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고 싶은 기억 17살 여름 그날의 아버지 의문사 두고 치솟은 복수심 씻기 위한 선택 군대서도 특별 취급대상 제대 후 목회 꿈 위해 이민 씻어야 하는 삶 '버스 운전하는' 목사님
시골 길 달리며 기도·묵상
쉰이 넘은 아들은 36년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아직도 ‘선생’이라고 불렀다. 일제 치하 독립투사이자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인 아버지는 대중에게는 친숙했지만 아들에게는 먼 이름이었다.
고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준호(52) 목사가 지난 27일 LA에 왔다. 아버지 장준하 선생 추모 기념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코네티컷주 맨스필드라는 작은 시골에서 12년째 목회자로 살고 있다. 평일에는 스쿨버스 운전사로 일하고 주말에는 설교한다. 원치 않았던 산행에서 실족한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아직도 응어리다. 의문사에 대해 그는 “마치 아버지 이름 위에 검은 싸인펜이 칠해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싸인펜을 지우듯 분노를 씻고 나니, 비로소 아버님의 삶이 보였다”고 말했다.
#씻고 싶은 기억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은 무더웠다. 1975년 8월17일 일요일이다. 장 목사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그날을 한장 한장 기억한다"고 표현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또렷하게 떠올리기 어려운 기억이다.
"내가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았고 내가 가족 중 처음 현장에서 돌아가신 모습을 봤다. 어떻게 잊을 수 있나."
아버님이 산에 가시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전화벨이 울렸다. 상대방은 누구라고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한마디하고 끊었다. '장사장님(장준하 선생)이 등산중에 많이 다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모셔가셔야 하겠습니다.'가 전부였다. 부랴부랴 택시를 대절해 어머니를 모시고 포천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산아래 두고 순경과 4시간 산길을 헤맸다. '야호' '여보세요' 외치며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았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만났고 현장으로 안내됐다. 아버지는 들것에 뉘여 있었다. 얼굴에는 평소 산행에 가지고 다니던 수건이 덮여있었다.
-당시 무슨 생각이 들었나.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평소처럼 누워계실 뿐이었다.(당시 장준하는 요양중이었다) 그런데 속에서 불같이 뭔가 치밀었다. 십대의 치기어린 생각이다. '복수해야 겠다' 다짐했다."
-당시 사망 원인을 몰랐지 않았나.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모든 이들에 대한 분노였다. 항상 아버지는 형무소에 갇혀 계시던가 도망다니셔야 했다."
'민족의 일'에 바빠 아버지라고도 제대로 불러 보지 못한 부친이었다. 다들 선생이라고 하니 그도 선생이라고 불러야 했다. 74년 12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가석방으로 풀려나 집에서 요양하던 힘빠진 아버지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 매일 산에 오를 수 있는 행복을 맛보던 때였다. 그는 그 기억을 씻을 수 없었다.
#씻기 위한 선택
가장이 죽고 난 집안의 삶은 어려웠다. 남은게 아무것도 없었다. 사상계가 폐간되면서 이미 빚을 진 상황이었다. 독립투사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의 아내였던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보험 외판원으로 나섰다.
-어려움이 많았겠다.
"제가 기억하는 것만 군대가기 전 스물한살때까지 30여차례 이사했다. 어머니는 씩씩한 분이다. 아버지가 쫓겨 다니실 때도 항상 식객들이 많았다. 일주일에 두세번씩 손님들을 대접했다. 60~70년대 어머니 밥을 먹지 않은 야당 정치인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은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감시는 가족들을 내내 괴롭혔다. 학교에서는 그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취급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봤다. 대학은 갔지만 그마저도 그만뒀다.
그리고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사건이 터졌다. 그 다음날 영문도 모르고 군대로 끌려가야 했다.
군대에서도 특별취급대상이었다. 전방에서 근무했으니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있었다. 그의 상관들은 그가 언제 사고를 낼지 불안해 했다.
-군대에서 뭘 배웠나.
"어느날 밤에 보초를 서는데 휴전선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슴이 굉장히 아팠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때서야 밀려오는 듯 했다. 이 휴전선을 세운 것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없앨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했다."
제대 후 그는 목사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자 생각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을 떠나 싱가폴로 향했다. 응어리를 씻기 위한 선택이었다.
거기서 마약 중독자를 상담하고 태국 난민들을 전도했다. 모두 다 씻기 위한 과정이었다. 4년간의 타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자신은 목사가 아니라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었다. 내 목회를 해야했다. 그래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999년 이었다. 그후 12년간 그는 코네티컷주 시골마을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씻어야 사는 삶
그는 목사다. 그런데 머리를 기른다. 멋을 위해서가 아니다. 머리가 20cm 이상 자라면 잘라서 소아암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기부한다. 한번 자를 때 마다 2년씩 걸렸고 이번이 3번째다.
그는 목사다. 그런데 직업이 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교회에서 사례비로 400달러만 받는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서 선택한 일이 스쿨버스 운전사다. 지난 4년간 하루 평균 9시간씩 주 5일 운전대를 잡아왔다.
-왜 버스 운전인가.
"여긴 시골이라서 숲이 우거진 길이 무척 아름답다. 혼자 묵상하고 기도하기에 버스 운전만큼 좋은 게 없다. 혹시 생각있으신 목사님들께도 버스 운전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돈도 받고 기도도 하고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버스에 타고 내리는 아이들의 웃음도 덤으로 얻는다. 복권 당첨 되기전에는 계속한다.(웃음)"
그는 목사다. 그런데 그가 담임으로 있는 '스토어스 한인교회'는 좀 다르다. 일요일이 아니라 평일에 예배를 본다. 또 장로나 집사도 없다. 한술 더떠 동성애자의 교회 출입도 허용한다. 그는 '융통성'이라고 표현했다.
-본인은 구원을 전하는 목사다. 만약 아버지 죽음이 타살이라면 그들의 죄도 사함받을 수 있나?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용서한다고 한다면 싸구려 황색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된다. 그저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싶을 뿐이다.그래야 아버지의 삶이 좀 더 깨끗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장호준은
1959년 2월7일 서울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선택의 여지 없이 그는 장준하의 아들로 살아야 했다. 한살때 4.19 혁명이 터졌고, 이듬해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박 정권의 대칭점에 있던 아버지 덕에 어렵게 살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봤다. 대학은 갔지만 자퇴했다. 대학 총장의 특별관리 대상이 되기 싫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벌어지자 그 다음날 군대에 징집됐다. 제대후 신학을 했고,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스물아홉에 한국을 떠나 싱가폴로 갔다. 마약중독자를 돕는 일을 4년간 하다가 귀국해 목회를 시작했지만, 맞지 않았다. 99년 미국으로 건너와 12년째 코네티넛주 맨스필드라는 시골동네서 산다. 군대 가기 두달전 스물여섯에 만난 아내와 군 제대 직전 결혼했다.
딸 제이미(26)양은 넉넉치 못한 집안 형편에 혼자 돈벌어 최고 명문대학인 컬럼비아대학과 하버드를 졸업했다. 현재 박사과정 학비를 벌기 위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