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모르는 곳을 향하여

이창민 목사-LA연합감리교회
목적지를 알리는 탑승구 전광판에는 ‘유럽 내 미상의 목적지(Unknown Schengen)’라고 적혀 있었다. 이 비행기는 1985년 체결된 ‘솅겐(Schengen) 협정’에 따라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유럽 내 30여 국가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 중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미스터리 비행기였다.
승객은 물론, 기장을 제외한 승무원들조차 행선지를 모른 채 비행에 나설 정도로 도착지에 대한 보안이 철저했다. 이 비행기는 이륙 후 두 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를 밝혔다. 비행기가 향하는 곳은 스페인의 중세 도시, 세비야였다. 여행을 마친 많은 이들이 세비야의 풍경보다, ‘모르는 곳을 향하여’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에 느꼈던 기대와 설렘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는 후기를 남겼다.
목적지를 모른 채 여행을 떠나는 미스터리 여행이 얼마나 인기였는지, 티켓은 발매 4분 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한 언론은 이 소식을 전하며 이런 미스터리 여행은 목적지의 비자 문제가 없는 유럽이나, 땅이 넓은 미국이나 호주의 국내선 여행에서나 가능하지,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여행이라고 하면서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를 했다.
“한국엔 없는 상품. 우리야 뭐… 나라와 국민 전체가 목적지 미상의 미스터리 여행을 하는 중일 수도?”
이 문장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정치, 불투명한 경제, 흐릿한 미래가 맞물린 현실에 대한 자조적 진단이었다. 전체가 목적지 미상의 미스터리 여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질문이 이민자로 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우리가 찾은 미국은 표면상의 목적지였을 뿐, 그 너머에서 어떤 삶이 펼쳐질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스터리 여정이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코펜하겐에서 비행기를 탄 여행객들은 모르는 곳을 향하여 함께 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한 동료의식을 느꼈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낯선 세계를 향해 함께 가고 있다는 공통점이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이민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민자는 각자의 사연과 꿈을 안고 익숙함을 떠나 모르는 곳을 향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이다. 이민자로 사는 우리는 모두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다르고, 생각의 방향도 서로 다르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모르는 곳을 향한 여정에 함께하고 있다. 그 여행에 나선 이들은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바라보아야 한다. 비방보다는 위로, 무관심보다 격려, 불신보다 신뢰로 서로를 감싸안아야 한다.
목적지는 여전히 불확실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서로 붙잡아 주는 그 순간, 이 길은 고단한 생존의 현장이 아니라 은혜의 여정이 될 것이다. 낯선 길일수록, 함께 걷는 이가 필요하다. 그렇게 우리는 ‘좋은 이민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모르는 곳을 향해 갈지언정 서로의 길이 되어줄 품 넓은 사람들과 함께하기에.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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