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계의 악동’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그가 추앙했던 70년대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예측불허의 삶에 접근한다. [Strand Releasing]
영화 리뷰
현대 프랑스영화의 대표적 감독 중 한 명으로 도발적인 성향 때문에 ‘프랑스 영화계의 악동’으로 불리는 프랑수아 오종 감독. ‘스위밍 풀’, ‘영 앤 뷰티풀’ 등 기발한 상상력과 파격적인 성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 세계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감독은 70년대 ‘뉴 저먼 시네마’를 주도했던 독일의 거장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였다.
‘페터 폰 칸트’는 오종의 파스빈더에 대한 헌사이며 전기 영화다. 파스빈더의 1972년 영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라린 눈물’(The Bitter Tears of Petra von Kant)이 영화의 원작이다. 2022년 베를린 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연됐고 황금곰상 후보작으로 거론됐지만 수상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파스빈더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 기법을 영화에 도입한 장본인이다. 동성애자, 외국인 노동자, 창녀와 같은 소외계층을 내세워 현대사회의 소외와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키며 중산층의 이중성, 시민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폭로했다. 그 자신이 게이였으며 반항적인 이미지와 무분별한 연애 스캔들, 마약 사용 등 너저분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와 배우에게 폭언을 일삼았던 그의 인성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파스빈더는 37세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놀라운 창의력과 재능은 이후 세대의 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파스빈더의 후예’ 오종은 1990년대 프랑스 퀴어 영화를 대표했던 감독이다. 그는 초기의 도발적인 성향에서 탈피, ‘사랑의 추억’(Under the Sand, 2000) 이후로는 보다 진지하고 차분한 스타일의 영화로 전향한다. 대체로 그의 영화들은 섹슈얼리티에 치중하면서 폭력적이고 반사회적 경향이 짙다. 에로틱한 관계에 권력이 스며드는 모티브가 자주 등장한다.
파스빈더는 1972년 여성들만을 캐스팅해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레즈비언 영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린 눈물’을 발표했다. 시대의 유행을 리드하는 디자이너 페트라가 패션모델을 꿈꾸는 한 젊은 여성과 격렬하게 사랑에 빠지는 광적이고도 절망적인 관계를 그린 작품이었다. 부르주아 레즈비언 디자이너의 권력이 하찮게 여겼던 젊은 모델의 성과 미모에 무너져 버리는 아이러니가 오종에 와서는 어떤 표현 양식으로 전개될까.
오종은 우선 이 작품의 ‘성’을 남성으로 바꾼다. 그리고 영화 제목에서 ‘쓰라린 눈물’을 제거했다. 여주인공 페트라는 성공한 남성 영화감독 페터로 바뀌어 있다. 페터는 파스빈더의 페르소나(분신)이다. 오종의 ‘페터 폰 칸트’는 파스빈더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문제적 인간’ 파스빈더에 대한 오종의 오마주이며 그에 대한 인간 탐구임을 미리 알려 주듯.
한때 프랑스 최고의 미녀로 불렸던 60대 후반의 이자벨 아자니가 지나간 스타 시도니로 모습을 비춘다. [Strand Releasing]
영화감독 페터(드니 메노셰)는 비서 칼과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페터와 칼의 주종관계에는 늘 학대가 잠재해 있다. 페터는 자신이 스타로 만들었던 여배우 시도니(이자벨 아자니)의 방문을 받고 최근 헤어진 동성애 관계에 대하여 얘기한다. 그리고 곧 시도니의 소개로 아름다운 청년 아미르를 만나고 첫눈에 그에게 반해 버린다.
둘은 곧바로 동거에 들어간다. 페터는 아미르의 젊음을 탐하며 그에게 올인한다. 아미르를 스타로 키우려는 페터는 철저히 자기 위주의 일방적인 관계를 고집한다. 그의 광적인 사랑과 욕망은 결국 그를 처절하게 파괴하며 깊은 절망 속으로 빠뜨린다. 페터는 아미르에게 버림받고 나서야 자신이 그를 사랑한 게 아니라 소유하려 했음을 깨닫는다. 페터는 그 순간 한때 연인이었을지도 모르는 칼에게 의지하려 한다. 영화 내내 침묵하던 칼은 페터의 얼굴에 침을 뱉고 페터를 홀로 남긴 채 떠나 버리고 만다.
‘페터 폰 칸트’는 파스빈더의 삶을 다룬 전기이지만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접근 방식이 일반 전기영화와는 많이 다르다. 파스빈더라는 인물에 얽힌 사실보다는 프랑스적 풍자와 세속적 가벼움이 가미되어 있는 오종의 작가적 상상력에 의존한다. 예측 불가한 인물 파스빈더의 분노, 저항, 질투의 감정들이 과감하고 솔직하게 묘사되어 있다.
오종은 영화에 입문한 청년기 무렵부터 파스빈더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숨기지 않았다. 신성모독, 동성애, 근친상간과 같은 금기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영화에 등장시킨 이유도 파스빈더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파스빈더와 오종의 영화에는 늘 권력을 가진 자(페터)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아미르, 칼)을 조롱하고 억압하면서 그 위에 군림하는 상황이 제시되고 무거운 절망으로 끝을 맺는다. 신분과 지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치명적 순간은 사실 파스빈더와 오종의 영화에서 자주 반복된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낯 설은 배우 드니 메노셰(Denis Menochet)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인글로리어스베스터드’(2009)에서 초반부 유대인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나치의 심문을 받는 뚱뚱한 프랑스 농부 역을 연기했던 배우다. 메노셰는 거칠면서도 감성적이며 냉정하면서도 사랑에 약한 캐릭터 페터를 인상 깊게 연기한다. 줄담배를 피우며 슬픔과 광기 어린 눈빛으로 격하고 미묘한 파스빈더의 세계로 우리를 다시 빠져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