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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있으면 뭐하나요, 도움 받을 수 없는데”

[세계가정의날 특별기획]
유명무실한 ‘가정폭력방지법(VAWA)’
피해자들 실질적인 수혜 불가능에 가까워

오늘(15일)은 세계가정의날이다. 가정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유엔이 제정한 날이지만, 오늘도 누군가는 이 ‘가족’ 때문에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다.  
 
법률사무소 ‘돌란&짐머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국에서 약 1000만 명의 가정폭력 피해자가 발생했으며 매 1분마다 약 20명이 가정에서 신체적 학대를 당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뉴욕주에서는 2023년 7월부터 2024년 6월까지 6358명이 가정폭력 위험을 신고했으며, 이는 전년 대비 161% 증가한 수치다.  
 
VAWA를 아시나요?
 
#. 맨해튼의 한인 조 씨는 결혼 후 남편에게 지속적 학대를 당해왔다. 점점 무력해지는 몸과 마음에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못 하다가, 암에 걸릴 정도로 심각해진 건강 상태를 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친구들도 협박해 주변 도움을 받기도 어려웠기에, 무작정 인터넷을 검색해 비영리단체들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조 씨는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이 단계부터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더 적합한 단체로 연결해주겠다며 형식적인 질문만 반복됐기 때문이다.
 
도저히 집에서 버틸 수 없다는 판단에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셸터에 찾아갔지만, 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 더 최근인 사람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하루만에 쫓겨났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리서치를 하던 중, 조 씨는 ‘가정폭력방지법(VAWA·Violence Against Women Act)’에 대해 알게 됐다. VAWA는 1994년 제정된 연방법으로, 가정폭력·성폭행·데이트 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법이다. 이 법의 중요한 조항은 피해자를 이민법상 보호해준다는 것인데, 가해자의 협조 없이도 독립적으로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해준다.  
 
조 씨의 남편 역시 조 씨의 이민 신분을 이용해 협박을 하고 있었다. 노동허가도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조 씨는 “남편이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영주권을 취소할 거라고 협박했고, 여권을 빼앗고 신용카드를 가위로 잘라버렸다”며 “피해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신분·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했고 그래서 VAWA 제도를 발견했을 때 안심했다”고 전했다.  
 
뚫을 수 없는 바늘구멍
 
VAWA 제도를 알게된 후 조 씨는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웃 주민의 증언, 의사 소견서 등을 어렵사리 모아 증거 자료와 청원서를 이민서비스국(USCIS)에 제출했고, 심사를 거쳐 접수증을 받았다. VAWA를 통해 영주권이 나오기까지는 긴 절차를 거쳐야 해서, 이 기간 동안 피해자들이 조금씩 자립할 수 있도록 접수증을 먼저 내주는 것이다.  
 
뉴욕의 경우 이 접수증을 시 인적자원국(HRA)에 제출하면 주거·푸드스탬프·메디케이드 등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온라인으로 제출했으나 아무 소식이 없자 조 씨는 사무실로 찾아갔다. 한참을 기다려 HRA 직원에게 접수증을 내밀었지만, 서류를 대충 훑어본 후 “이런 사례는 처음이라 모르겠다”는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조 씨가 VAWA 권리를 설명하고 “연방법에 명시된 권리를 무시하면 고소할 것”이라고 호소했으나, 직원들은 귀찮아하며 쫓아냈다. 조 씨는 “USCIS로부터 접수증을 받기까지도 오래 걸리고, 증거를 모으기도 어려우니 피해자들이 중간에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HRA 직원들이 나같은 가정폭력 피해 사례를 처음 본 것”이라고 했다. USCIS 데이터에 따르면 VAWA 자격 청원서를 제출한 후 자격 승인을 받을 때까지 학대받은 배우자는 평균 31.1개월, 자녀는 30.4개월, 부모는 23.5개월을 대기해야 한다. 또 2023년 기준 USCIS에 접수된 청원서는 5만900건이었으나, 처리 완료된 청원서 수는 1만1700건에 불과했다.  
 
조 씨는 “정부기관 직원들조차 VAWA에 대한 교육이 안 된 상태인데, 피해자들이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겠냐”며 “영어를 잘 못하는 피해자들은 아예 뚫을 수 없는 바늘구멍이나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조 씨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쯤, 운 좋게 지인을 통해 뉴욕가정상담소 이지혜 소장을 소개받았다. 이 소장이 여러 비영리단체장들과 이민법 전문 변호사를 한 자리에 모아 조 씨의 문제를 논의했고, 이중 시 HRA에 고위급 지인이 있는 사람이 있어 가까스로 문제가 해결됐다. 조 씨는 “나는 운이 좋았지만, 대부분 피해자들이 이 시스템을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USCIS 데이터에 따르면 VAWA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기까지는 평균 4~5년의 시간이 걸린다. 조 씨는 "그 과정 중에 피해자들은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전했다. 게다가 이 과정을 진행하는 단계마다 각종 장애물에 가로막히니, 조 씨는 “좋은 제도를 만들어뒀지만, 실질적으로 피해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구조”라고 했다.  
 
트럼프 취임 이후, 설 자리 더 좁아져
 
이 소장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가정폭력 프로그램 지원이 크게 줄어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조 씨 역시 “안 그래도 힘들었던 VAWA 절차가 더 까다로워지고 진행이 느려졌다”고 우려했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조 씨는 “시스템에 가로막히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그 과정 속에서 느꼈던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라고 밝혔다. “가정폭력 피해자라고 어렵게 밝혔으나, 사실을 밝히는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변한다. 폭력에서 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지 겪어보기 전까지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그는 “그 시선이 피해자들을 더 침묵하게 만들기 때문에, 주변에 가정폭력 피해자가 있다면 편견 어린 시선보다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전해달라”고 강조했다.  

윤지혜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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