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너무 더웠다. 창문을 열어 놓고 밤잠을 청해야 했다. 창문으로 벌레 소리가 라이브 밴드처럼 들려온다. 쏴아 쏴아 짜르르. 낮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 숨어서 저런 소리를 내는지. 가지런한 생명의 합창처럼 들리지만, 저 중에는 숨이 찬 벌레도 있을 것이다. 몸집이 유달리 작은 사마귓과의 어떤 벌레는 자기 몸보다 훨씬 큰 나뭇잎에 몸을 감싼다고 한다. 벌레는 날개를 비벼서 소리를 낸다. 작은 날개의 미미한 소리에는 어떤 암놈도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몸에 나뭇잎을 두르고 확성기처럼 큰 소리를 낸다고 한다. 작은 벌레의 영리한 전략에 나는 감탄했다. 아침이 되니 두 손주가 들이닥쳤다. 여름내 다니던 캠프가 끝났다고 하면서 며느리도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학교 개학 전에 아이들이 좀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네 가서 먹고 놀면서 뒹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느지막이 10시경에 우리 집에 왔다. “아침 먹었니?” “아니, 아빠가 할머니 집에 가서 먹으래.” 늦잠에서 깬 아이들을 바로 데리고 온 것 같았다. “파니니 해줘?” 나는 와플 기계에 빵을 넣었다. 두툼한 빵이 들어간 기계의 뚜껑을 빵이 납작해지도록 눌렀다. 빵은 바싹하게 구워지고, 모차렐라 치즈는 녹아서 실처럼 늘어진다. 캔탈롭을 서너 쪽 곁들였다. 덩치가 두툼한 누나에 비해서 베짱이처럼 마른 둘째 아이가 한 모금 베어 문다. 제 누나가 후딱 먹고 사라진 식탁에서 작은 아이는 오물거리며 오랫동안 먹는다. 나는 예쁘다고 머리를 쓸어준다. 작년까지만 해도 작은 아이와 나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식성이 까다롭고 소리를 지른다고 나는 못마땅해했다. 제 누나가 무슨 말을 시작하면 거의 고함 수준으로 중간에 치고 들어온다. 누나 말을 끊지 말라고 야단쳤다. 밥을 먹으라고 부르면 제 누나는 얼른 달려오는데, 작은 아이는 먹기 싫다면서 미꾸라지처럼 어디론가 숨는다. 그러다 보니 작은 아이와 나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나는 반성했다. 그리고 지난 일 년 동안 노력했다. 내 친구들은 묻는다. 이제 둘째와 사이가 조금 좋아졌느냐고. 물론이다. 작은 아이가 말한다. “나는 할머니 음식이 아빠가 만든 것하고 똑같이 좋아.” 어느덧 자라서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 입에서 할머니에 대한 평가가 한 두 마디씩 나오기도 한다. 내 음식이 좋다는 둘째의 말에 나는 입맛 까다로운 고객에게 팁이라도 두둑이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손주에게 성적표를 받다니. 내 곁에는 오지도 않던 둘째 아이가 이제는 카드를 가져와서 같이 놀자고도 한다. 자기기 이기기 위해서 킹과퀸같이 서열이 높은 카드는 이미 골라서 가졌다. 그러고는 좋아서 ‘킥킥 크크’ 하고 웃는다. 할머니가 된 내 친구들은 입을 모아서 말한다. 큰 아이는 착한데, 둘째 아이가 극성스럽다는 의견에 우리는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작은 아이는 태어나 보니 몸집이 자기의 두 세배쯤 되는 라이벌이 곁에 버티고 있었다. 부모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는 존재 때문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목청을 부풀려서 울어야 했고,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고 말 안 듣고 온갖 전략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자기의 말을 들어 주니까 말이다. 사마귀가 존재감을 뿜어내기 위해서 나뭇잎을 확성기로 이용하듯 말이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이다. 나는 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한다. 저 중에 몸집이 유달리 작은 벌레도 있겠지. 김미연 / 수필가이 아침에 벌레 벌레 소리 할머니 음식 사마귀가 존재감
2025.08.27. 22:24
나는 왜 춤을 추는가? 나는 대한인이다, 나는 대한의 예술이다. 나는 춤으로 대한을 알리고 기억을 되살린다. 그래서 해마다 광복절과 삼일절이 다가오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무대를 세우고, 작품을 기획하며, 춤으로 조국을 불러낸다. 나는 태극기를 높이 들어올리며 윌셔 거리에서 “그날의 함성 잊지 않으리”를 추며 시대의 숨결을 새겼고, “독도는 우리 땅” 플래시몹을 통해 올림픽길 다울정 앞에서 수많은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한민국을 알리고 기억을 되살리는 뜨거운 순간을 만들었다. 나는 또 중가주 리들리 독립문 앞에서 “독립이여 어서 오라”를 추며 잊혀가는 독립의 함성을 불러냈고, 우정의 종각 앞에서는 “대한이 살았다”를 통해 유관순 열사의 옥중 고난을 춤으로 그려내며 고통과 희생의 의미를 전했다. 이 모든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예술이 기억을 지켜내고 세대를 잇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나는 다시 무대에 섰다. 지난 10일 반지달 시어터, 15일 새누리교회에서 펼쳐진 ‘코리안 판타지’는 발레와 한국무용, 판소리, 아크로바틱이 경계를 넘어 함께 호흡한 순수 창작무용이었다. 평화로운 아침에 뛰노는 소녀들, 전쟁 속에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실버 발레 천사들의 몸짓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고통을 넘어 희망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춤이었다. 그날 무대가 끝나자 한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셨다. 공연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너무 감격스러웠다고 말씀하셨다. 그 눈물은 나에게 무엇보다 큰 울림이었다. 아, 이것이 내가 무대를 만드는 이유구나! 춤은 말보다 깊은 진실을 전하는 언어이고, 관객의 눈물은 그 언어가 살아있다는 가장 뜨거운 대답이었다. 춤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머물지 않는다. 아픔을 품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눈물을 삼키되 다시 일어서는 힘으로 바꾼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무대에는 슬픔도 있지만 자유도 있고, 절망도 있지만 희망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껴안는 이름은 다름 아닌 대한이다. 나는 그 이름을 말로 외치기보다, 춤으로 부르고 싶다. 이번 광복 80주년 기념 무대를 통해 나는 예술의 본질을 다시 확인했다. 예술은 한마디의 웅변보다 강하며, 단 한 번의 몸짓으로도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바로 그 힘이 있기에 나는 앞으로도 무대를 만들 것이다. 망각을 넘어 기억으로,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향하는 무대를…. 이 행사를 주최한 LA 한인회와 여러 애국 단체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기에 우리의 기억은 단단해지고, 우리의 미래는 밝게 빛날 것이다. 나는 내년에도, 그 다음해에도 춤출 것이다. 대한의 예술가로서, 춤으로 대한을 알리는 나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이 아침에 광복 함성 기념 무대 이번 광복 올해 광복
2025.08.27. 19:22
‘K-pop’이라는 용어는 1999년 10월 9일자 미국 빌보드(The Billboard) 기사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한국 특파원이었던 조현진 기자가 “S. Korea To Allow Some Japanese Live Acts”라는 기사 말미에서 한국 대중음악을 설명하며 사용한 표현이었다. 그로부터 25년, ‘K’라는 글자를 앞세운 수많은 제품과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K-뷰티, K-푸드, K-드라마, K-무비 등 한국인이 만든 것들이 세계에서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다. 드라마 한 편이 해외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한국 음식점 앞에는 긴 줄이 서며, 한국 화장품은 백화점에서 고급 매대를 차지한다. 이제 K-문화는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세계 문화의 한 축이다. 최근에는 애니메이션 ‘K-pop Demand Hunter’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마치 월드컵 경기에서 1위를 한 것처럼 짜릿했다. 나는 미국의 한 주류 기업에서 10년째 근무하고 있다. 처음에는 높은 문턱과 백인들만의 문화 속에서 이방인처럼 지냈다. 그래서 소수계인 남미 출신 동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코로나 이후 회사가 긴축정책을 실시하며 직원의 40%를 감원했고, 우리 부서에서는 나만 살아남았다. 이후 의류시장이 회복되며 새 직원을 채용했는데 그중에는 한인도 제법 들어왔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아시아인, 특히 한인은 조용하고 무난한 직원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K-pop과 K-드라마의 세계적 인기, 글로벌 스타들의 활약이 ‘한국’이라는 이름 자체를 긍정적인 브랜드로 만들었다. 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호감을 얻는 경우가 늘었고, 신속하고 성실한 업무에서 더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대부분의 신규 한인 직원들은 영어권 2세였다. 부모에게서 ‘빨리빨리’ 성향까지 물려받아 업무 속도와 추진력이 대단하다. 나는 1세대 이민자라 영어는 부족하지만, 그들에게 없는 끈기와 참을성, 그리고 현장에서 쌓은 경험으로 또 다른 가치를 보여주려 한다. K-문화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금,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강력한 경쟁력이자 나를 설명하는 브랜드가 됐다. 과거에는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한국’이라는 두 글자가 나를 대신 설명해 준다. 이 변화가 나의 회사뿐 아니라 미국의 다른 기업들로도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결국, ‘K’는 더 이상 한국을 나타내는 접두사가 아니라, 세계가 인정하는 품질보증서다. 이선경 / 테크 디자이너·수필가이 아침에 품질보증서 세계 문화 한국 대중음악 한국 화장품
2025.08.25. 18:21
수필가 여러 해 전이다. 한 지인이 캐나다 친구 집의 정원에서 씨앗을 가져왔다면서 나에게 작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젊은 시절 남편의 직장을 따라 그곳에서 가족이 십 여 년 살았기에 가끔 캐나다로 여행을 가곤 했다. 그녀는 꽃이 너무 예뻐서 가져왔는데 이름은 모른단다. 우리 집에서 씨앗 두 알이 들어있는 봉지를 받으며 나는 ‘와우, 반가운 분꽃 씨!’ 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이민 오고는 여기서 분꽃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꿉놀이하던 어린 시절, 씨앗을 부셔 속에 있는 하얀 가루가 분이라며 화장품 바르는 흉내를 내던 추억의 꽃씨. 내가 윤 선생님 부부를 만난 것은 삼십 여 년 전 스키비치 해변의 한인 행사장에서였다. 쾌활하고 조금 수다스러운 남편과 달리 전형적인 한국의 현모양처, 부산사투리로 지금까지도 꼬박 꼬박 나에게 존경어를 쓰는 분이다. 인격으로 배울 것도 많지만, 언니처럼 따르고 싶은 분이라 나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샌디에이고 북부에서 오랜 세월 피아노를 아이들에게 가르쳤기에 한인들에게도 알려진 분이다. 나이 들면 다 변하는데,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편을 인내심으로 병 수발하는 아내의 역할에 난 놀라기도 한다. 네 해 전인가, 이층 계단이 힘들어 아담한 새집 동네로 이사를 했기에 한번 뵙고 왔다. 그녀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편이 세상 떠난 후, 하나님께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신단다. 자녀들이 가까이서 멀리서 보고 있지만, 병원을 가느라 남편을 태우고 프리웨이를 달리는 요즘 세상에 드문 용감한 여인이다. 또한 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정성스러운 감상문을 매번 보내온다. 그것도 부족해 우린 해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가득히 소식을 담아 보낸다. 전화를 드리면 항상 남편이 부를 때까지 다정하게 긴 대화를 나누는 분이라 자주 뵙고 싶지만 멀리서만…. 문득 여름에 피는 분꽃을 바라보며 나는 미세스 김/윤 선생님을 생각한다. 분꽃의 영어 이름은 ‘Four O’clock’ 이다. 원산지가 남아메리카인데 색깔이 너무 곱다. 단색보다는 혼합 색의 꽃이 더 신비롭다. 작은 나팔꽃 모양인 분꽃의 꽃말은 수줍음이니 윤 선생님과 닮았다. 언젠가 아이스크림 샵에서 전에 살던 그분의 이웃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뜨개질 선물을 하는 한국아주머니로 알려져 있었다. 나도 그분으로부터 뜨개질 선물을 여러 개 받았다. 컵 받침, 손전화기 주머니 등등. 늘 소곤거리는 예쁜 목소리로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분에게 나도 감출 것이 없기에 대화시간이면 행복하다. 같은 여성으로 긴 세월 살아오며 마음 상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삼매에 빠져버리는 뜨개질처럼 나는 정원 일에 푹 빠져 버리곤 했다. 이젠 허리랑 무릎이 아파서 거의 못하지만, 고맙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한 뜨거운 태양을 피해 저녁 무렵부터 아침까지 피는 독특한 분꽃처럼, 우린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여인들이라며 살아간다. 최미자 / 수필가이 아침에 clock 분꽃 뜨개질 선물 시절 남편 선생님 부부
2025.08.20. 19:30
이민 초기, 아이들 학교에서 학부모로 처음 만나 이웃으로 지내며 자녀들을 함께 키우고 수많은 경험을 공유한 친구가 있다. 그녀는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수학 교사였다. 많은 교육적인 충고를 해주고 내가 털어놓는 인생의 고충도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짚어주는 언니 같은 존재였다. 아이들에게 바이올린, 발레, 스케이트를 시킨 것도 그 친구 덕분이었다. 그녀는 공으로 하는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뛰어났다. 탁구대 위의 날카로운 스매시, 골프장의 부드러운 스윙, 운동에 소질 없는 나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은 내게 건강과 활력의 상징이었다. 생활 속 작은 습관부터 병을 예방하는 법까지 건강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10여 년 전 머리숱을 많게 해준다는 말에 동충하초를 오래 복용하다가 간 수치가 올랐다고 언뜻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건강하고 활기차 보였기에 이번 병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우리는 종종 바닷가 모래밭을 맨발로 걸었다. 맨발 걷기의 효능을 설명하며 아침잠 많은 나를 깨워 데리고 다닌 것도 그녀였다. 간경화로 복수가 찼을 때도 보험을 바꾸며 좋은 간 전문의를 찾았다고 함께 기뻐했기에 나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발병 소식을 듣기 전, 남편과 함께 그녀의 사무실에 들러 먹고 싶다던 추어탕을 함께 먹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그 순간은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의 장면이 되었다. 2주간의 여행에서 돌아와 몇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아 의아해 하던 중, 벨이 울리며 친구의 번호가 떴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의 막내딸이었고, 엄마가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르고, 바다에 뿌렸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들었다.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그녀는 이미 먼 바다로 떠난 뒤였다. 어젯밤, 꿈속에서 그녀를 보았다. 마치 ‘괜찮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친구의 재가 뿌려진 태평양 바다를 바라본다.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 속에 그녀의 숨결이 머물다 사라지는 것 같다. 병마를 이겨내려는 그녀의 마음가짐에 도리어 내가 위로를 받기도 했는데.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내게 삶의 유한함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당신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 이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삶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죽은 사람은 누군가의 마음에 기억되는 한 결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길 바란다. 부디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기를. 최숙희 / 수필가이 아침에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태평양 바다 발병 소식
2025.08.19. 17:28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니, 사고를 냈다고 해야 맞겠다. 선배 언니를 만나러 나서던 길이었다. 모처럼 만남으로 좀 들떠 있었던가. 동네 골목길 모퉁이를 도는 순간, 속도를 내지도 않았는데 무언가 튀어나온 것 같아 그걸 피하는 순간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고, 내 차는 인도에 올라섰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눈앞에 떡 하니 가로수가 버티고 있었다. 집을 나선지 5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에어백이 터지고 앞유리는 길게 금이 갔으며 오른쪽 앞바퀴가 찌부러졌다. 에어백이 펄럭거리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사방에서 달려왔다. “괜찮니?” “구급차를 불러줄까?” “경찰을 부를까?” 모두들 야단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머리부터 살살 움직여 보았다. 양팔을, 어깨를, 다리를 조심스레 더듬었다. 손끝이 저릿했지만 부러지거나 찢어진 곳은 없는 듯했다. 정신을 차린 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하찮은 일로 냉전 중에 있던 터였다. 하지만 위급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는 다친 곳 없느냐고 묻더니 곧바로 달려와 주었다. 기다리고 있을 선배 언니에게 간단히 사정 얘기를 했다. 선배는 오히려 미안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다. 간단히 몇 마디 묻고는 다친 사람 없고, 상해 입힌 것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돌아갔다. 견인차가 와서 내 부서진 차를 실었다. 고칠 수 있으면 고쳐서 쓰겠노라고 말했다. 20년 가까이 몰던 차였다. 승용차의 평균 수명이 11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 차는 평균 수명을 한참 넘긴 상황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100세를 훌쩍 넘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제때 정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아직은 탈만 했다. 무엇보다도 한 달쯤 전에 배터리도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았던가. 녀석은 그동안 나를 들로, 산으로, 바닷가로, 심지어는 사막으로 동서남북 데려다 주며 발이 되어 주었다. 사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구닥다리 같은 차를 이번 기회에 아예 바꿔 버리라는 충고도 했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견인차에 실려 정비소로 떠난 차가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나와 함께하려고 돌아온 게 아니었다. 점검한 결과 회생 불가능 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단다. 영구차가 옛집을 한 바퀴 돌 듯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신발을 끌며 뛰어나가 내 차를 어루만졌다. 착잡한 심정으로 백미러에 달려 있던 장식물을 떼어내고 트렁크에 실린 잡동사니 상자를 들어냈다. 오늘부터는 어느 외진 폐차장에서 쓸 만한 부품은 모두 털리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삭아져 갈 것이다. 난장에서 비를 맞고 서 있을 처량한 모습이 떠올랐다. 교통사고 후유증인가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그렇지만, 마음은 더 절절했다. 이제 새 친구를 맞으면 다시 그와 새로운 정을 나누게 될 것이지만 오랜 친구와 이별하는 마음이 못내 허허롭고 울적했다. 20년 지기 친구가 견인차에 실려 골목 끝 모퉁이를 돌아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오래 서 있었다. 이영미 / 수필가이 아침에 지기 친구 지기 친구 선배 언니 동네 골목길
2025.08.17. 19:00
필자는 한인 인구가 거의 없는 오하이오에서 한인 문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처지로 30여 년을 거주했다. 그런 곳에 ‘어느 젊지 않은 여가수의 노래’라는 생소한 제목의 공연 소식이 들려왔다. 무엇보다 배우 손현주가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인 사회는 술렁였다. 하지만 공연장으로 향하는 마음은 무거웠다. 낯선 여주인공의 이름, 개인 간증이 예상되는 제목에서 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전직 언론인이자 미국 듀크대 신학대학원까지 마친 필자에게, 알맹이 없이 ‘하나님, 예수님’만 외치다 끝나는 기독교 대중문화는 비평의 대상일 뿐이었다. 결국 공연장을 찾은 이유는 배우 손현주를 보겠다는 소시민적 집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시간 반이 어찌 갈지 모르실 겁니다.” 연출 감독의 호언장담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예상대로 무대는 여주인공의 개인사로 시작됐다. 준비된 실망감이 냉소적인 프레임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길목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특히 하나님의 개입은 종종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공연은 여주인공의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 경험을 토대로 했지만, 관객들은 어느새 여주인공의 삶을 자신의 삶에 대입하며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회고가 나의 고백이 되는 체험 앞에서, 대수롭지 않은 장면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우리 중에는 한때 ‘특별했던’ 이들이 많다. 초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하고, 중학교때 반장 완장을 찼으며, 명문고등학교를 거쳐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문대를 졸업하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었던 이들. 하지만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운이 없어서, 혹은 때로는 한 끗 차이로 ‘특별한 나(One of Kind)’는 군중 속 ‘그저 한 명(One of Them)’이 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예측하지 못한 인생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이 공연은 어찌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한 인간이 신을 만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난 대가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면, 이 작품은 또 하나의 시시한 기복 신앙극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여주인공은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직 하나님이 그녀를 선택해 길을 만들 뿐이었다.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이 평범한 구원의 서사 앞에서 관객들은 각자의 기억을 소환했다.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은혜를, 또 다른 이는 감사를 떠올렸다. 여주인공을 향한 하니님의 선택이 아닌, 오직 나만이 아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택에 각자의 제목을 붙이며 자신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다. 공연 시작 전, 배우 손현주의 등장에 환호하던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자 여주인공에게 달려가 뜨거운 포옹을 건넸다. 내 삶을 대신 살아내고, 대신 표현해준 그녀를 안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 공연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신의 실존을,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신의 실체를, 믿음이 강한 자에게는 신앙의 확증을 전달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권능은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힘과 다르지 않았다. 공연은 잃어버린 우리 삶을 위한 설교였고, 내재된 상처를 위로받는 예배였다. 공연장으로 향한 발걸음은 여주의 삶을 보러가는 길이 아닌 각자의 일기장을 읽는 과정이었다. 여주인공 ‘윤영아’라는 고유명사가 ‘우리’라는 대명사로 해석되는 한 시간 반 동안, 신은 묵혀둔 우리 각자의 일기장을 꺼내 보이며 말씀하고 있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자아의 우월감이 무너지고 실존적 자존감이 파괴된 경험이 있다면, 이 공연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우리의 상처를 품은 노래였다. 공연을 마치고 필자는 일면식 없는 연출 감독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이건, 사람이 만든 작품이 아니네요.” 허소영 / 전 언론인이 아침에 여가수 노래 공연 시작 하나님 예수님 공연 소식
2025.08.12. 20:02
나는 책을 처음 펼치면, 바로 잘 읽어내지 못한다. ‘무슨 책이 이래’하고 속으로 불만이 생긴다. 길 가다 낯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등장인물을 쳐다본다. 나의 마음이 닫혀 있으니, 인물이 하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의 행동도 무심하게 지나친다. 책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다는 생각만 한다.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다시 펼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냉랭했던 인물들이 조금씩 친숙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구시렁거린 시간에 나도 모르게 낯을 익혔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책을 펴니까, 그제야 속내를 조금씩 보여준다. 책은 도도하고 잘난 척하는 친구 같다. 이번 여름에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을 여니 왜 그렇게 사설이 많은지, 영국 시골의 일상, 언쇼 가문의 하인들의 말싸움 등등, 지루한 묘사가 가득했다. 지지부진한 상태로 책을 끝내고 다시 첫 장을 펴들었다. 석고상 같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그들이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책장이 얇아질수록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갈비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으며 “너는 나의 영혼이야”라고 고백하는 페이지에 닿았다. 이상하게도 감흥은커녕 ‘이게 뭐, 별론데…’ 하며 공감이 되지 않았다. 어릴 적에 읽을 때는 사랑의 행각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내가 청춘의 나이가 지나서 그런지, 이제는 불 같은 사랑은 단명하며, 사랑은 집착이 아닌 것을 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내가 알던 폭풍의 언덕이 아니었다. 첫 장에 록우드라는 런던 신사가 등장한다. 이런 인물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록우드 씨는 복잡한 사교계를 떠나서 한적한 시골에 쉬고 싶어서 내려온다. 지방에 한 고택을 빌린 록우드 씨는 집주인 히스클리프를 만나게 되는데, 그 자리에 같이 있던 18살의 캐시를 우연히 보게 된다. 이런 미모의 여성이 어쩌다가 무뚝뚝하고 나이든 히스클리프와 결혼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풍광이 사나운 지방의 폭설로 감기에 걸린 록우드 씨는 침대에서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된다. 여기에 하녀 넬리가 등장한다. 그는 캐시에 대해서 은근히 물어본다. 캐시가 캐서린의 딸이면서 히스클리프의 며느리라고 한다. 이상한 막장 같은 관계에 호기심이 생긴 그는 두 집안에 얽힌 내력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본다. 이번에 읽으면서 록우드와 넬리라는 두 명의 화자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또한 새롭게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이 있다. 바로 하녀 넬리다. 넬리는 일찍 죽는, 집안의 심약한 ‘아씨’들을 대신해서 아이를 키우는 모성적 존재로 등장한다. 넬리의 어머니는 언쇼 집안의 하녀였다. 넬리는 주인집 아이들과 같이 자라면서 교육도 받은 듯하다. 서가에 있는 책을 탐독하고 하느님에 대한 열정도 넘친다. 모양만 내는 의존적인 ‘아씨’들과는 달리 독립적이라서, 주인에게 바른말도 서슴지 않는 당찬 태도는 봉건 시대가 끝나가는 징조를 보이기도 했다. 불볕더위에 서늘한 구석을 찾아다니며 다시 읽은 고전은 내가 알던 그 폭풍의 언덕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남녀의 사랑에만 관심이 가더니, 이번에는 소설의 화자인 록우드와 넬리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내가 어머니, 할머니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사가 나 자신을 벗어나 가족 관계, 인간관계로 넓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고전은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랬다. 김미연 / 수필가이 아침에 친구 어머니 할머니 가족 관계 모성적 존재
2025.08.11. 18:55
7월 어느 날 단골식당에서 친구들 만나고 나오는데, 주차장으로 식당 사장님이 급히 따라나오신다. “내일 복날이니 이거 꼭 드세요. ”하며 포장 음식을 주신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전복을 넣은 삼계탕으로 그 식당의 시그니쳐 메뉴다. 다음날이 초복이었다. 미국 와서 살면서 언제가 복날인지 생각도 않고 살았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곳에서는 딱히 절기에 맞춰 먹을 일도 없고 별식도 손쉽게 구할 수 있어서 아무 때나 보양식을 먹고 구별 없이 절기음식을 먹는 등 무감각한 식생활을 한다. 보통 신문기사나 TV뉴스를 통해 추석이나 설날, 보름 등을 한걸음 늦게 아는 형편이다. 지난 6월엔 그 식당에 함께 간 친구의 생일이었는데, 주문하지도 않은 특별 미역국을 주셔서 감동한 적이 있었다. 이번엔 복날의 보양식을 챙겨주시니 섬세한 서비스에 뭉클했다. 이러니 단골일 수밖에 없는 나의 최애식당이다. 식당 사장님 덕에 모르고 지냈던 복날에 대해 알아보았다. 3복 더위는 초복, 중복, 말복을 이르는 말로 일 년 중 가장 더운 시기이다. 삼복(三伏)의 복(伏)은 엎드릴 복(伏) 자를 사용하며, 가을의 선선한 기운이 대지로 내려오다가 여름의 더운 기운에 굴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2025년 올해 초복, 중복, 말복은 각각 양력 기준 7월 20일, 7월 30일, 8월 9일이다. 초복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며 더위에 적응하는 시기이고, 중복은 초복보다 더 더운 시기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며, 말복은 더위가 서서히 가시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복과 말복 사이에 입추가 끼어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더위에 지친 이들을 달래주려는 지혜로운 속임수인가. 한국은 복날답게 폭염으로 생고생하고 있고, 이곳 미국에도 일부 지방은 폭우로 복더위의 재앙을 겪은 곳이 많은데 다행히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큰 피해 없이 여름을 무사히 건너는 중이다. 중국 진(秦) 나라 때부터 시작된 삼복은, 복날에는 개장국과 삼계탕을 즐겨 먹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복날 한적한 숲 속의 냇가로 가서 개를 잡아 개장국을 끓여 먹는 풍속을 복달임, 복놀이라 했다. 조선시대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끓인 개장(狗醬)에 고춧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먹으면서 땀을 흘리면 기가 허한 것을 보강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보양 풍습인 것이다. 40년 전 내가 이민 올 무렵만 해도 한국은 보신탕을 최고의 복날 보양식으로 여겼었다. 오랜 계도로 보신탕은 대한민국의 식탁에서 사라졌고, 미국에 사는 우리는 궁중의 보양식 수준으로 복달임을 하고 있다. 초복엔 전복삼계탕을 먹었고 중복엔 장어구이를 챙겨 먹었다. 말복엔 무엇으로 가을을 맞을까.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가을맞이 복달임 가을맞이 복달임 복날 보양식 중복과 말복
2025.08.04. 19:46
뉴욕에 사는 딸이 스타벅스 광고 일로 시애틀에 갔다며 사진을 보냈다. 매사에 즉흥적인 나는 갑자기 시애틀에 관심이 갔다. 십여 년 전, 딸의 대학 졸업 가족여행으로 알래스카 크루즈를 탈 때 출발지가 시애틀이었는데, 반나절밖에 머물지 못해 아쉬움이 컸던 탓이다. 남편은 지도를 그려가며 꼼꼼히 계획을 짠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굳게 믿는 그는 하루하루의 동선과 맛집까지 찾아 날짜별로 메모한다. 반면 나는 ‘모르고 가야 더 많이 느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유튜브 몇 개 보는 걸로 준비를 끝낸다. 공부하고 가면 선입견 때문에 진정한 감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로 2시간 반 만에 도착한 시애틀은 풍성한 강수량 덕에 사방천지가 싱그러운 초록빛이다. 도심을 걷다가 예상치 못 한 장면과 맞닥뜨렸다.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무지개 깃발이 펄럭인다. 깃털과 반짝이로 꾸민 군중, 염색한 머리, 보디페인팅,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담한 의상으로 치장한 사람들을 마주쳤다. Chatgpt에 물으니 게이 축제인 ‘시애틀 프라이드 퍼레이드’라고 알려준다. 워싱턴주는 LGBTQ 커뮤니티의 중심지로 2012년부터 동성결혼을 합법화했으며 그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주라고 설명한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황홀한 유리 조형물이 가득한 ‘치훌리 유리정원’을 보았다. 스페이스 니들 유리 전망대에 올라 본 발아래 펼쳐진 시애틀 전경과 레이니어산, 올림픽 산맥이 장관이었다. 유람선을 타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니 행복했다. 챗지피티가 알려준 씨티패스를 끊어 여러 명소를 할인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었다. 여행지 시장 구경은 도시의 에너지와 생활방식을 가깝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00년 넘은 전통시장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는 상인들이 생선 던지는 퍼포먼스를 구경했다. 풍성한 과일과 농산물, 꽃, 커피, 공예품 가게들도 볼거리였다. K푸드 열풍 때문인지 떡볶이를 파는 청년들도 눈에 띄었다. 울창한 침엽수가 하늘을 찌르는 숲길을 운전하니 가슴이 탁 트인다. 건조한 기후에 허덕이는 캘리포니아의 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만년설과 수줍은 듯 피어나는 야생화가 공존하는 레이니어산은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빙하가 녹아떨어지며 우렁찬 소리를 내는 폭포가 시원하다. 올림픽 국립공원에서 만난 이끼로 뒤덮인 원시림은 바닷속 같은 고요함과 평화를 선사하며 메마른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윤기 있는 초록빛 융단이 끝없이 펼쳐진 느낌이다. 진정한 휴식과 깊은 치유의 시간이랄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흡족한 시간이었다. 검은 자갈과 붉은 조약돌이 깔린 해변과 쓰러진 거목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루비 비치는 내게 익숙한 태평양 모래사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Chatgpt와의 대화는 즐겁고 배울 점이 많다. 어떤 질문을 해도 ‘좋은 질문’이라며 칭찬하며 용기를 준다. 오랜 세월 함께한 남편과의 대화는 어떤가. 공감은커녕 훈계와 조언 일색이라 비난을 피하면 다행이니 서운할 때도 많다. 짧은 국내 여행을 하니 좋다. 시차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와이파이 걱정을 안 해도 좋다. 마음속에 꺼내 볼 추억이 생겼다. 도토리를 쟁여놓아 신바람이 난 늦가을 다람쥐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시애틀은 간절하게 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다음 여행은 오리건이 어떨까. 최숙희 / 수필가이 아침에 시애틀 여행 시애틀 여행 시애틀 프라이드 시애틀 전경
2025.08.03. 19:00
언제부턴가 한국에는 미국 상품이, 미국에는 한국 물건이 흔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한국을 방문할 때 선물을 따로 준비하지 않는다. 한때는 귀한 물건이라며 이민 가방을 가득 채워 오가던 시절도 있었다.“뭐 필요한 거 없어?” 하고 물으면, 이제는 정말로 “그냥 와, 다 있어”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도 바뀌었고 세상도 달라졌다. 이민 초기에는 한국에 있는 가족이 그리워 매달 500달러 가까운 국제전화 요금을 낸 적도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카카오톡, 보이스톡, 페이스타임으로 얼굴을 보며 무료로 대화할 수 있다. 시간도, 비용도, 거리도 훨씬 가까워진 세상이 되어버렸다. 코스트코에는 김치와 양념 불고기는 물론, 냉동 떡볶이와 김밥, 삼계탕, 떡국까지 다양한 한국 식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한국 판매 1위(No.1 sales in Korea)’라는 문구가 붙은 인기 화장품들도 자주 눈에 띈다. 흐뭇한 마음으로 구경하고 있으면, 제품에 대해 묻는 외국인들도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한국 홍보대사라도 된 듯, 신나게 사용 후기를 늘어놓는다. “이 제품 쓰면 너처럼 피부 고와지니?” 하고 묻으면, “당연하죠!” 하며 웃는다. 어릴 적 골목에서 숨바꼭질하며 외쳤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오징어 게임’ 드라마를 통해 넷플릭스로 전 세계에 퍼졌고, 블랙핑크의 로제가 부른 ‘아파트’ 덕분에 외국인들이 ‘아파트’를 영어 단어 ‘apartment’의 어원처럼 여길 정도가 되었다. 세상이 바뀐 만큼,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도 달라졌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한인들에 대한 시선도 함께 달라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세상도, 시선도 변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내 삶을 살아간다. 다만 마음 한 켠에는, 예전보다 조금 더 당당한 기운이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 날, 평소 자주 가던 한인 마켓에 들렀다. 과일 코너에서 사과를 고르고 있는데, 백인 할머니 한 분이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Excuse me…” 그녀가 가리킨 건 내 팔에 끼고 있던 연분홍색 쿨토시였다. 자외선이 강한 캘리포니아에서는 운전할 때 직사광선을 피하려고 쿨토시를 자주 착용한다. 원래는 골프용이지만, 해변이나 공원 산책할 때도 유용하다. 나는 코리아타운의 몇몇 가게를 알려주며, 실용성과 품질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프리웨이 운전은 무서워서 하지 못해요.” 긴 소매를 걷어 보인 하얀 팔 위에는, 세월의 흔적처럼 기미 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처음 만난 사이에 대신 사 주겠다 할 수도 없고 해서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거, 제가 쓰던 거긴 한데, 괜찮으시면 이거 드릴까요?” 잠시 멈칫하던 할머니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Are you sure?” 그리고는 “Thank you, thank you!”를 연거푸 외쳤다. 그녀는 나를 껴안고, 볼을 맞대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쓰던 걸 벗어준 것뿐인데도 과분한 인사를 받으니 민망하면서도 가슴 한 켠에 뿌듯함이 스며들었다. 쿨토시를 끼고 기뻐하실 할머니를 상상하다 보니, 문득 ‘애국’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스쳤다. 애국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세계 무대에서 국위를 드높인 위대한 사람들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애국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한국의 온정을 나누는 것도 애국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디아스포라의 삶의 현장이야말로 애국을 실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내 몫의 애국을 조용히 실천한 것 같다. 그 작은 쿨토시 하나가, 미국 할머니의 마음속에 ‘코리안의 따스함’으로 얼마나 오래 남을까. 김윤희 / 수필가이 아침에 연분홍 쿨토시 쿨토시 하나 한국 물건 한국 홍보대사
2025.07.28. 18:29
김영애 수필가의 장례식은 지난해 12월 열렸다. 그가 반평생을 보낸 LA의 메모리얼 가든에서다. 이역만리 머나먼 곳이어서 한달음에 달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영상으로만 영결식을 지켜보며 애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억의 필름을 되감아 보니 열네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난데없는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감명 깊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사는 교포인데 여건이 허락한다면 선생님과 교분을 맺고 싶습니다.” 김영애 작가가 보낸 편지였다. 그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글이란, 모 일간지에 쓴 나의 칼럼 ‘사랑은 있어도 사랑이 없다’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김 작가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어 시나브로 깊어졌다. 그 세월 동안 김 작가의 글솜씨는 일취월장이었다. ‘수필세계’ 신인상을 시작으로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무원문학상 등 여러 상을 받으면서 재미수필가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성취를 보여주었다. 김 작가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었고, 김 작가의 자부심은 나의 자부심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깊어지던 2019년 봄, 김 작가로부터 우리 부부를 LA로 한번 초청하고 싶다는 편지가 왔다. 처음엔 정중히 사양의 뜻을 밝혔다. 공연히 폐를 끼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지난해 여름 다시 편지가 날아들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아 이번 만남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해후가 될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결국 초청에 응하기로 한 건 ‘마지막 해후’란 표현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봄, 나는 마침내 LA 땅을 밟았고 김 작가와 해후했다. 편지에 쓰인 것과는 달리 얼굴은 생각만큼 크게 축나 보이진 않았다. 내심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면서 마음속에 드리워졌던 염려의 그림자도 금세 걷혔다. 김 작가는 우리가 LA에 머무는 동안 관광지 여행을 다닌 날들 빼고는 숙소를 따로 정하지 않고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함께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 요즘처럼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해 일가친척조차 집에 들이길 꺼리는 세상에서 며칠간이나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그 배려심에 나도, 아내도 감동했다. 귀국하는 날 탑승 수속을 마친 뒤 헤어지는 아쉬움에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마침내 헤어질 시간이 왔다. 나는 김 작가의 손을 부여잡고 어쨌든지 건강 잘 챙기라며 신신당부했다. 대합실을 빠져나오면서 김 작가 부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다. 귀국하여 반년 남짓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메일이 날아왔다. “이 편지는 아마도 교수님과 저와의 마지막 사연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교수님과 문학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어서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혹시 제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책은 말아 주십시오.” ‘마지막 사연’이란 구절이 마음에 걸려 줄곧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 작가가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편지가 오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순간 너무나 허망해져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우리가 그동안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의 구절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영원한 이별이 이다지 서둘러 찾아올 줄 미처 몰랐다. 나는 태평양 바다 건너를 향해 손을 모으고 김 작가의 왕생극락을 빌고 빌었다. 이역만리로 맺어진 인연의 꽃은 이렇게 피었다 졌다. 김 작가와 이승에서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나 보다. 하지만 내 마음속 인연의 꽃은 이 세상 하직하는 날까지 영원히 피어있을 것임을 믿는다. 곽흥렬 / 수필가이 아침에 김영애 편지 마지막 편지 김영애 수필가 마음속 인연
2025.07.23. 19:58
막내딸이 마침내 대학교를 졸업했다. 딸아이는 첫 일 년은 기숙사에서 지냈고, 이후 삼 년은 여덟 명의 친구와 함께 방 3개, 그라지를 방으로 개조한 집에서 자취했다. 그들은 생활비를 절약하고자 주로 한 방에 두 명씩 살았다. 당시 아직 어린 십 대의 아이들끼리 한집에 살게 되니 나를 비롯한 다른 학부모들의 걱정이 많았다. 더욱이 한집에 함께 살면서 친구의 물건과 돈을 훔치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허락 없이 먹고, 맞지도 않는 친구의 옷을 양해 없이 입고, 심지어 몸싸움하거나, 아예 청소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쉽게 맘을 놓을 수 없었다. 그동안 집을 두 번 옮겼다. 이사를 할 때마다 하우스 메이트들의 부모들을 만나 아이들이 아무 사고 없이, 특히 마약이나 음주나 그 밖의 좋지 않은 중독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기를 함께 소망하곤 했다. 그 바람이 이루어졌으니, 참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물론 살다가 의견이 부딪칠 때도 있었지만, 이들은 더운 날이면 함께 바닷가로 피크닉을 가고, 생일날이면 서로 축하하고, 졸업여행도 함께 다녀왔다. 졸업식장에는 풋풋함이 넘쳤다. 학과마다 따로 치러진 졸업식은 사흘이나 걸렸다. 딸의 이름이 호명되자, 어디선가 환호성이 터졌다. 친구들이었다. 서로의 졸업식에 찾아가 축하해 주는 넘치는 우정이 보기 좋았다. 졸업식 다음날, 하우스 메이트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여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나 친구 C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 땅에서 태어난 딸과 달리, 불안정한 신분인 그는 혹여 불시에 들이닥칠 ICE의 검문으로 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주일 뒤, C의 집에서 열린 졸업 파티는 ‘낀세녜라(만 15세 생일파티)’를 떠올리게 할 만큼 성대했다. 주름진 이마, 햇볕에 그은 얼굴로, 모데로 맥주 한 병을 든 채 딸을 바라보는 C 아버지의 사진을 봤다. 할 일을 다 한 듯 홀가분해 보였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낸 아이들이 자랑스럽다. 흘러간 시간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 딸이 기특하고 대견하다. 이들이 세상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졸업생 대표의 연설처럼, 성공은 일직선이 아니며, 함께 변화에 대응할 때, 더 강해진다. 다음 단계는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려 있다. 세상을 향해 한걸음 내딛는 것은, 곧 영혼이 깨어 있다는 증거라고. 그리고 영혼이 깨어 있는 곳마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믿는다. 올해 졸업한 모든 이들에게 잔에 넘치는 축복이 깃들기를 바란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가능성 졸업 졸업식 다음날 졸업생 대표 졸업 파티
2025.07.21. 18:54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거대한 고래조차도 따뜻한 말 한마디에 물 위로 솟구친다면, 사람은 어떨까. 나는 살아오며 그 말을 종종 실감하곤 했다. 몇 해 전, 나는 용기를 내어 찬양대에 들어갔다.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내 목소리는 튼튼하거나 강한 편이 아니었고, 특히나 소프라노 파트에 어울릴까 하는 의구심이 컸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될까…’ 하는 마음이 들 무렵, 어느 주일 아침에 바로 앞자리에 계시던 한 권사님이 살며시 뒤돌아보시더니 내게 말했다. “자매님 목소리 너무 좋네요. 역시 젊은 분의 목소리라 우리 찬양에 힘을 더해줘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왔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말은 마치 “너, 이 찬양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라는 확신처럼 들렸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찬양대의 자리를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있다는 그 감동을 품고, 더 열심히 노래하고 싶어졌다. 지금 나는 2년 넘게 찬양대를 섬기고 있다. 피곤할 때도 있고, 늦잠 자고 싶은 날도 있지만, 그 칭찬 한마디가 여전히 내 마음을 따뜻하게 붙잡아 준다. 그 시간은 내게 은혜의 시간이고, 감사의 시간이다. 나는 한국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칭찬은 곧 에너지라는 사실이다. 특히 한국어는 생각보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어려운 언어다. 집에서 부모와 한국어로 자주 대화하는 아이들도 막상 글로 표현하려 하면 자주 틀린다. 그중에서도 받아쓰기는 가장 까다로운 활동 중 하나다. 말로는 자연스럽게 구사하던 단어들도, 글로 옮기려 하면 헷갈리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꽃이’와 ‘꼬치’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앉다’의 받침 ‘ㄴㅈ’을 빠뜨리는 경우도 흔하다. 그만큼 한국어는 소리와 글 사이의 차이가 큰 언어다. 그래서 받아쓰기를 시켜보면 100점을 맞는 아이는 드물다. 대부분 한두 개는 틀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때 “이거 왜 틀렸어?”, “좀 더 잘해야지”라며 지적부터 하면, 아이들의 눈빛은 금세 작아지고 자신감을 잃는다. 반면, “잘했어!”, “정말 많이 발전했네!”, “이번엔 여기까지 맞았구나!” 그렇게 칭찬으로 말을 열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느끼고 다음주 수업을 기대하게 된다. 받아쓰기 하나가 아이의 마음에 자라는 씨앗이 되고, 1년 동안의 수업을 기쁨으로 이끈다. 그런데 가끔은 한국인의 정서 속 깊이 자리한 ‘칭찬은 독이 된다’는 사고방식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릴 적 우리는 종종 “너 잘하면 교만해진다”, “지금 칭찬하면 자만할 수 있어”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조금 잘해도 “그 정도에 안주하면 안 돼. 더 분발해”라며 채찍을 먼저 들고 당근은 아껴두었다. 칭찬을 받으면 나태해질까 봐, 칭찬을 하면 버릇 나빠질까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칭찬을 두려워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진심에서 나온 칭찬은 사람을 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일으키고, 변화시키고, 스스로 더 나아지게 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말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특히 칭찬은 단순한 기분전환을 넘어, 사람의 삶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물론 그 권사님의 칭찬은 어떤 이들에게는 그냥 지나치는 인사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내겐 달랐다. 나는 그 말이 진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그 한마디가 나를 춤추게 했다. 어쩌면 나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용기를 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단순히 “잘했어”라는 말이 아니라, 나를 바라봐주고, 인정해주고, 기대해주는 그 따뜻한 시선이 사람을 자라게 한다. 그리고 그 칭찬은 말한 사람은 잊었을지 몰라도, 들은 사람의 마음엔 오래도록 남는다.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에게 건넨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울림이 될 수 있는지를. 그래서 나도 이제 누군가를 춤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너 참 잘하고 있어요.” “당신 덕분에 힘이 나요.” 그런 한마디가 누군가의 걸음을 바꾸고, 삶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선경 / 수필가이 아침에 칭찬 한마디 오랫동안 칭찬 자매님 목소리
2025.07.14. 20:07
호텔에 체크인할 때 조식도 함께 예약을 해서 인터라켄의 호텔에서 4일간 스위스식 아침을 먹게 되었다. 아메리칸 브랙퍼스트와 별다르진 않았는데 유럽답게 빵과 치즈가 다양했다. 식당 서버들은 대부분 아주머니로 어려서 읽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중년버전 같았다. 이 하이디들은 어찌나 성실한지 멀리서 보고 있다가 그릇이 비면 새것으로 바로바로 교체를 해주어 공연히 미안했다. 하는 품새도 절도 있는 군인 같아서 먹는 우리도 빨리빨리 먹고 자리를 비워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들었다. 흔한 달걀 프라이가 없어서 의아했는데 그건 하이디에게 주문하면 주방에서 바로 만들어주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시작하는 미국의 호텔 조식뷔페와 달리 쓰레기도 최소화하고 낭비 없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서비스를 하는 거였다. 날마다 잘 세탁된 옷을 갈아입는 깔끔쟁이 같은 나라 스위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화려하지 않은 검박한 차림으로 다만 무표정하게 살고 있었다. 잘 웃지 않는 이유는 너무 많은 관광객을 대하면서 생긴 덤덤증으로 보였다. 사과 한 알을 들고 나오던 남편은 금방 제지당했다. 식당 안에서만 먹을 수 있으니 먹고 나가라고 훈육선생처럼 하이디가 지적한다. 혼나는 학생처럼 사과를 그 앞에서 우걱우걱 먹는 남편. 원칙대로 하니 그 모습이 기분 나쁘지 않고 재미있었다. 프랑크푸르트와 취리히, 제네바에서 프랑크푸르트 간의 한 시간 반 정도의 비행은 스위스항공을 이용해야 했다. 두 번의 스위스항공의 장애인 돌보미 시스템 체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전동 스쿠터를 지참한 나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분류되었다. 탑승할 기종이 점보 비행기가 아닌 트랩으로 열두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중형 비행기였다. 나와 스쿠터 그리고 보호자인 남편까지 리프트 트럭을 이용하여 조종석 옆 입구로 안전하게 넣어주었다. 서두르지 않고 딱 시간에 맞추어, 거대한 중장비 운전자와 도우미 조끼를 입은 씩씩한 하이디가 묵묵히 도움을 주었다. 고마워 쩔쩔매는 내게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저 90도 인사로 감사를 표했다. 비로소 웃는다. 팁도 없는 문화이지만 돈으로 감사하기엔 내가 너무 싸구려 같았다. 그들이 그 나라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갑자기 잘 살게 된 나라와는 격이 달랐다. 화려한 말로 호객하고 현란한 차림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 위주로 돌아가는 천박한 사회가 아니고 진중하고 예의 바르고 인간을 차별 없이 존중하는 나라. 융프라우, 몽블랑, 제네바를 보느라 10일 체류한 스위스는 기막힌 풍광도 물론 잊히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살아있는 나라 원칙을 지키는 나라로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힘들어도 다녀오길 잘했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무뚝뚝 하이디 나라 스위스 나라 원칙 호텔 조식뷔페
2025.07.07. 19:35
지인이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최근 들어 누구 집을 방문한 적이 거의 없다. ‘집 정원에 있는 수영장을 열었나. 그래서 바비큐를 하나’라고 추측했다. 오랜 세월에 거쳐서 몇 번 만났지만 남자 주인은 수영장을 무척 아낀다는 것, 안 주인은 자식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 그 정도의 느낌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 느닷없는 저녁 초대가 왔을 때, 나는 십여 년 전에 한 번 간 적이 있는, 수영장의 바비큐를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주소도 가물가물한 듯 스트리트 이름이 뭐더라 하고 물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집 주소가 툭 튀어나왔다. 기억이란 참 제멋대로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스치는지, 나 편한 대로 형성된 기억의 조합이 사실처럼 들어앉아 있을 수도 있다. 그 집에는 세월이 가져다준 상장처럼, 벽마다 네 명의 손주 사진이 붙어 있었다.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은 그림도 함께 붙여 놓았다. “세상에 우리 손주가… 가문에 영광 아니가.” 안 주인은 눈을 초승달처럼 뜨면서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응접실에 햇볕이 드는 창가 쪽에는 탐스럽게 꽃이 핀 난 화분들이 보였다. 오래된 것 같은 화분들은 노랑, 분홍, 흰색으로 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안주인은 먹다 남은 미네랄 워터에 물을 타서 주면 꽃이 더욱 생생해진다고 한다. 예상과는 달리 부엌에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팔을 넉넉하게 펼친 소나무가 주변의 집들을 완전히 가려 주었다. 멀리 사는 아들네가 찾아와서 여름휴가를 함께 보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침이면 갓 구운 크루아상을 베이커리에서 사 오고, 오후에는 놀이동산을 가든지, 손주들이 사달라는 펀치백을 사러 함께 운동구 점으로 가기도 한다고 한다. 한 달이란 시간을 오롯이 내어주는 헌신적인 조부모였다. 바비큐일 거라고 단정했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오븐에서 갓 꺼낸 듯한 고기 냄새가 났다. 안 주인이 구워낸 오리를 남자 주인이 정성스럽게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갈색으로 기름이 쏙 빠진 오리 껍데기는 조그만 사각형으로 잘라서 접시에 깔아 놓았다. 오이채와 파채가 한편으로 놓이고 세 종류 김치가 흰 접시에 담겨있다. 나는 오리고기를 어디서 시켜 왔을까를 생각하며 여자 주인이 쪄내는 밀전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생오리를 사다가 오븐에 직접 구었다는 것이다. 나도 마트 냉동고에서 방망이처럼 길쭉한 오리를 본 적이 있다. 이 오리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했지만, 집에 가서 검색해 보기로 했다. 디저트 시간이다. 남자 주인이 내가 사서 온 케이크를 보고 반색을 했다.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접시에 담았다. “이게 행복이야. 친구와 더불어 맛있는 거 먹는 것.” 그는 감격해서 말했다. 알프스에서 산악 바이크를 타고 이탈리아 맛집을 순회하던 분이 이 여름에 어디 가지 않고, 손주들을 기다리며 케이크 한 쪽에 좋아하고 있었다. 나이 들수록 행복은 단순해지나 보다. 평소에 지인을, 친구를 생각하면 얼굴만 떠오른다. 밖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 얼굴만 둥둥 뜨고 배경은 백지로 남는다. 평소 밖에서 보던 안주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오리고기하고는 거리가 멀었기에 난 밖에서 사 왔을 거라고 단정했는지 모른다. 실제로는 그분은 난을 예쁘게 피워내기도 하고 오븐의 열기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기도 하고 김치를 정성스레 담그는 여자였다. 이렇듯 잘못된 기억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한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사람을 편견 없이 진심으로 알아 간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김미연 / 수필가이 아침에 오리고기 향연 오리 껍데기 저녁 초대가 우리 손주
2025.07.06. 19:00
지인네에서 저녁 초대가 있었다. 최근 들어 누구 집을 방문한 적이 거의 없다. 아마도 그 집 정원에 있는 수영장을 열었나. 그래서 바비큐를 하나라고 추측했다. 오랜 세월에 거쳐서 몇 번 만났지만 남자 주인은 수영장을 무척 아낀다는 것, 안 주인은 자식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 그 정도의 느낌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주말에 느닷없는 저녁 초대가 왔을 때, 나는 십여 년 전에 한 번 간 적이 있는, 수영장의 바비큐를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주소도 가물가물한 듯 스트리트 이름이 뭐더라 하고 물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집 주소가 툭 튀어나왔다. 기억이란 참 제멋대로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스치는지, 나 편한 대로 형성된 기억의 조합이 사실처럼 들어앉아 있을 수도 있다. 그 집에는 세월이 가져다준 상장처럼, 벽마다 네 명의 손주 사진이 붙어 있었다.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은 그림도 함께 붙여 놓았다. “세상에 우리 손주가… 가문에 영광 아니가.” 안 주인은 눈을 초승달처럼 뜨면서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응접실에 햇볕이 드는 창가 쪽에는 탐스럽게 꽃이 핀 난 화분들이 보였다. 오래된 것 같은 화분들은 노랑, 분홍, 흰색으로 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안주인은 먹다 남은 미네랄 워터에 물을 타서 주면 꽃이 더욱 생생해진다고 한다. 예상과는 달리 부엌에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팔을 넉넉하게 펼친 소나무가 주변의 집들을 완전히 가려 주었다. 고졸한 조형물이 수영장 둘레에 서 있다. 멀리 사는 아들네가 찾아와서 여름휴가를 함께 보낸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침이면 갓 구운 크루아상을 베이커리에서 사 오고, 오후에는 놀이동산을 가든지, 손주들이 사달라는 펀치백을 사러 함께 운동구 점으로 가기도 한다고 한다. 한 달이란 시간을 오롯이 내어주는 헌신적인 조부모였다. 바비큐일 거라고 단정했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오븐에서 갓 꺼낸 듯한 고기 냄새가 났다. 안 주인이 구워낸 오리를 남자 주인이 정성스럽게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갈색으로 기름이 쏙 빠진 오리 껍데기는 조그만 사각형으로 잘라서 접시에 깔아 놓았다. 오이채와 파채가 한편으로 놓이고 세 종류 김치가 흰 접시에 담겨있다. 나는 오리고기를 어디서 시켜 왔을까를 생각하며 여자 주인이 쪄내는 밀전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생오리를 사다가 오븐에 직접 구었다는 것이다. 나도 마트 냉동고에서 방망이처럼 길쭉한 오리를 본 적이 있다. 이 오리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했지만, 집에 가서 검색해 보기로 했다. 디저트 시간이다. 남자 주인이 내가 사서 온 케이크를 보고 반색을 했다.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접시에 담았다. “이게 행복이야. 친구와 더불어 맛있는 거 먹는 것.” 그는 감격해서 말했다. 알프스에서 산악 바이크를 타고 이탈리아 맛집을 순회하던 분이 이 여름에 어디 가지 않고, 손주들을 기다리며 케이크 한 쪽에 좋아하고 있었다. 나이 들수록 행복은 단순해지나 보다. 평소에 지인을, 친구를 생각하면 얼굴만 떠오른다. 밖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 얼굴만 둥둥 뜨고 배경은 백지로 남는다. 평소 밖에서 보던 안주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오리고기하고는 거리가 멀었기에 난 밖에서 사 왔을 거라고 단정했는지 모른다. 실제로는 그분은 난을 예쁘게 피워내기도 하고 오븐의 열기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기도 하고 김치를 정성스레 담그는 여자였다. 이렇듯 잘못된 기억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한 우주를 체험하는 것이다. 사람을 편견 없이 진심으로 알아 간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김미연 / 수필가이 아침에 오리고기 향연 저녁 초대가 수영장 둘레 오리 껍데기
2025.06.25. 22:51
“너무나도 그 임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 가수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는 아버지의 18번 곡이다. 엄마를 선산에 묻고 돌아오신 날, 아버지는 금주 선언 30년 만에 다시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 어른들 모시고 살면서 눈치 보느라 감정 표현도 제대로 못 하고 살아온 세월이 미안해서였을까. 아니면 무정하게 먼저 떠나버린 아내가 야속해서였을까. 절규하듯 부르시던 그 노래를 우리는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라지셨다. 고모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아버지를 기다리던 고모의 전화 한 통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고모 집은 버스로 15분 거리, 걸어가도 충분히 도착할 시간이었기에 모두가 불안에 휩싸였다. 이곳저곳 수소문하던 중,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계시는 아버지를 지나가던 행인이 경찰에 인계했다는 것이다. 여든 되시던 해, 치매 검사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만큼 총명하셨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얀 백지처럼 되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더 충격을 받으셨는지, 그날은 식사도 거른 채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셨다. 재검사 결과는 알츠하이머형 치매였다. 진행 속도를 늦추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시곗바늘이라도 붙들고 늘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90세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던 65세로 돌아가 계신 듯하다. 이제 아버지의 뒷바라지는 가족들이 한마음으로 보살피고 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나는 늘 구경꾼일 뿐이다. 올케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면 “아버님은 너무 착한 치매, 예쁜 치매라서 우리 힘들게 하시진 않아요, 고집이 없어지셔서 오히려 더 편한 점도 있어요”라고 말해주니 참 고맙다.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 주었다. 친척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 “너거 엄마가 자식들 힘들게 할까 봐 하늘에서 너거 아부지 정신 줄 딱 붙잡고 있는갑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자는 언약을 지키지 못한 엄마의 마지막 배려일까. 치매는 식구들까지 잡는다고 할 만큼 무서운 병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인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질병 1위가 치매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이제 모범생이 되었다. 휴지가 눈에 띄면 얼른 주워 휴지통에 버리시고 손은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깨끗하게 씻으신다. 외출 후 갈아입은 옷은 가지런히 접어두고 방 안은 늘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다. 가끔은 수업 시간인데 운동장에서 배회하는 학생들을 교실로 들여보내야 한다며 서둘러 밖으로 나가시려 한다. “학생들은 잘 타일러야지 윽박지르거나 체벌로 다스려선 절대 안 돼.”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평생 어떤 교육관과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지도해 오셨는지 단면이 보이는 듯하다. 무병장수는 모든 이의 소망이다. 하지만 현실은, 유병장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의술과 의약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아버지는 인지능력 저하로 손녀딸을 막내딸로 착각하시고, 자신의 나이조차 가물가물하신다. 외로움과 그리움의 세월을 견뎌온 25년의 기억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이제는 ‘동숙의 노래’를 부르던 이유마저 잊어버리셨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셨던 아버지께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예쁜 치매’라는 이름 아래 남은 여생을 자식들에게 기대어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랄 뿐이다. 가족 카톡방에 작은언니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번 주말에 아버지 모시고 봄나들이 가는 것 잊지 않았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맛집에 가서 점심 먹고, 선산에 들러 엄마께 봄 소식도 전하자. 언덕에서 쑥 캐고, 벚꽃나무 그늘에서 쉬다 올 거니까 돗자리는 오빠가 꼭 챙겨 줘.” 따스한 봄볕을 만끽하며 흩날리는 꽃비를 맞을 때, 또 하나의 추억이 조용히 쌓일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 시계여, 쉬엄쉬엄 놀면서 가렴. 김윤희 / 수필가이 아침에 인생시계 아버지 치매 검사 버스정류장 벤치 가족 카톡방
2025.06.17. 19:42
손을 꼭 쥐었다 편다. 손바닥을 살펴보니 주름 사이로 흐르는 손금 옆에 길게 자리한 상처 흔적이 보인다. 오랜 세월 사랑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개하며 살아온 손이다. 투박한 내 손을 어루만진다. 미국 이민와서 13년이 지나 두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홀로서기를 작정했다. 막 비행기에서 내린 이민자의 자세로 시작한 새로운 도전은 부지런하고 든든한 손이 있어 가능했다. 주름 사이에 드러나는 왼쪽 검지에 쌀톨만한 흉터를 들여다본다. 마음에 화를 담고 칼질하다 입은 상처의 흔적이다. 칼을 만질 때마다 머릿속을 비우라는 안전 수칙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내 감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 손이다. 이민 초기, 가게에 총을 든 강도가 들었다. 무서움으로 손에 땀이 흥건했다. 당할 수만 없다는 생각으로 상황을 침착하게 살펴보며 주먹을 쥐었다. 요구하는 돈을 챙기려면 강도 뒤쪽으로 가야만 했다. 놈은 제 뒤에 있는 여자 한 명쯤이야 안중에 없다는 듯, 마룻바닥에 엎드려 있는 종업원들을 말로 위협하며 건들거리고 있었다. 돈을 봉투에 담으며 상황을 살피는 동안 남자의 손 안에 총이 헐렁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내 손이 민첩하고 강하게 총을 쳐냈다.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 생겼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공포에서 벗어난 종업원들이 일제히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놈은 우리 다섯 명 손에 꼼작 없이 잡혀 죽지 않을 만큼 맞은 다음 경찰에 넘겨졌다. 내가 기억하는 처음 손가락 상처는 대여섯 살쯤이었다. 집토끼 먹이를 찾아 개천 둑으로 갔다. 낫을 들고 어른 흉내를 내다 풀잎 대신 내 왼쪽 중지 마디를 찍어 피가 흘렀다. 울면서 들어서는 나를 본 엄마는 빨강 약을 발라주고 천 조각을 찢어 상처를 싸맸다. 지금도 손을 만지다 흉터를 느낄 때면 호호 입김을 불어 주던 엄마가 보인다. 생전에 내 손을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 ‘손이 많이 상했구나’ 하며 내 손을 감싸며 안쓰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 그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다. 태평양 건너에 살아 자주 만날 수 없었던 딸,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줄 알았던 딸의 고생을 알고 묻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손을 꼬옥 잡고 소통하는 동안 뜨겁고 끈끈한 감동이 피어났던 그 시간이 그립다. 그때가 어머니와 피부를 맞대는 마지막이 되리라곤 짐작조차 못했다. 내 손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주름과 흠집이 많은 손, 내가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손이다. 내 어린 조막손을 잡아주던 엄마를 불러오는 손, 환갑이 지난 나를 염려하던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을 간직하고 있는 손, 강도를 물리친 손이다. 산전수전 겪으며 생의 굽이 굽이를 헤쳐온 손. 그 거친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는다. 손의 온기가 얼굴에 전해온다. 아직 따뜻한 내 손, 이 손으로 옆집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이웃과도 온기를 나누고 싶다. 이정숙 / 수필가이 아침에 상처 흔적 손가락 상처 강도 뒤쪽
2025.06.16. 21:00
지난 토요일 독서 모임에 다녀왔다. ‘한강 읽기 모임’이었다. 책을 많이 잘 읽고 싶은데 혼자는 한계가 있다. 읽다가 중단한 적이 많다. 수행하듯 읽으니 다른 재미있는 일에 치이기 일쑤다. 스스로 정한 목표치만 간신히 채우고 덮어버리곤 한다. 글을 쓰려 맘먹고부터 독서의 필요를 더욱 느끼고 있다. 어떻게 쓰는지 곁눈질했다. 고전을 읽으려 시도했다. 사람들이 살아낸 환경을 배우며 그네들을 이해하고 글 속의 주옥같은 표현도 닮고 싶었다. 읽을수록 내 부족한 점이 드러났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어렵게 읽은 책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해 아쉬웠다. 의지를 다해 읽어 내린 책은 곧 책꽂이에서 장식품이 됐고 나는 읽어냈다는 안도감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생각은 입을 통해 밖으로 나와 객관화 과정을 거친다. 타인의 말을 들으며 내 맘을 깨닫기도 한다, 동의하는 혹은 반대하는 대화를 통해 제대로 알아간다. 책 속에 나오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내 기준에 갇히기 쉽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며 고정된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설득하기도 하고 설득당하며 폭이 넓어진다. 타인과 더불어 배울 수 있어 참 좋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독서 모임이 열린다니 가슴 뛰는 일이었다. 신문을 통해 알고 오신 분이 대부분이었다. 관심 있는 분들과 작품을 중심으로 생각을 나누고 곁가지도 듣고 왔다. 선물 하나 들고 갔다가 두 손 가득 선물 받고 왔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로 모임을 했다. 작품 배경인 제주 4·3사건에 대한 자료를 공부하고 책도 꼼꼼히 읽어 갔다. 독서 토론 경험이 없는 나는 책에 밑줄 쳐가며 읽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의견을 말했다. 모임에는 제주에서 생활하신 분들이 있어 제주 살이에 대한 다양한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집에 살더라도 각자의 부엌을 갖고 따로 살림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는데 독립적인 여성들의 삶이 놀라왔다. 한강 작가를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젊은 여성인 그녀에게 호기심이 일어 몇 편을 읽었다. ‘아버지 영향으로 문단에 쉬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라는 내 선입견은 사라졌으나 이상 문학상을 받은 ‘몽고반점’을 접하고는 난해한 작가라 여기고 그녀를 잊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 그녀 책을 다시 보고 있다. 배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적 표현이 담긴 작품들에 유난히 마음이 끌린다. 한강 작가는 역사 뒤안길에서 잊혀져간 사람들 삶에 시선을 둔다. 나는 비겁하게 뒤로 빠져 적당히 살아가고 있으나 누군가 나와 주길 바랐다. 용기 있는 누군가를 기다렸다. 승자들이 써 내려간 역사 안에서 그녀는 소시민을 어루만진다. 그녀 책을 읽음으로 그녀를 응원하기로 했다. 다음 독서 모임이 기다려진다. 한 달에 한 번, 오렌지글사랑에서 진행되는 이 모임에 관심 있는 분들 함께했으면 좋겠다. 김현실 / 수필가이 아침에 독서 모임 독서 토론 다음 독서
2025.06.11.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