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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Moody

New York

2025.07.2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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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량 정신과 의사

서량 정신과 의사

1. 기분
 
‘mood’는 고대영어로 ‘지성적인, 자랑스러운’이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그 의미가 사라진 지 오래다. 옛날 서구인들은 겉으로 보이는 표정이나 태도에 따라 상대의 기분을 가늠했을 터이다.
 
16세기에 ‘in the mood’, 즉 무엇을 ‘하고 싶다’는 관용어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서 당신 여친이 ‘I am in the mood’, 하며 곱고 살갑게 눈웃음치며 말했다면 그녀가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한 것으로 냉큼 알아차렸어야 했었다.
 
‘mood’ 끝에 ‘y’를 붙여 ‘moody’라 하면 12세기 까지만 해도 성질이 사납다는 뜻으로 통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어둡고 우울한, gloomy’라는 뜻으로 변했다. 자랑스러운 마음이 우울한 심정으로 바뀐 것이다.
 
기분(氣分)이라는 말은 고기압, 저기압 할 때처럼 일기예보를 연상시키는 한자어. ‘대상, 환경 따위에 따라 마음에 절로 생기며 한동안 지속하는 유쾌함이나 불쾌함 따위의 감정’이라고 사전은 자상하게 풀이한다. 당신과 내 기분은 환경의 변수다. 기압골의 높낮이가 좌우하는 날씨, 맨해튼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의 왕왕대는 ‘ambience, 앰비언스’ 같은 외부여건과 깊은 함수관계를 맺는다.
 
 
 
2. 느낌
 
‘feel’은 고대영어로 ‘touch, 만지다’라는 뜻이었다. ‘촉감(觸感)’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갓난아기처럼 우선 대뜸 만진 후 나중에 느끼는 이벤트. 당신과 내 감각은 유아기(乳兒期)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12세기에 들어서서 ‘feel’에 ‘느낌’이라는 의미가 깃들여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촉감=느낌’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가지 난점이 있다. 촉감도 느낌도 언어라는 도구를 빌려서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 정신상담에서 자주 거론되는 사항으로서 자기감정을 말로 옮기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치유의 진도가 느리다는 통설이 그것이다. 언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 정신적인 진화를 일으키기 쉽다는 견해.
 
아니다. 꼭 그렇다고 우기지 못한다. 생물체와 생물체 사이에 언어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며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살아온 뼈저린 체험이다. 일종의 전자파장, 당신과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에헴, 영혼의 와이파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3. 감정
 
‘느낌’은 순우리말. ‘감정(感情)’은 한자어. 당신은 부디 ‘느낄 感’을 ‘유감(遺憾)’의 ‘섭섭할 憾’과 혼동하지 말지어다. 발음이 같다고 해서 자칫 ‘느낌=섭섭함’이라는 엉뚱한 등식을 내세우고 싶은 유혹이 솟는다. 느낌이나 감정이 지나치면 섭섭한 마음이 싹틀 수도 있으려니.
 
性, 또는 情에서처럼 심방변(心傍邊)에 느낄 감(感)이 합쳐진 모습을 숙지해주기 바란다. ‘너 나한테 감정 있어?’ 할 때는 憾情이고 ‘감정이 솟구치다’ 할 때는 感情인 것을.
 
 
 
4. 퉁치기
 
정치가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대신 유감(遺憾)을 표명함으로써 자기의 원망심에 방점을 찍는다.
 
세상에 이런 발칙한 발언이 또 있을까. 육중한 한자어를 교묘하게 사용하는 그들은 이런 말장난을 부리는 습관에 익숙하다. 국가와 국가가 우물쭈물 서로 퉁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줄 것과 받을 것을 서로 없는 것으로 치다’라는 뜻의 퉁치기! 사과하기는커녕 ‘섭섭한 마음’을 들어냄으로써 자신을 피해자로 그리고 상대를 가해자로 탈바꿈시킨 후, 이제는 가도 좋다는 시그널로 퉁! 하며 승용차 문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서 나는 불현듯 기분이 ‘moody’ 해진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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