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틀을 신주처럼 보관하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우리는 아버지(박목월 선생)를 기다리다 한 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세 아이를 데리고 남으로 피난하기로 했다. 큰아들(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인 내가 앞장섰다.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집 호박잎을 따서 죽을 끓였다. 어머니는 신주처럼 여기던 재봉틀을 쌀 한 보따리와 교환했다. 맏이였던 내가 쌀 주머니를 맸다. 한참 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무거워 보이니 대신 운반해 주겠다고 했다. 아저씨는 쌀을 가지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우리는 가보처럼 모셨던 재봉틀을 잃었다.
돌아가신 우리 장모님은 6·25사변 때 원산에서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피난선을 탔다. 남편은 배가 출항하기 전 잠깐 집에 다녀오겠다고 한 후 생이별을 했다. 장모님은 수복이 되면 빨리 원산으로 돌아갈 마음으로 휴전선에서 가까운 속초에 정착했다. 장모님은 피난 올 때 가져온 재봉틀로 남의 옷을 만들어 두 딸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냈다. 큰 딸인 아내가 한 말, 외삼촌은 술꾼이었어요. 술 마실 돈이 떨어지자 누이의 전 재산인 재봉틀을 훔쳐다 팔았어요. 나는 외삼촌을 미워했어요.
전쟁 후 부산 철길 옆에서 살다 상경해 판자촌에서 움막을 쳤습니다. 엄마는 재봉틀로 바느질해서 아이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어린 나는 엄마의 바느질을 도와주었습니다. (민병임 장편 소설 ‘꿈’에서)
조선 여인(한국 여자)들은 키가 작고 몸은 연약하지만 예로부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마을 아낙네들은 삼베 풀을 베어 뜨거운 물에 짜서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내 삼베옷을 만들었다.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는 동네 부인들이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길쌈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어머니도 바느질했고 나이가 많아져 눈이 침침해지자 나에게 바늘귀를 찾아달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의 수출 증대는 섬유업이 주도했다. 시골 처녀들은 공단에서 밤낮없이 재봉틀을 밟았다. 바느질 기술이 좋은 어머니 밑에서 은연중 재능을 전수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으로 남미 이민이 시작되었다. 뉴욕한국일보 기자 시절 브라질 취재에서 들은 이야기. 농업이민으로 왔지만 처음부터 농장에서 일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민 보따리에 넣고 온 옷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더는 팔 옷이 없어지자 옷을 뜯어 본을 뜨고 제품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미에는 잠바라는 옷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소개했습니다. 바느질 기술이 월등한 부인들이 제품업으로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제 2세들은 현지인을 고용하면서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첨단 패션을 배워 의류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동포들은 한때 세탁업에 많이 종사했다. 코리언 부인들의 테일러잉(옷 수선)은 고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즐겨 입던 옷을 맡기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마음에 들게 고쳐주었다. 매직 터치였다. 드라이클리닝 업이 쇠퇴한 지금도 한인 업소들은 옷 수선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할머니,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은연중에 후손들에게 이어졌을 것이다. 이민 온 지 오래돼 할머니가 된 지금도 딸들이 옷을 사 오거나 입던 옷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면 순식간에 해내는 부인들, 바느질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과 신뢰가 이어지고 있다.
1851년 미국인 Isaac Singer가 재봉틀을 발명했다. 바느질을 많이 하는 한인 가정은 이 신비한 기계를 너도나도 사들였다. 재봉 일은 어려웠던 시절, 생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바느질은 섬유산업을 일으켰고, 남미의 제품업을 성장시켰다.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재봉틀을 밟던 어머니들, 그 정성과 사랑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