard with the people that they are surrounded by and acts as a model for the rest of the society. Your daughter, Susan Ahn Cuddy told me a phrase that was brought down by you, "Be a good American citizen… but don't forget your heritage". As a Korean American, this phrase is engraved in my heart. I will work to impact other Korean Americans just as you have improved the lives of Korean immigrants. Now as a leader in my community, you have given me the courage to not be afraid but to make a greater change in a small world. Sincerely, Anna Cho
2010.10.29. 17:44
대단히 존경하는 김 필 순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타향 미국의 남가주에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Paul Cho라는 학생입니다. 현재 저는 남가주에 소재한 얼바인 가주 주립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며, 세상에 선생님처럼 의술을 넘어선 인술을 펼침으로써 창조주의 자비를 전하기 위한 의사가 되기 위한 대망을 품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기거하시는 하늘 나라에는 선생님처럼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써 교민 사회를 지도하셨던 여러 독립 투사 선생님들이 계신 줄로 압니다. 애석하게도, 지구촌은 21세기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도 하늘에는 교신할 방법이 없지만 이렇게 펜을 들고 선생님께 마음을 전합니다. 남가주에서 3년 전 여름 의사들의 독립 투쟁기라는 독립 투쟁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며 고명하신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학교 인문학 도서관 동아시아학 전시관에서 선생님의 생애를 조명한 전기를 읽으며, 조국과 사해동포를 위해 의사로써 의미있게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삶을 통해 귀한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께 대단히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한민족으로써,국제 무대에서 당당할 수 있는 있도록 자유와 평화가 숨쉬는 독립국, 대한민국을 건설의 밑거름이 되셨던 선생님의 희생에 대단히 감사를 드립니다. 선생님의 전기에서 선생님의 기도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생님께서 동포들과 함께 황무지 간도를 개간하시며 하나님께 독립될 조국 대한민국이 우수한 과학 기술에 근거한 탁월한 의학 실력을 발휘하여 조국의 동포들 뿐만 아니라 세계의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여러 이웃들을 섬기는 의학 선진국이 될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리신 것을 기억합니다. 선생님께서 기도를 올리신 지 100여년이 되어가는 오늘날 그 기도는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몯두 하늘에 상달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자국민 뿐만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여러 외국인들의 질병을 치유하며, 한국 국제 협력단을 통해 제 3 세계 개발 도상국에 의료 봉사단을 파견하여, 빈곤 가운데, 의료 시설이 열악하여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현지인들을 치유하며 국위를 신장할 정도로 의학 기술이 발달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런 흐름 가운데, 여러 의료 선교사님들이 북국에서부터 남미의 최남단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빈곤한 환자들을 돌보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현지인들에게 아름다운 나라, 위대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모교인 Sevrance의과대학은 세계 최정상급 의료 교육 기관 가운데 한 곳으로 선정이 되어, 미국 최고의 명문 의과 대학 Johns Hopkins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여러 의학 연구를 공동 실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며 우러러 보는 정보통신 기술의 최강국으로 성장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100여년 전 X-ray를 사용하여 힘겹게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시던 시절과 달리, 첨단 의학 장비로 환자의 병을 1세기 전에 비해 더욱더 단축된 시간에 더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현실이 선생님께서 꿈꾸고 기도하셨던 소원의 성취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영광스러운 오늘날의 과거에는 우리민족의 피와 눈물의 역사가 서려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순국하신 지 17년 후인, 1938년부터 중일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간도를 침탈하기 시작한 일제는 하얼빈에 일본의 의학자 이시이 박사를 비롯한 여러 생화학계와 화학계, 생물학계의 거두들이 군정과 함께 731 방역 급수 부대라는 명칭 하에 생체 실험 수용소를 세우고 그 곳에서 조선의 독립 투사와 양민들을 악랄한 생체 실험을 통해 가혹하게 학살했습니다. 그런 최악의 상황 가운데, 선생님의 독립 정신을 승계하기 위한 여러 후진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국력이 약하여 우리는 다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의료계의 현실은 정말 참담했습니다. 일본 관료인들은 해방 후 본국으로 철수하며 의약품과 의료 장비, 병원 기자재들을 모두 본국으로 가지고 갔고, 소련이 점거한 북한에서는 의약품 공장에서 생산되는 의약품의 90%정도를 소련군들이 탈취했습니다. 그나마 나았던 것은 대한민국 실정인데요. 대한민국에서는 그래도 미군 군의관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우리의 의료보건 체계를 수립하는 데, 협조하며 여러 의약품을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우리 의료 보건 체계를 건립하기에는 상당히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도발로 인해 발발한 6.25 동란은 한반도 전역을 황폐화시켰고, 화마가 할퀴고 지나 간 한반도의 의료복지 체계는 실로 말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그 이후, 1960년대 경제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며, 의료 보건 분야를 담당하시는 여러 분들께서 의료보건 체계의 발전을 도모했지만 애석하게도우리 의료 보건 체계의 건립은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의약품과 의료 기자재를 수입에 의존해야 했고, 우리 힘으로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생산하기 위한 체계 구축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만년 역사 가운데 무수히 많은 역경을 극복한 우리 민족은 신앙과 근면 성실한 삶을 통해 부단히 노력하여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동시에 미국과 구주 등지에서 선진 의학 지식과 기술을 익히셨던 여러 의사 선생님들과 과학자들의 수고에 힘입어 우리는 1970년대부터 자체 의료 생산 체계를 건립하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의 우수한 의약품과 의료 기자재 뿐만 아니라 의술을 전수할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했고, 이제는 지구촌의 어려운 국가들을 찾아다니며 빈곤과 질병에 지친 그들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갗추게 된 것입니다. 다만 아직도 우리 의료계에 아직도 개선해야 할 여러 가지 모순적인 면모가 많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여러 빈곤층의 환자가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동남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가난한 국가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우리 나라에 온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고된 노동으로 인해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한 경제 상황과 의료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매우 서러운 타향 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인권의 개념이 전무한 북한에서는 무수히 많은 동포가 빈곤 가운데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인해 하나님 곁으로 가고 있고, 일부 몰상식한 의사들과 생화학자, 화학자들은 반체제 인사를 상대로 인간으로써 해서는 안될 잔악한 생체 실험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압력이 생존을 위협하니 북한의 의사와 과학자들은 의사로써 지켜야 할 윤리와 의학과 과학의 발달 목적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망각한 채, 악마의 하수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김 필 순 선생님, 이런 비참한 오늘날의 상황을 내려다 봐주시며, 기도를 많이 부탁드립니다. 저는 비록 이런 비참한 상황이 화려한 영광의 이면에 존재할지라도 희망을 믿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난으로 고통받는 간도의 동포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류의 역사 가운데 불변하는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저는 신앙과 노력, 피의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 한강의 기적을 통해 오늘날의 강대국 대한민국을 건설한 한민족이 우리 의료계가 직면한 그런 문제들을 인식하며, 해결점 찾기를 시도할 때, 반드시 그런 문제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해결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의료계의 의료인들은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펼쳐 돕겠습니다. 아울러 지독한 가난 가운데 극한 굶주림과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을 찾아가 그들의 신음 소리가 나의 울음 소리가 되는 심정으로 그들을 치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런 일련의 노력을 통해, 만일 통일이 앞당겨 진다면 저희 대한의 의료인들은 북한의 의료인들과 과학자들에게 의학과 과학은 사회와 대중의 복지 증진을 위해 존재한다는 목적을 따뜻한 사랑으로 가르쳐 주겠습니다. 저는 학생으로써, 환자를 살리기 위한 의술을 익히기 위해, 의학의 세계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실력 향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현재 이수하고 있는 물리화학과 분석화학의 실력을 쌓아, 훗날 의학을 공부하는 데, 단단한 바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의료계에 들어서서 수련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에는 매일 매일 나에게 찾아오는 환자를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성심 성의 껏 진료하겠습니다. 전문의가 된 이후에는 제 인생 가운데 계획한 목표인 서부 아프리카 가나 의대 설립과 평양에 예루살렘 의대 설립을 실현하고, 현지의 천재적인 의학도들을 교수함으로써 선생님께서 의학자로써 조국과 사해동포를 위해 수고하셨던 것처럼 후진양성에 앞장서겠습니다. 그런 모든 노력을 통해 의학자로써 인류를 질병에서 해방하고 우리 조국 대한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평화와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을 구현하는데 기여함으로써,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귀한 희생이 더욱더 각광 받도록 하겠습니다. 늦은 시간 저의 장문의 편지를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런 하늘나라에서 삼위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선생님과 여러 애국지사님들께 하나님의 큰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미국 남가주에서 Paul Cho 올림 김 필 순 (1880 ~ 1922) 개화기 한국 최초의 서양 의술을 익힌 의사 가운데 한 명으로 만주로 망명한 독립군의 주치의, 독립군의 군의관 1911년 신민회 사건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하여, 김 경 당, 김 만 호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독립 투쟁과 조선 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간도의 조선인들 뿐만 아니라 한족들과 만주족 몽골족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1922년 일제가 파견한 일본인 의사가 건넨 우유를 마시고 독살되심으로써 순국했다.
2010.10.29. 17:43
독립운동 우국지사님께 지난 겨울에 우크라이나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미국에 온지 15년입니다만, 제 친구중에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아주 어렸을 때 미국에 온 친구와 함께 그 나라를 다녀왔습니다. 추운 나라의 겨울은 이곳 미국, 그중에서도 남가주 엘에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많은 분위기였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침엽수림의 나무들이 가을을 지나고 겨울을 맞이하면서 벌거숭이가 되어, 차디찬 동토의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고자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수도 키에브에서 그 무시무시한 소련의 흑해 함대가 있던 오뎃사로 가는 길을 찾다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좁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불편한 밤 기차. 많은 러시아계 사람들과 찐한 커피, 그리고 밤새 기울일 수 있는 보드카. 키에브를 떠나 이름 모를 도시들을 지나며, 앙상한 가지에 모진 바람을 받아들이는 나무들이 쓰치며, 그리고 전쟁에 시달린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듯이 허망하게 부서진채로 그대로 남겨진 콘크리트 블록으로 쌓여진 구조물들. 갑자기 제 친구가 조용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전에 우리조상 독립군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벌판을 오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 이 추운 겨울날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겟다고 아는 이도 없고 맞는 음식도 없는 이 외국땅에서, 쫒기듯이 이리저리 다니며 밤기차 한켠에 몸을 깊게 묻고 광복의 그날을 기리며 저 나무들처럼 매서운 눈보라를 버텨내고자 했던 그 황량함, 그 스산함, 그 서러움, 그리고 그 무서움." 여행이라는 것이 제 집 떠나면 늘 신비스럽고 흥분되고 기대가 넘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늘 고생이고, 늘 긴장이고, 늘 모험이고, 늘 도전이련만, 그 옛날 "제 집"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이 남의 나라로 떠나 빼았긴 "제 집"을 찾고자, 그리고 찾지 못한다면 돌아갈 "제 집"도 없다는 마음을 안고 살아갈 때는 얼마나 마음이 갈기갈기 찟어졌을까 가슴이 미어 왔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그대로 담아 이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아주 어릴적에 온 이 친구에게, 한국말 보다도 영어를 더 편하게 쓰고 이제는 스스로가 미국인이라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이 친구에게, 과연 조국이란 무엇이고 한국인이란게 무엇이기에 영화로나 겨우 봄직한 그런 광경에서 광복군을 떠 올리고 만주벌판, 시베리아 벌판을 떠올리게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친구는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 어느 구석에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밀려오는 공연한 느낌에,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우리의 핏줄이고 우리의 조국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그 무엇이 자연스럽게 이런 느낌을 가지게 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긴 밤기차에 지나가는 작은 도시들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우리가 아는 그 옛날 독립투사들의 그 이름들, 그 도시들, 그 활약들, 그 나라 사랑함을 서로 주고 받으며 도착지에 도착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아침 6시가 되어 도착한 오뎃사는 과거 고귀한 역사를 가지고, 근대에는 흑해함대의 위용에 따라 다시 꽃피웠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듯 가슴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겨울 새벽 매섭디 매서운 눈보라와 살을 엘 듯한 찬바람이 가득한 오뎃사 기차역에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우리에게 도착할 종착지가 있다는 것, 이 밤 기차에서 내려서 어느 이름모를 도시에서 총을 겨누고 임무를 완수하고자 목숨을 거는 작전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뒹굴다가 어느날 우리 조국에 광복이 오기전에 누군가의 총탄에 쓰러지며 조국의 이름을 절규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긴 밤 동안 기차 안에서 마음으로나마 가득 담고 있었던 광복군의 느낌에서 해방이 된 듯 하였습니다. 아침은 까레이스키가 운영하는 고려식당에서 해장국과 육개장을 앞에두고, 다시금 그 옛날의 추억을 되담듯 한가지씩 한가지씩 밀알을 씹듯 그 느낌을 되세겼습니다. 그리곤 새삼스레 까레이스키들의 역경과 역사, 우리 조국과 주변국의 역사,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우리가 만들고 있는 진행중인 역사들을 다시금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여행이 마쳐지면 돌아갈 "제 집"이 있다는 것, 사는 것은 미국에 살아도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야기 할 수 있는 내 나라가 있다는 것, 이억만리 타국에서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살았었지만, 그리고 살아온 경로가 너무나도 다를 수 있지만 같은 뿌리에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공연히 반갑고 안아보고 볼을 비비고 싶은 동족이 있다는 것, 철들기도 전에 고국을 떠나 외국에 살아도 공연히 "광복" 이나 "조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찡해지는 것, 그리고 동토의 먼 이국에서 우리의 음식이랄 수 있는 육계장을 시켜두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맛있게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제 목숨보다 우리 나라를 위해, 밤기차 한켠에 몸을 싣고 만주벌판 시베리아 벌판을 헤메고 다니던 우리의 독립운동 우국지사들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작으나마 우리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현재의 인물들이기를 마음 다지는 기회였습니다.
2010.10.29. 17:35
오늘(30일)부터 이틀간 열리는 제1회 미주한인역사대회(대회장 정용봉)의 선행 행사로 열렸던 '역사편지 쓰기 캠페인'의 입상자가 선정됐다. 추진 위원회는 대상에 이용범 변호사를 선정했고 부문별 최우수상은 대학부는 조바울 애나 조 중등부는 잔 니롤러 초등부는 정재윤군이 차지했다. 입상자에 대한 시상식은 역사대회 행사가 열리는 LA한국교육원에서 10시부터 거행된다. ▶문의:(213)384-8442 다음은 입상자 명단. ▶대상: 이용범 ▶최우수상: 대학부 조바울(UC어바인) 애나 조(로욜라 메리마운트대) 고등부 이지현(컴버랜드 밸리 크리스천고) 중등부 존 니로울러(밴나이스 스쿨) 초등부 정재윤(피슬러 초등) ▶우수상: 일반부 김석두 김학천 이미경 이창률 장윤덕 장준익 대학부 문수연 변성한 김태성 고등부 전지나 제이미 황 에드워드 김 조앤 임 중등부 구윤혜 김조은 유재연 조병준 이와은 애니 박 초등부 김빛 김윤혜 박윤진 배하나 이예린 에이미 복 메디슨 조 전예준 저스틴 김 ▶독립기념관장상: 김석두 변성한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상: 이창률(대상및 분야별 최우수상은 koreadaily.com에서 읽을 수 있다.)
2010.10.28. 20:09
한국과 일본간의 왜곡된 역사를 청산하고 서로 화합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제1회 미주한인역사대회'가 오늘(29일)부터 이틀간의 일정으로 시작된다. 미국에서 처음 실시되는 역사대회는 크게 ▶학술대회 ▶친선의밤 ▶차세대 포럼 등의 행사로 나뉘어 진행된다. 첫 행사로 오늘 오후 1시부터 USC 도헤니 도서관에서 USC 한국학 연구소와 UCLA 한국학 센터가 공동으로 마련하는 학술대회는 '미래를 여는 한.일 관계'라는 주제로 진행된다. 특히 각 학교에 재직 중인 젊은 교수들이 패널로 나와 기존 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한.일 양국의 역사.경제.문화 등의 분야에 대해 진단하고 예측하는 시간을 갖는다. 또한 이날 오후 6시30분부터는 가든스윗 호텔에서 고병철 박사(일리노이 주립대) 고이찌 메라 박사(USC 명예교수) 유꼬 가이후(전 일.미박물관 부관장) 등 한.일 양 커뮤니티 주요 관계자들이 참석해 '새로운 100년을 여는 한일.일한의 밤'을 진행하게 된다. 30일 오전 10시 부터는 LA한국교육원에서 한인 1세와 1.5세.2세들이 함께 모여 한국 역사에 대한 차세대 포럼 시간을 갖는다. 이날 행사에서는 지난 8월부터 실시됐던 '역사편지쓰기 캠페인'에 대한 시상식 등이 함께 열린다. 이번 역사대회를 위해 한국에서 LA를 방문한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실장은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화합과 공존의 관계를 형성하기 힘들다"고 강조한 뒤 "특히 한인 2세들의 경우 역사대회를 통해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승우 기자
2010.10.28. 20:03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미주 한인역사대회 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제 1회 미주한인역사대회가 29~30일 '100년을 넘어서 세계로 미래로'라는 주제로 열립니다. 중앙일보.중앙방송이 후원하는 이번 행사는 광복 65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100년 전 과거와 현재 앞으로의 한반도를 조명하고 한일 관계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이번 대회는 UCLA와 USC 한국학 연구소가 공동 주관하는 학술 대회를 비롯해 일본 커뮤니티가 참여하는 토론 및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번 행사는 한국 독립기념관과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등에서도 적극 후원하고 있습니다. ◇주요행사 -학술대회:29일(금) 정오~오후 5시(USC 도히니 도서관) -만찬:29일 오후 6시 30분 가든 스위트 호텔 -토론 프로그램: 10월 30일(토) 오전 10~오후 1시(LA한국교육원) ▶문의:(213)384-8442 미주한인역사대회 추진위원회
2010.10.25. 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